탐진만 햇발
挽陳提學女 진제학 따님 만사
김현임 수필가 모란촌문학동인회
十五人間世 열다섯 인간 세상에 살았는데
霜風折弱蘭 서리 바람이 어린 난초를 꺾었네
慈親未亡怨 어머니는 죽지 못해 원망하고
君子隔生歎 낭군과는 이승과 저승이 나뉘어졌네
玉匣菱花暗 옥갑의 마름꽃은 먼지에 뒤덮이고
緗簾璧月寒 주렴에는 둥근 달만 차가워라
春魂托社燕 꽃다운 넋이 삼짇날 제비가 되어
應傍舊門闌 옛집 문지방 위로 날아오르소서
挽詞의 挽은 ‘당긴다, 잡아당겨 못하게 하다’라는 뜻이니 홀연히 떠나가는 이의 옷자락을 붙들어 잡고 눈물로 안타까이 만류함을 의미함인가. ‘끌다’, 혹은 ‘수레’를 뜻하는 輓은 지인들의 어깨 위에 얹힌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타는 수레, 오색 화려한 꽃상여로 읽혀지니 挽詞는 輓詞와 더불어 죽은 이를 기리는 시다.
올 초 遑忙 중 맏아들을 잃은 분께 삼가 위로의 편지를 쓰려고 망설이고 망설이다 어느 새 한 해의 끝자락에 이르고 말았다. 세상에 어떤 말이 있어 자식 잃은 슬픔의 단 한 조각이나마 덜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쓰고 지우기 몇 번, 종내 부치고 만 편지니 바람 스산한 오늘 붙들리는 임제 선생님의 시는 우연이 아니다.
이 시를 쓸 즈음 제학 벼슬을 지낸 陳씨로는 진식(陳寔 1519-1568)만이 확인되며 그는 권신 김안로의 횡포에 맞서 그 일당을 탄핵하는 등 기개가 높은 선비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 인생 노정에 吉祥善事만 존재하던가. 권태의 늪과 고독의 수렁, 우울의 계곡, 그것으로도 부족해 걸핏하면 우리를 빠트리는 비탄의 강이 도처에 흐르는 위험지대가 사람살이의 길이다. 결코 피할 수 없다는 天羅地網 중 가장 헤어나기 힘들고 깊은 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한 뜻밖의 이별일 터. 제 아무리 혹독하고 견디기 힘든 별리라 한들 차갑게 식은 자식의 손 놓기에 비할까. 오죽 하면 일시에 천하가 어둠에 잠겨버리는, 빛을 잃는 아픔이라 칭했다. 졸지에 喪明之痛을 당한 친지를 위로하는 백호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흐르는 시를 천천히 음미한다.
임제 선생님의 無語別에도 등장하던 처녀 나이 열다섯이다. 이제 막 戀慕의 꽃송이 벙그러지던 어린 처녀는 부끄럼에 차마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규중 문 굳게 닫고서야 제 속내를 드러냈다. 그런데 겨우 그 나이에 맞은 죽음이라니! 시 속에서 풍기는 코 끝 아련한 분 향기가 외려 읽는 이의 悲感을 자극한다. 분곽을 뜻하는 마름꽃 새겨진 玉匣도 그렇고, 구슬달빛 어리는 담황색 비단 발의 선연함, 春魂이라는 시 속 낱말들이 가슴에 서늘히 닿는다.
葬誌銘, 哀詞, 祭文, 墓誌銘, 이 모두 輓詞와 함께 죽은 이에 바치는 헌사다. 역대 문사치고 이런 류의 글을 남기지 않는 이 드물다. 유독 墓誌銘을 많이 남긴 이는 18세기 중, 후반 우리 문단의 翹楚로 일컬음을 받는 노긍이 다. 科文의 명수였다는 그의 천재적 재능을 시기한 사람들의 모함이었다. 과거 시험장에서 문장을 팔았다는 억울한 죄목으로 귀양 가 평생 울분의 세월을 보낸 불운한 작가다. 죽은 자에게 바치는 절절한 슬픔을 빌어 실은 처량한 자신의 처지를 마음껏 토로 한다던가. 자신이 귀양 가던 해에 죽은 아내를 필두로 아들, 며느리에 이어 죽은 노비 막돌이의 묘 앞에 바치는 신분 파격적 제문에 이르기까지 그가 쓴 墓碑銘 구절마다에 내비치는 그의 신산한 삶에 눈시울 뜨거워진다.
앞 선 자식을 향한 글은 구구절절 얽힌 사연이 많아 길어지기 십상이라 했다. ‘문장을 쓴 것이 죄로다’는 탄식의 題名이 붙었던가. 귀양 간 자신 대신 어린 네 동생들을 돌보다 결국 병을 얻어 죽은 큰 아들의 묘비명에 붙인 노긍의 부제다. 친지의 딸을 시로서 애도하던 백호 임제 선생님도 어찌 짐작 하셨으랴. 병환 중의 당신 또한 딸을 잃고 亡女尊詞, 딸의 제사상 앞에서 가슴 치는 시를 손수 쓰시게 될 줄을.
한 다리가 천리라 했다. 땅의 신에게 곡식이 잘 자라기를 비는 춘사일에 반가이 날아 든 제비처럼 혼백이나마 다녀가기를 바라노라셨다. 애조의 흐르는 시구 속 자못 점잖은 기원으로 맺은 이 시에서와는 달리 정작 딸의 죽음 앞에 백호 선생님의 필치는 이성을 잃는다. 용모와 덕성이 빼어난 내 딸에게 도대체 무슨 허물이 있어 데려갔냐고 하늘을 향해 묻고 울부짖으며 원망을 쏟는다. 望奠이란 神位 앞에 갈 수 없어 멀리서 제를 드리는 것, 샘물로 네 신열을 축이고 술과 과일로 네 목을 축이거라, 어쩔 수 없이 하늘의 뜻에 順命하며 서글피 당부하지마는 아비의 설운 한은 구만리 長天까지 이어진다.
유난히 사랑하던 아드님이셨으니 부모님의 꿈속에나마 자주자주 현몽해 주기를 기원할까. 차라리 뼈 삭아 내리는 아픔 잊게 한시 바삐 저 망각 속으로 사라져주기를 부탁할까. 그 어떤 위무의 말이 귓전에 닿으랴. 죄인 아닌 죄인이 된 만신창이 가슴엔 예민한 칼끝, 내 섣부른 위로의 말 살아생전 영원히 아물 길 없는 두 분의 상처를 후비리라는 염려다. 이래저래 내 편지는 다음 날, 또 다음 날로 미뤄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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