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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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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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⑨
전쟁 중 약탈로 유품 한 점 못 건진 유가족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다

아버지 그립고야⑨

 

전쟁 중 약탈로 유품 한 점 못 건진 유가족

 
1950년 말, 다시 무서운 추위(영하 13~18도)가 엄습하면서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과 인민군은 계속 서울을 향해 공격해 왔다. 1951년 새해가 밝으면서 유엔군과 국군은 1월 4일, 서울에서 다시 후퇴의 길을 택했다.

영랑 유가족도 걸어서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피난길에 오르기 전 중요한 책, 의류, 가재도구 등을 지하 방공호에 보관하고 그 위에 흙을 두껍게 덮어 방공호 자체가 안 보이도록 위장한 후 남쪽으로 떠났다.

1년 뒤 다시 서울이 수복되어 유가족이 서울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 집은 옛날 살던 집이 아니었다. 지붕, 벽체, 기둥, 대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마룻바닥까지 다 뜯어가서 완전히 폐가로 변해 있었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방공호 위를 덮었던 흙이 옆으로 치워진 채 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역시 그 안에는 썰렁한 곰팡이 냄새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유가족은 1930년에 간행된 첫 시집 〈영랑시집〉 한 권조차 보존하지 못했다.

유가족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집을 재건할 재정적 능력이 전무했다. 전쟁 중이라 부동산 시세가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지만 생활 방도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헐값으로 집을 정리하고 그 후 10여 년간을 셋방살이로 전전했다.

평생 처음 당한 가난으로 자식들 중 한 사람을 빼놓고는 대학을 6년에서 8년 걸려 마치거나 그도 못해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후 많은 국민이 그랬듯이 영랑 유가족에게도 이때가 전무후무한 가장 어려웠던 세월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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