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햇발
순이 생각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원)
키가 크고, 새하얀 피부에 큰 눈, 중학교에 일등으로 합격한 우리 반 반장이 순이다. 입학성적 서열의 열세 명에게 돌아가는 장학금 혜택이니 내게도 담임선생님은 조금만 더 노력하라셨던가. 순이는 잡비를 걷을 때, 교탁 앞에서 반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지침을 전할 때 외엔, 맞아 우연히 마주칠 때면 서로 호의적 웃음을 나눴을 뿐 나와 특별한 접촉은 없었다. 더구나 몸이 약한 나는 걸핏하면 핏기 없는 얼굴로 사흘에 한 번꼴로 조퇴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니... . 하지만 지금도 순이를 떠올리면 그 애를 곁을 맴돌던 해맑은 느낌은 여전하다.
후배로부터 ‘숨어사는 별처럼’이라 회억되신 이 수복선생님은 고요롭지만 절대로 음습하지 않는, 나무들의 진초록이 너무 깊어져 어느덧 무채색 화된 고즈넉한 숲의 분위기를 풍기는, 그 영어 선생님께서 시인이시란 걸, 더구나 순이가 그 분의 딸이라는 걸 어느 날 주번이 들고 와 우리 반 모두에게 나눠주던 하얀 장정의 시집 ‘봄비’를 받고서야 알았다.
이 비 그치면 강나루 긴 언덕에 짙어오는 서러운 풀빛이라던가.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 무어라고 지껄이는 종달새,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에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 라는 구절이 들어가는 시집 제명이 된 봄비의 시구도 좋았다. 눈을 찌를 듯한 진초록에 하염없이 사로잡혔던 그 시절 어느 싯구던가. ‘초록 청청 제비 날고’라는 그 구절이 노래의 후렴구처럼 내 입 속에서 맴돌았다 기억은 편의에 복종한다던가. 용량이 한정된 우리의 뇌는 회상하기 싫은 시절의 기억부터 서둘러 비워낸단다. 참으로 고약했던 할머니, B사감과 러브레터라는 작품 속 모델이 분명하던 늙은 성경선생님이 내린 교회불출석의 벌이었다. 봉긋이 돋기 시작하던 가슴에 비례해 어른을 향한 반발도, 자존심도 한창 약 차던 시절의 소녀들에게 손바닥 체벌과 함께 앉고 있던 의자를 들고 수업을 받게 했다. 그런 가혹한 형벌이 기다리는 데도 끔찍하게 가기 싫던 교회, 어쩔 수 없이 내린 내 나름의 타협안이었다. 주말마다 난 교회 뜰 마당에서 놀았다.
포도는 하냥
숨어내리는
叡智(예지)에 깊다.
외롭고 고달플 제
내 한 철
쉬어가는 그늘
물 위를 나는 가을나비가 바다를 모르듯 흐르는 잔물결을 타고 나도 덧없는 세월의 강을 허겁지겁 건너왔다. ‘불라’는 2600년 전의 진흙덩이 도장이란다. 사람의 삶에도 그런 거역 못할 운명의 인장이 찍히는 순간이 있는 것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을 찾아 그 분의 그늘로 숨어들고, 텅 빈 큰 집의 고요, 흔들리던 유리창 소음의 공포를 견뎌내기 위해 끄적이던 글이 평생 버릇이 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작가로서 자존 같은 건 생긴 지 불과 얼마 전, 어쨌든 나 또한 글 쓰는 사람이 되었으니 조용한 성품의 영어선생님 이 수복시인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은 ‘아는 사이’다워서 눈과 귀에 설지 않다는 말에서 출원한 거라면 그 분과 나는 아름다운 사이인 것에 틀림이 없다.
누구도 함부로 꾸중은커녕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고 나즉나즉한 목소리로 일관하시던. 첫 무도회의 떨림이랄까. 겨우 열 세 살의 우리로 하여금 우아한 숙녀대접을 받는 우쭐함에 젖게 하던 선생님의 수업방식이 좋았다. 공부는 물듦이라 했다. 공부를 매개로 서로에게 물들면서 성숙해가는 것, 어느 책에선가. 하루살이의 일생을 접한 적이 있다. 물론 기나긴 유충의 시절을 보내는 매미처럼 물속에서 1-3년이란 짧지 않은 예비단계의 삶을 보내는 하루살이다. 그러나 마침내 성충으로 허락된 건 단 하루, 그 하루라는 짧은 일생 동안 마주치는 어떤 것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종족 번식의 과업을 마친 후 기꺼이 다른 곤충의 먹이가 된다는 보시의 삶이 하루살이의 일생이었다. 하긴 지상의 생, 누군들 그런 행태의 삶의 이력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만 선생님을 떠올리면 그 거룩한 생의 느낌이 든다.
어느 해 1월 1일에 태어나서 45세에 시집 한 권 내시고 64세의 1월 1일, 당신의 생일날 날 홀연히 떠나신 그 분의 자취가 그렇다.
생각난다./ 그 엽서가/1968년에 날아왔던/그 엽서/아름답기까지 했던/당신의 독특한 필체로/아,/다 잃어버린 지금/그 엽서를/생각하며/운다./家寶였던/그 엽서/國寶같았던/그 엽서/ 그 엽서가 그리워/운다/당신의 그림자 같았던/ 그 엽서/그 엽서가 그리워/아이처럼 운다.
선배시인으로부터 받은 소중한 엽서를 잃고 쓴 한 시인의 시처럼 내게 잠시 다가왔다가 분실해버린 귀한 것들이 남긴 자취를, 굽이굽이 휘어진 시간의 모롱이에 기대어 고요히 더듬어보는 시간, 눈 감고 더듬다보면 허공에 맴도는 은은한 향기다. 말 대신 글을 쓴다는 것, 이런저런 단어를 고르며 멀리 달아난 유년의 기억들을 불러오는 시간엔 가능한 오래 쓰지 않고 숨겨 둔 낱말들을 아껴가며 쓰고 싶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해후한 듯, 오래 묵은 보석들을 잘 닦아 광채 내어 다시 깊숙이 보관하는 작업. 옛 분이 남긴 경전 더듬기, 이 수복 선생님과 얽힌 추억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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