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햇발
한없이 착한 마음
김현임(수필가· 모란촌문학동인회)
점동이가 돌아왔다는 것이 도대체 믿기지 않습니다. 틈만 나면 탑골로, 영모정 언덕으로 올라가 온 마을 떠나가라 녀석을 부르기 몇 번이었던가요. 아무튼 지금 이 순간 저는 너무 기쁩니다. 온 가슴이 벌렁 벌렁 거릴 정도로.
분홍이라니, 녀석에겐 이제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릴 적 살구빛 똥꼬가 이뻐 붙여 준 봄날 벚꽃을 떠올리는 이름이 말입니다. 본디 타고난 천역성(遷易性)을 어쩔 수 없었던지, 아님 큰 몸피 지닌 것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운명의 무게를 외면할 수 없었던지 어느 날 가출해 덩치가 산만큼 큰 들고양이가 분홍이입니다. 반면 점동이는 덩치야 막상막하지만 어리광쟁이에 애교쟁이, 그나마 쥐사냥에 필수인 꼬리마저 잘려 그야말로 애완묘(愛玩猫)요, 주먹만 한 강아지에게도 쫓기는 겁쟁이, 아니 평화주의 고양이입니다.
어쨌든 완력으로 회진리 일대를 장악한 분홍이의 관할구역에 제 옛집도 포함되어 있었던가. 분홍이의 출현에 혼비백산,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먹기 아니면 주인의 발이 닿기 무섭게 문질러대는 것이 유일하던 점동이에게 닥친 뜻밖의 사태입니다. 한 몸체에 두 머리를 둘 수 없다는 기세로 점동이의 목을 물고 늘어지는 분홍이의 잔악한 횡포, 선반 위로 복숭아나무 밑 풀숲으로 외마디 괴성을 내지르며 도망 다니기에도 지쳤을 겁니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잔뜩 도사린 채 바닥으로 내려오길 거부하더니 급기야 열흘이 넘도록 행방이 묘연해진 점동이입니다. 기세등등한 분홍이는 세 마리 암컷들 사이를 유유히 휘젓고 다니는데.... .
점동이를 생각하노라면 전전긍긍, 한 쪽엔 죽었어가 다른 한 쪽엔 살아있을 거야가 올려진 저울추가 시시각각 번갈아 기우뚱댑니다. 다 키운 자식을 어느 시장통에서 손 놓쳤다던가, 천하에 몹쓸 인간들이 벌인 유괴라는 악명 높은 죄악에 잃은 어버이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는 나날입니다. 휘몰아치는 간절함에 속이 얼얼하는가 싶더니 결국 집 안에 한가로이 노닐고 있는 다른 녀석들이 까닭 없이 미워질 만큼, 이 모두가 점동이에 대한 애절함의 여파였습니다. 때론 반쯤 얼이 나가 짐승 식솔들 끼니를 챙길 때마다 헛소리처럼 녀석을 부르기도 하고.
그러면서 마당이라는 작은 누리는 물론이요, 가장 작은 공간인 한 치 마음의 화평이 이토록 어려운가에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선함이 악함에 판정패 당하는 걸 목격한 게 한 두 번입니까. 순한 마음이 날카로운 쇠붙이 같이 냉정한 상대에게 찔려 상처가 나기도 하고. 요즘 제가 워낙 그렇긴 했습니다. 살을 당기기는 했으나 애초 과녁도 없었고, 그러니 떨어진 곳의 정처를 모르는 화살 같은 마음의 나날들 말입니다. 하루는 빨갛게 달구어진 숯덩이를 통째로 뒤집어 쓴 듯 화끈거리기는 부끄럼에 휘둘리는가 하면, 그 날들의 틈새엔 어떤 위무의 손길이 너 그동안 열심히 착하게 살았으니 다 괜찮다, 괜찮아, 다둑여도 주고, 또 어느 날은 제 대신 흘려주는 어진 이의 뜨거운 눈물에 제 열증(熱症)이 잠시 식혀지는 날도 포개지고. 구태여 이 생뚱맞은 구절을 왜 쓰는지요?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창 밖에는 늦은 밤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등불 앞에 마음만 갈수록 아득해지는, 그런 풍경이 절로 떠오르는 신현림 시인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혹독한 사막 걷기 닮은 세로(世路)에 저만 힘든가요. 그러니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지붕 밑 누추한 넋두리는 이만 생략하지요.
대신해 ‘끓는 물주전자가 올려진 난로, 푸근한 털실 뭉치, 보드라운 고양이... .’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제명의 노래를 허밍으로 불러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부르던 노래 속엔 이런 대목이 있었죠. ‘내게 이런 축복이 찾아 온 건 언젠가 한 내 작은 착한 일의 대가’라던. 깜장고양이는, 보드라운 털실 뭉치 고양이는 제 유년을 추억하는 실마리요, 되돌아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래선가요. 앉으나 서나 눈에 밟히는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 오호라, 제 심신이 너무 나약해진 나머지 점둥이가 돌아오면 녀석이 영화 속 마리아에게 쏟아지던 행운도 함께 데불고 오리라 믿었던, 아니 믿고 싶었던 건가요.
어쨌든 발치에 휘익 무언가 스치더니 갸르릉 거리는 익숙한 애교성(愛嬌聲)!! 적선지가 필유경(積善之家 必有慶)이라더니 숱한 복록의 출발인 한없이 착한 제 마음도 다시 돌아온 것 같습니다. 공연히 미워죽겠던 복순이, 복돌이, 방울이, 제강이, 계란이, 점순이... . 제 집 마당의 자갈까지, 그 모두, 모두가 그렇게 예쁘더라니까요.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