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분들의 발자취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
1929-1569=?, 2010-1612=?. 요 근래 지상(誌上)에서 뵌 두 분의 선인(先人)들, 그 행적의 우연한 일치에 나는 때 아닌 뺄셈을 하고 있다. 일찍이 보르헤스는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현상이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일정 주기 반복하여 형체를 드러내는 것 아닌가’던 의구심을 품었다. 이른바 현신(顯身)이다. 두 분의 생몰연대를 계측한 답은 360과 398.... . 산출해낸 답이 세기 측정의 단위인 백년 단위로 맞아 떨어지지 않음이 서운하지만 약 400년 간격으로 출현한 두 걸출한 인물에 대한 내 감동의 파장만은 한 치의 오차가 없다.
내가 먼저 접한 이는 선조와 광해군 때의 시인 권필이다. 명분만 중시한다던 조선의 선비, 그들의 가치를 결코 폄훼할 수 없는 까닭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강직함’에 있다던가. 권필은 세태를 풍자한 시로 유명하다. 그는 평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포의선사로 지내다가 필화사건에 말려들어 불우한 생을 마쳤다. 시를 지어 당대의 권력자들을 조롱하여 그의 시는 나오기만 하면 도성의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고,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으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왕권(王權)이야말로 천권(天權)이던 서슬 퍼런 시대, 그의 시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급기야 신성불가침인 임금에게로까지 향했다.
대궐의 푸른 버드나무 버들개지 흩날리는데
도성의 명사님들 잘 보이려 아첨하는구나
조정에서 바야흐로 태평세월 축하하는데
누가 곧은 말이 선비에서 나오게 하는가.
이 시에서 문제가 된 건 첫 연의 ‘궁류청청(宮柳靑靑)’이다. ‘궁 안의 버드나무가 푸르고 푸르다’는 건 광해군의 부인 유씨와 그녀의 척족인 유희분 일파가 정권을 농단하는 실정을 비판한 것이니 이 시가 그 유명한 궁류시(宮柳詩)다. 광해군은 대노하여 그를 국문, 결국 그는 혹독한 친국을 받은 뒤 귀양길에 오른다. 유배지인 해남으로 향하던 중 ‘도중(途中)’이라는 쓸쓸한 심회의 시를 읊던 그는 동대문 밖에 이르러 장독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런 권필의 일대기에 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죽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났다. 시대를 관통하는 엄숙한 기운에 놀라 내 몸을 단정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조간신문에서 리영희 선생을 만났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래서 언제나 어디서나 나는 고통을 무릅써야했다.’는 책의 서문도, 그 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의 길고 짧은 헌사(獻詞)도 내겐 감동이었다.
*개인적으로 선생을 알지 못했지만
*선생님처럼 살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부끄럽게는 살지 말자
*선생의 힘차고 절밀한 문체, 특유의 치밀하고 견실한 문장에 빠져서 행복 했다
시대의 스승을 보내는 숱한 만사 구절 중 ‘나는 전설적인 불굴의 투쟁하는 지식인과 대면했다. 그러나 선생의 결박된 모습을 지상에서 봤을 때의 충격과 슬픔을 잊을 수 없다’던 도쿄대 명예교수인 와다 하루키 씨의 회고가 가장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예측불허의 세상,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이 풍진 세상에서 변함없이 그대로 있어 주는 큰 인물이 있다는 건 우리에게 큰 위로다. 무슨 일이든 그것이 자신의 몫이라면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일에 필요한 지혜와 힘은 반드시 생겨나리라는 믿음의 산처(産處)는 과연 무엇일까. 선생에게는 험한 세월의 굽이굽이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한 양심적인 지식인의 전인격이 큰 뒷받침이었을 거라 했다. ‘지식인’, 즉 ‘아는 자’는 ‘모르는 것을 알게 하고 잘못 안 것을 고쳐주는 것이 맡은 바’라고 우리를 일깨우신다. 그런가하면 ‘자주적 정신과 양심에 의거하여 인류의 보편적 이상에 충성하는 자유인이라’는 게 지식인에 대한 선생의 정의다.
‘담장 가에 피어난 매화 한 가지가 추위를 능멸한다’는 문구의 신선함이 두 분에게서 풍긴다.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말 걸기다. 작가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다던 사르트르와도 통한다. 사물 속 깃든 참맛을 깨달으면 오호의 풍경이 마음속에 다 들어오고 눈앞의 기미를 깨달으면 천고의 영웅이 손아귀에 다 들어온다던가. 박해로 점철된 모진 세월 속에서 머지않아 펼쳐질 자유를 직시하시던 혜안의 형형한 눈, 두 어른의 큰 가르침이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만큼 매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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