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축구가 아시아의 왕이 되지 못한 이유
황 주 홍(강진군수)
한국은 슬로건(slogan)때문에 졌다.「왕의 귀환, 아시아의 자존심!」이라는 그 겉멋때문에 패배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상 아시아의 ‘왕’은 호주(26위) 아니면 일본(29위)이었다.
한국(39위)은 이란(65위)과 더불어 왕세자나 대군(大君)급이었다. 대회 결과도 거의 랭킹대로 갔다. 26위와 29위가 우승을 다퉜고, 세번째인 39위가 3위했다.
이란이 4위할 만했는데, 조편성이 안 좋아 5위 우즈베키스탄(108위)이 행운을 잡았다.
재미있는 건 참가국들의 슬로건이다.「강함은 단결에」(우즈베키스탄),「승천하는 용」(중국),「자줏빛」(카타르),「파란물결」
(쿠웨이트),「녹색이여」(사우디아라비아),「붉은독수리」(시
리아),「용자가 온다」(요르단),「사무라이 블루」(일본),「선수들은 10억의 심장」(인도),「아래(남반구)로부터 천둥을」(호주),
「바레인을 생각하라」(바레인),「백색전사를 환영한다」(UAE),「두뇌와 용기로 승리해 우승컵을 조국품에」(북한),「메소포타미아의 사자」(이라크),「페르시아의 왕자들」(이란).
저마다 특유함이 있지만 어떤 공통점이 있다. 자부심을 부각하되 배타적으로 가지 않는다는.
아무리 봐도 우리 구호는 허세(虛勢)였다.「왕」이라는 것도 3위권 국가의 그것치고는 제압적이었고,「아시아의 자존심」이라 자임하는 것도 아시아대표로 어디 나가는 거라면 모를까, 고압적이었다. 결국 한국만 유일하게 상대 자극적인(offensive) 슬로건으로 출전했다.
우리 선수단의 언행도 남달랐다. 우리 감독은 이란전을 앞두고 “고트비(이란감독) 축구는 고의 파울(foul)이 너무 많다. 팬들이 원하는 축구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란이 성적이 나쁠 수밖에 없잖나 생각한다.”고 했다. 고트비의 대응은 이랬다.
“이런 것(상대 비방)도 게임의 일부이기 때문에 기분 나쁘지 않다. 감독들은 경기를 앞두고 모두 예민해진다. 한국은 아시아 최고 팀이다. 최고 주장 박지성까지 있어서 모두 힘들어 할 수 밖에 없는 상대다. 멋진 경기 즐겨주시기 바란다.”
또 일본전을 앞두고선 “선수때부터 지도자를 하는 지금까지 일본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다.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을 내일 보여줄 것이다.”고 했다. 일본(주장 하세베)의 것은 조금 달랐다.
“한국이 이란보다 내용면에서 더 좋았다. 한국 선수들의 강한 승부욕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정신력에 뒤지지 않도록 잘 준비하겠다. 부담스러운 것이 한국전이지만 우승하려면 반드시 꺾어야 하는 팀이 한국이다.”
우리 주전 선수 한 명은 일본에 패한 뒤 “심판의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 이번 대회는 심판이 경기를 좌우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 선수는 또 “기분이 안 좋지만 아시아팀들의 기량이 올라온 듯하다.”고도 했다. 일본이 많이 컸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투다. 글쎄. (기분이 안 좋을 건 또 무언가?)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건 거기가 더 낮기 때문이다. 낮추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자신을 ‘최고(最高)’라고 높이면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최고라고 믿는 것과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번 한국 축구는 스스로 최고라고 믿었던 것 같다. 몇 년전 강진에서 열렸던 U-15(중학생)국제축구대회 한국 대 라오스전 때 일이다. 한국이 2:0으로 이겼었다.
그런데 첫 골이 터졌을 때 우리 선수들 누구도 기뻐하질 않았다. 골을 넣은 선수조차 고개를 숙이고 하프라인 쪽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함께 관전하던 중등축구연맹 회장께 아니 왜 저러느냐고 물었다. 회장께선 “저 녀석들, 같잖은 팀한테 한 골 넣은 것쯤이야, 하는 거죠, 뭐.” 하며 웃었다.
두번째 골이 터졌을 때도 우리 선수들은 마치 실점한 것처럼 무표정했다. 라오스 선수들과는 달리, 우리 선수들은 넘어지는 상대에게 손 한번 내밀지 않았다.
최선을 위한 겸허의 유니폼을 입었어야 할 어린 선수들이 최고라는 오만(傲慢)의 유니폼을 걸치고 있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이겼지만 졌다.
자케로니 일본감독에게 기자들이 호주와 우즈베키스탄 중 어느 팀이 결승에 올라오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의 대답은 유의할 만하다. “두 팀 다 체력적으로 강하고 유럽식 축구를 구사한다. 결승 상대는 언제나 강하다. 상대가 누가 되든 우리는 그대로다.”
기자회견 멘트는 그 자체가 외교(外交)여서 공식이 있다.
덕담+각오. 이것이 글로벌 룰(global rule)이다. 우리도 이걸 준수해야 한다.
자, 그럼, 한국 축구가 일본을 이기려면? 이렇게 기자회견하면 된다. “일본은 최고팀이다. 일본전은 늘 어렵다. 최선으로 승리할 뿐이다.” 다음 아시안컵에서 55년만에 왕으로 귀환하려면? 슬로건부터 바꾸는 거다.「붉은 악마들은 호주(다음 개최국)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쯤으로. 그러면? 이긴다. 틀림없다. 다른 세계적 팀들도 그런 낮은 자세로 이겼고, 우승했으니까.
■ 약 력
·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미국 미주리대학교 정치학 박사
· 중앙일보 제작위원
· 국회 정책연구위원 실장(1급)
·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전남 시장군수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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