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햇발
함바(飯場)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사무국장)
아수라장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처음엔 지진, 지금은 원자력 발전소 사고... . 그 다음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는 현지 주민의 탄식처럼 일대 공황상태에 빠진 일본이다. 시시각각 현지상황을 생생히 전하는 화면에 나 또한 망연자실, 그저 멍하다. 뜻밖의 사고로 만신창이(滿身瘡痍)되어 나뒹구는 처참한 몰골의 이웃을 어찌할 바 모른 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직전까지 세웠던 누군가의 아름다운 계획들은 거센 쓰나미에 휩쓸려 송두리째 사라졌다. 며칠 기다리면 따뜻한 봄바람에 피어날 노부부의 화단, 그 알뜰살뜰한 꽃들도, 상급학교 진학의 뿌듯한 설렘을 안고 그동안 정들었던 교문을 나서던 어린 학동들도, 부모님께는 효자요, 직장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한 직원이었다. 그런 그가 학수고대할 고객의 편지를 전해 주기 위해 언제나처럼 우체국 정문을 나서기도 전에.... .
인간의 안락이란 얼마나 불운인가
인간의 문명이란 얼마나 무명인가
인간의 장소란 얼마나 허망한가
기대, 기쁨, 설렘의 모든 계획들이 사라지고 슬픔과 통탄, 속수무책의 무력감이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세상이 끝나는 소리는 엄청난 굉음이 아니라 흐느끼는 소리라던가. 졸지에 눈물의 땅으로 변해버린 일본의 현실 앞에 고은 시인은 이렇게 묻는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것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소소한 일상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다시 회억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그 작은 순간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통감한다.
‘할 수 만 있다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도움의 손길이 간절하다. 일본과 영토 분쟁으로 마찰이 잦던 러시아, 중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구조대와 구조장비가, 구호 물품이, 성금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이번 사태는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큰 교회담임 목사의 일갈이다. 그렇다고 하늘의 큰 뜻을, 천작(天作)을 감히 우리가 재단(裁斷)할 수 있을까. 매사 큰 목소리 내는 목사님을 비롯해 일본을 향한 우리의 적극적인 동참에 마뜩한 시선도 적잖다. 개인이나 나라나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각자 방식의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 그것은 나름대로 타인이 짐작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어쨌든 설상가상, 대지진에 후쿠시마 제 1원전 1호기에 이어 3호기의 폭발은 이번 사태의 끝이 어딘지를 예측하기 힘들게 한다. 무지에 가까운 상태에서 안이하게 대응, 지진 위험에 대한 최소한의 의식도 없었단다. 뒤늦게야 원전의 부실공사를 고백하는 원전 설계자의 말은 일본열도를 넘어 전 세계를 핵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전세기를 동원해 자국민을 철수시키는 나라가 속출하고 원폭 피해를 줄여줄 다시마, 소금 사재기가 극성이라니.
사상초유의 대재앙에도 그토록 침착한 반응을 보이던 일본인들도 통제불능의 불안감에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한 지금, 일본의 대표적 극우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지사의 발언도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일본인의 문제는 아욕(我欲)이다. 이번 쓰나미를 잘 이용해 제 욕심을 한번 쓸어내 버릴 필요가 있다. 역시 천벌이라 생각한다.’ 아픔은 소인을 다스리고 부끄러움은 군자를 다스린다했다. 평소 일본 민족주의를 강조해 온 노정치인이 자국을 향해 이런 쓴 소리를 한 본의야 과거를 버리고 더욱 똘똘 뭉치자는 뜻이 아니었을까.
전력이 공급되지 않아 한 조각 초로 버티며 추위와 배고픔에 직면한 구호소의 이재민들. 문득 스치는 함바다. ‘밥과 잠자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던 공간’을 뜻하는 식민지 시절의 잔류어로 일제 때 억지 동원된 강제징용자들은 지금도 치를 떠는 말이란다. 상처가 나으면 고통은 잊는다지만 소금에 버무린 한 주먹의 밥, 뼛속까지 엄습하는 추위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던 잠자리의 기억이 어찌 쉽게 지워지랴. 갈수록 사망자가 늘어간다는 구호소의 풍경에 얼비쳐 떠오르는 우리의 서글픈 과거사. 너무도 가까운 이웃나라였던지라 침략과 병탄도 당하고 그로 말미암아 반목 갈등도 계속되어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땐가. 고통 앞에 너와 나는 없다. 세상은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는 세상의 일부다. 경제부국들의 천문학적 지원보다 아프가니스탄의 5만 달러가,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방사능 피폭의 위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원전 보수에 자진해 나서는 그 거룩한 행렬이 내 눈시울을 뜨겁게 달군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인간적 공감, 함께하는 따뜻한 연대의 대열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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