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천년만의 귀향, 특별전.
천년의 세월과 이야기 간직... 신비함 속 겸허해지는 발걸음
‘우리는 늘 과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천년 동안 지속된 인간들의 드라마, 로맨스, 모험처럼 매혹적인 것이 어디 있을까요. 글을 통해서든 상상의 나래를 통해서든, 과거로 들어서면 우리는 황홀해집니다.’ 어느 미술서적의 입구를 장식한 서문 중 한 부분이다.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된 제 39회 강진청자축제가 더더욱 특별해졌다. 바로 ‘고려청자, 천년만의 귀향’이라는 제목의 아주, 아주 특별한 전시 행사 덕분이다.
9세기 경부터 14세기까지의 500여 년간에 걸쳐 강진에서 생산되어 사랑받는 청자, 더욱이 고려시대 유일한 왕실 관요가 설치된 전남 강진 아니던가. 그 곳에서 생산된 국보와 보물급 청자가 무려 천년 만에 본향 강진을 찾아와 錦衣還鄕(금의환향)하는, 제 지닌 눈부신 자태를 선보이는 뜻 깊은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아무리 고운 옷을 떨치고 고향 땅을 밟은 들 반기는 손 잡아 맞아 주는 이 없으면 비단 옷 입고 밤길 걷기다. 이른 바 錦衣夜行(금의야행), 너도 나도 이 매력적이고 특별한 기회에 눈 호사를 누리며 강진청자축제가 마련한 큰 선물을 욕심껏 만끽하길 권한다.
전시장 입구에서 새삼 여미게 되는 옷차림이다. 어머니의 해진 머리카락을 뵈오는 순간인 듯, 굳은살이 박힌 아버지의 손마디를 어루만지는 눈길로 천천히 살피듯, 자못 떨리는 몸짓으로 다가가게 되는 발걸음이다. 실로 까마득한 연배의 귀한 어른, 그 분을 뵈옵 듯 송구한 마음마저 일어난다. 누군가 경박하게 현 시가, 가격을 물었던가. 청자박물관 소장품인 ‘청자음각여의운문병’은 그 주둥이 부분에 새긴 무늬의 희소성으로 감히 값 책정이 불가하다는 학예사의 설명을 그 또한 얌전한 학동처럼 다소곳이 경청한다. 온갖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청자를 살피는 발걸음들이 하나 같이 조심스럽다. 천년이라는 세월의 신비 앞에 절로 겸허해지는 것이다.
활짝 핀 모란이, 훨훨 나래짓하는 나비가, 정수리 붉은 단정학과 갈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구름도 어우러졌다. 어디 그 뿐인가. 상상 속 동물인 용은 여의주를 희롱한다. 일본 대화문화관 소장 ‘靑瓷九龍形淨甁’은 입수구와 출수구, 환대의 윗면, 어깨 부분에 표현된 이홉 마리의 용머리를 붙여 만든 매우 이례적인 정병이다.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강진고분출토가 분명하니 잠시 감회가 서글프다. 용의 눈은 철화로 그렸으며 비늘과 파도는 칼날을 눕혀 윤곽을 그린 다음 얕은 선각기법으로 정밀하게 사문하였다. 고려청자 전성기의 비색을 잘 간직한 고품격의 양질 청자로 파도 속에서 힘차게 역동적으로 상승하는 용의 모습을 긴박감 있게 보여주는 명품이다. 정병은 불교에서 부처나 보살께 바치는 맑은 물을 담는 물병이란다. 대부분 백상감으로 시문하여 화려해 보이지 않고 단정한 분위기를 표출해 낸 것도 그 까닭일까. 굽은 안 바닥도 깎아 낸 속 굽으로 굽바닥의 유약을 깨끗이 닦아낸 후 거친 내화토 비짐을 받혀 구웠다니 용도에 따른 제조법인가 싶기도 하고. 상감연화유문 ‘덕천’ 명매병은 동체가 물결무늬 배경에 연꽃과 버드나무를 간략하게 사문하였다. 제작시기가 덕천창(德泉倉), 또는 덕천고(德泉庫)에 해당하므로 1308-1403년 사이에 제작된 걸로 추정된다. 왕실요를 뜻하는 덕천이 새겨지면 일반인들은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다던가. 잘룩한 허리와 굴곡 심한 밑부분이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분청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기형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갸웃해진다. 감히 왕께 바칠 진상품 청자를 실패작 그대로 내민 간 큰 도공이 누구였을까.
出光美術館, 고려미술관, 선문대학교의 秘藏品들은 그야말로 비공개로 유명하다고 했다. 그만큼 스타급 유물들이 수두룩하단다. 쭈꾸미가 품고 있던 바다 속 보물들의 안식처인 해양박물관의 청자철화퇴화문섬형, 그러니까 웅크린 두꺼비 모양의 벼루도 흥미롭고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청자베개, 청자상감모란운학문침도 눈길을 잡는다. 장방형 베개로 상, 하면과 전, 후면의 중앙을 오목하게 성형하여 실용성과 곡선미를 겸비했다. 무늬는 베개 전체에 꽉 차도록 시문하였다. 상, 하면의 중심에는 이중원권 내에 구름과 학을 시문, 한 면은 학이 위를 향하고 반대쪽에서는 아래를 향했다. 전, 후 측면 중심에는 능화형 창을 만들어 내부에 시문을 하였는데 한 면은 모란을 다른 한 면은 모란과 마주 보는 나비 한 쌍을 표현하였다. 각 면의 중심 무늬 주변은 역삼감 넝쿨 무늬를 배경으로 새기고 내부에 다시 음각선으로 세부를 표현해 내었다. 가장자리는 연꽃잎과 반원의 국화로 화려함을 더하였고 좌, 우 측면의 중앙에 능화형을 배치한 후, 주변에 역시 역상감과 음각으로 시문한 넝쿨무늬로 가장자리를 마무리하였다. 또한 구을 때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좌, 우 측명에 구멍을 뚫었으며 한 면에만 규석을 받쳐 구웠다. 베고 누우면 무릉도원을 거니는 꿈이 절로 찾아들 듯 아름다운 무늬와 뛰어난 조형성을 엿볼 수 있는 명품이 아닐 수 없다.
감상자의 이해를 돕는 학예사의 친절한 도움을 받으며 청자상감연국화문 ‘정릉’ 명통의 긴 설명을 읽는다. 그들의 애틋한 사랑을 알기에 한 점 도자기, 그 명칭에 먼저 끌려 발걸음 멈춘다. 사랑을 잃은 이의 번민과 방황은 왕이라고 비껴가던가. 죽음이라는 가장 잔혹한 별리의 형벌로 졸지에 그토록 사랑하던 짝을 빼앗긴 왕, 그는 추락에 가까운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正陵(정릉)은 1365년(공민왕 14년)에 축조한 고려 제 31대 왕인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陵號(능호)다. 하니 정릉 명의 청자 역시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1365년에서 137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강진의 사당리와 용운리에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생산지와 소비지, 제작 경로까지 모두 알 수 있는 중요한 청자의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국화 세 송이, 흑백의 주렴문 시문, 밑부분의 연꽃과 버드나무 시문이 섬세하여서, 아니 작품 아래 부분에 선명히 새겨진 正陵(정릉)의 글씨가 관람객의 시선을 쉽게 놓지 않는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과오와 愚行, 사소한 득실로 머리 어지럽히던 현실의 시계가 멈춘다.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텍스트다. 천년 만에 귀향한 청자가 고즈넉이 숨 쉬고 있는 공간에서 속세의 사람은 입을 다물게 된다. 여성성과 남성의 기질이 어찌 그리 한 점 청자 속에서 오묘하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유연히 흐르는 허리선의 감미로움과 시선을 압도하는 강건한 절제미가 그렇다. 시 속 펼쳐진 박목월의 ‘청노루’ 뛰노는 정경 속 桃園을 거닐다 온 듯 심신은 그야말로 청량하다. 이런 감격은 오래 오래 잊을 수 없으리라. 천년의 물줄기, 세월의 조류를 과감히 헤치고 한 무리의 연어가 되어 고향으로 회귀한 고려청자, 그 푸른 비늘의 눈부신 비상의 장면을 감히 지우지 못하듯. (김현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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