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2
이년 전이던가.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관아재 조영석의 ‘설중방우도’를 제명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천지가 눈에 파묻혀 방문 앞 소나무는 눈 무게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고, 남바위로 단단히 무장, 악천후를 무릅쓰고 이제 막 당도한 벗을 맞는 설중방우도의 정경은 훈훈했다.
‘강물도 차갑고 바람은 시리구나
누구 하나 불러다
이 적적함을 등불 아래 사륄까’
글 입구에 ‘오솔하다’는 표현을 썼던가. 그 때 역시 이렇듯 쓸쓸하고 호젓한 기분이었을 터다. 어쨌든 눈에 갇혀 외출하려던 계획마저 접게 만든 인적 끊긴 촌락의 설경, 뜻밖의 선물 같은 이런 풍경 때문에 고적하기 그지없는 이 곳 생활을 견디고 있지 않을까 싶어지는, 해마다 이쯤 되면 펼쳐지는 순백의 절경이다.
때론 물러나 선(禪)의 고요 속 자신의 직관을 따르라. 이런 충고의 말을 실천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런데도 눈 쓸리는 바람의 기척에 자꾸 귀를 기울인다. 모진 눈 속에 문득 나를 향하는 누군가의 발걸음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눈보라를 뚫고 그 누가 내 집 문지방을 넘으랴. 하여 내가 꿈꾸는 설중방우도는 언제나 아득하고 대신해 종일 책과 뒹굴 거릴 밖에다.
書卷茶爐百慮融, 책 들고 차 화로 곁에 앉으면 세상만사 근심이 다 녹는다했으나 텔레비전 반, 책 반 바삐 넘나드는, 용의 해 입구에서 시도하는 꽤나 산만한 독서법이다. 용이라고 다 용인가. 물속에 잠겨 때를 기다린다는 잠룡(潛龍)은 바라던 승천에 실패 하면 갖은 패악을 저지른다고 했다. 땅 속에 똬리를 튼 채 세상에 엎드려 있다는 반룡(蟠龍)도 마찬가지로 호시탐탐 자신의 때를 기다린다. 이무기의 일종인 훼룡이 500 수를 넘기면 교룡이 되는데 시기를 못 만난 영웅호걸을 지칭한다. 역모를 꿈꾸었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 당한 허균의 호가 하필 교산(蛟山), 아무리 훌륭한 인물도 자신의 때를 만들지 못하면 한낱 뿔 달린 뱀에 불과하다는 뜻이 교(蛟)이니 제 운명을 간파한 천재의 예지에 감탄하고 한편 그의 불운에 가슴 저린다.
허균, 허난설헌 남매의 스승인 손곡 이달의 시를 읽는 사이 펼쳐지는 용에 대한 이런 저런 상념이다. 영남 좌병영으로 떠나는 임제를 배웅하는 시를 읽으며 이달의 짤막한 프로필에 등장하는 허균에 하염없이 붙잡혀 있는 셈이다. 장수는 장수를 알아본다던가. ‘백호의 詩는 성당(盛唐) 때의 시와 같다. 그의 수필 수성지는 문자가 생긴 이래 天地間의 大作이다’라는 임백호 평전 59쪽 허균 선생의 페이지를 찾아 읽으며 건성으로 흘낏거리는 화면에서는 일본의 건축재인 삼나무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연이란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라고 했다. 행여 놓칠 새라 새 책의 여백에 황급히 적어 넣을 수 없게 만든 ‘척박한 토양에서 평생토록 서향 햇살만 받고 자란 40년 넘긴 삼나무에만 생겨나는 자연스런 물결무늬.... ’라는 멘트, 그에 나는 왜 이리 화들짝 반응하는가. 가장 깊은 고통이 가장 큰 꿈을 이룬다는, 나무가 대변하는 진리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며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억울하게 형을 받은 교산선생의 처지처럼 그동안 나도 적잖이 억울하였노라고. 은밀하게 숨겨진 상처의 기억들이 각자 정서의 결을 만든다는 데까지. 딱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내 집 마당의 개들이 마구 짖었다.
마루문을 열자 눈발 속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낯 선 이가 더듬더듬 내 이름을 물었다. 오래 전 옛 친구, 아니 옛 사람이다. 35년 여, 그와 나 사이 흐른 세월의 간격이 까마득했다. 그의 바른 글씨체의 기억, 몇 번인가 기웃대던 음악회와 미술 전람회, 그리고 그의 첫 월급으로 시골교회 봉헌용 종을 사러 들렀던 크리스천 백화점, 그날도 오늘처럼 함박눈이 내렸었다. 순백의 풍경에 순백의 시절이 그리웠을까. 불로동 시절 나의 스물한 살은 마구 튀어나왔다.
그림은 선비의 잡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재촉하는 영조를 향해 투덜대었다는 조영석, 눈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재현하고픈 선비화가의 그림 속 풍경처럼 푸르른 시절 우리가 바라마지 않던 삶을 꾸리고 완성해가고 있는지. 우연의 일치인지 우리 둘 다 음악을 전공한 딸을 두었다며 웃었다. 그나저나 눈보라 속 옛 그림 제목을 상기시켜 준 그. 아뿔사! 추억 속 함께 했던 전람회, 음악회, 시 이야기에 바빠 그는 차 한 잔도 나누지 못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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