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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의의 심정을 거쳐 소치가 그린 일속산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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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이 황상에게 은봉의 시재에 대해 적은 편지 (윤영상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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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상에게 준 다산 친팰의 선물 목록, 세상을 뜨기 며칠 전에 쓴 절필이다 |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다산의 제자 황상
1) 삼근계
삼근계(三勤戒)란 말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말이다. 다산이 강진으로 귀양 와서 동문 밖 주막에서 기거할 때 일이다. 1년이 지난 1802년 10월, 다산이 서당을 열자 황상이란 소년이 찾아왔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 보다 영민하고 머리가 잘 돌아갔다. 다산이 그를 따로 불러 앉혀놓고 말했다.
“너는 너무 둔하고 많이 막혀 있으며 답답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부지런하면 막힌 것을 뚫을 수 있으니 너 같은 사람이 공부를 할 수 있단다.”
황상은 그 말을 뼈에 새기고 6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공부를 했다. 마음을 다잡을 때마다 삼근계를 생각했던 것이다.
황상이 다산의 유일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산의 교육 방침 때문이었다. 다산은 제자들의 성품과 재능에 따라 문학과 이학으로 나누어서 가르쳤는데, 황상에게는 문학이었다. 오늘 날 대학의 문예창작과에서 가르치는 역할과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는 것은, 다산이 그의 개성에 맞게 문학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창작 위주이기 때문에 자연 실무적인 일에는 약할 수밖에 없다. 다산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았지만 막상 다산의 저술에 관련된 편집은 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그렇다.
다산은 황상의 학문이 일취월장할 때마다 큰 기쁨을 얻었다. 낯설고 물 설은 곳에 귀양 와서 재미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제자들의 성장과 발전을 보는 일이었으리라. 다산을 만난 지 몇 년이 더 지난 1806년 3월 10일, 다산은 정약전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는다. 내용은 온통 황상의 칭찬으로 도배하듯 적혀 있었다.
--- 황상의 나이 올해로 몇이던가. 월출산 아래서 이 같은 문장이 나오다니 생각지 못했네.
불과 3년 반 만에 정약전에게 칭찬을 받은 황상은, 오히려 다산에게 흑산도로 건너가 약전을 스승을 모실 것까지 얘기를 했다. 정약전이 육고기 한 점을 먹지 못하고 1년을 보내니 피골이 상접했다는 말을 듣고나서였다. 그러나 다산은 약전의 편지를 건네며 보관하라 이른다. 스승의 형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황상은 나를 듯이 기뻤다. 다산도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이듬해인 1807년에 황상은 득남을 했다. 다산은 크게 축하해마지 않았다. 네 아들이 내 손자와 무에 다를 것이 있겠느냐고 말하던 다산도 그가 결혼을 했을 때 공부를 게을리하자 호되게 나무라기도 했던 다산이었다.
네가 요즘 태만해져서 문학공부를 소홀히 하고 있구나. 내외가 따로 거처하되 마음을 다잡아 글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내용으로 황상에게 편지를 보내자 그는 당장 보따리를 싸들고 고성사로 올라갔다. 고성사는 강진읍을 감싸는 보은산 중턱의 사찰이다. 며칠 뒤 황상이 다산에게 시 한 편을 보냈다. 다산이 기쁜 마음으로 칭찬과 함께 또 화답의 시를 보냈다.
찌는 더위 절로 갈 생각해보나
늙고 지쳐 산마루 오르기 겁나
모기 벼룩 함부로 물어대나니
여름밤은 괴롭고 길기도 하구나
밤 깊으면 번번이 발광이 나서
옷을 벗고 손우물서 목욕을 하니
긴 바람 내 얼굴에 시원히 불어오고
성근 숲은 집 울타리 들추는구나
구름 위에 드높이 드러누워서
뼛골까지 시원히 쉴 네 생각 한다
사실 보은산은 높기도 하지만 그 허리에서는 맑고 차가운 물이 쉼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발 아래로 드러누운 탐진만에서는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잡목숲이 우거진 우이봉에서는 솔바람이 불어오니 오죽 좋겠느냐는 다산의 말이었다. 이렇듯 항상은 다산의 말을 잘 따랐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던 그였다.
2) 황상, 과연 누구인가?
황상의 호는 치원(卮園)이다. 호를 다산이 지어주었다. 그런데 위가 잘 아프고 귀가 먹었으며 허리가 굽어 비정상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산을 만났고, 다산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다산은 아들 학연이 고성사로 찾아왔을 때(1805년), 황상과 함께 시 겨루기를 시켰다.
나중에는 다산이 가깝게 지냈던 혜장스님과 학연, 그리고 황상 세 사람에게 연구시(聯句詩)를 짓게 했다. 한 사람이 다섯 차례나 하는 40구절의 긴 시를 지었는데, 황상도 거기에 한 축 끼어 함께 시를 지었던 것이다. 결국 다산의 아들, 당대의 괴승 혜장과의 교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다산은 황상의 아버지 황인담과도 인연이 있었다. 다산이 ‘취몽재기(醉夢齋記)’란 시를 써주면서 자나 깨나 술에 절어 사는 그를 안타깝게 여겼다. 사랑하는 제자의 부친이니 그럴만도 할 일이었다. 황인담이 죽자 다산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만사한 수를 짓는다.
한 번 취함 참으로 백 년과 바꿀 만해
삶과 죽음 어떠한고 둘 다 모두 아득하구나
어이 장차 만곡들이 남호(南湖)의 물 가져다가
황천길에 모두 주어 술샘을 만들거나
그런데 황인담의 장사를 치르고 난 뒤였다. 다산은 자주 편지를 보내 부친의 별세를 위로하고 제자의 건강 걱정을 하는데 삼우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말에 대경실색했다. 삼우제는 고사하고 시묘조차 하지 않았다는 소식에는 설령 그것이 유언이었다 할지라도 다산을 분노케 만들었다. 다산은 즉시 편지를 보내 제자를 심하게 꾸짖는다.
그 후 황상은 유인(幽人)이라는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주역을 읽을 때 나온 단어이다. 다산은 황상이 그 말을 몹시 좋아하는 줄 알고 <제황상유인첩제(題黃裳幽人帖)>을 만들어 준다. 유인이란 말은 세상사 어지럽고 더러우니 그것을 피해 조용한 곳에서 은둔한다는 뜻이다.
천명(天命)을 우러러 순응하고 과실 심고 채소 씨 뿌리고 존경받을 만한 덕행을 하는 것이 석인(碩人)의 너그러움이니 유인의 일이 좋지 아니한가? 땅을 고를 때 물 맑은 곳을 얻고, 시야가 확 트여야 복지(福地)라 일컬을 수 있으리. 그러나 장식은 정교해야 하므로 순창의 설화지로 도배를 하고, 상인방에는 횡폭의 산수화룰 붙인다, 방 안에는 1천 3,4백 권의 책을 꽂아놓고 책상 위에는 ‘논어’ 한 권을 펼쳐놓는다.
뜰 앞에는 석류나, 치자, 백련목을 놓아두고 국화도 놓아두며, 마당에는 작은 연못을 판다. 뿐인가. 그 물은 남새밭으로 흘러들게 하고, 아욱과 배추, 파 마늘을 심는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고구마도 심고, 그 둘레에는 매괴화 수천 그루를 심어 울타리를 만든다.
마당 왼편에는 사립문을 세우되 흰 대를 엮어 만들고, 50보 쯤 가서 물가에 초가 한 칸을 세운다. 시내를 따라 1백여 보쯤 거리에 좋은 전답 수백 이랑을 장만하고, 더 떨어진 곳에는 큰 방죽이 있어 달 밝은 밤이면 묵객들과 더불어 술에 취해 본다.
술 잘 마시면서도 참선과 설법을 잘 하는 승려와 이따금 왕래하며 지내면서 집 뒤에 잠박(蠶箔)을 만들어 아내와 함께 이를 즐기니, 조정에서 조서가 왔다는 말에도 웃기만 할 뿐 나가지 않는다. 이것이 구이(九二)의 길함이다. (본 내용은 줄거리임)
황상은 스승의 말대로 실천한다. 그의 성품이 어쩌면 스승의 말과 똑 같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제자들은 다산에게 과거 시험에 합격해 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막상 과거 시험을 보았으나 낙방을 하자 그만 실망하기도 했지만 황상은 그러하지 않았다. 황상은 은둔자가 다 그렇듯이 읍내에서 백적산으로 들어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당시 황상의 살림살이는 매우 어렵기도 했다. 그렇다고 엉뚱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숙명처럼 자신의 앞길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스승인 다산의 말대로 유인의 삶을 그대로 살았다.
그렇게 10년이 흘러서 다산이 먼저 황상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 내용은 처절할 만큼 애틋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공부를 하지 않고 땅만 파고 지낸다면 무지렁이나 다름없을진대 내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편지 한 장 받아보지 못해 서운하구나,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내 부고가 가거든 행여 올라오지 말고 연암과 함께 다산에 가서 한 차례 곡만 하는 것으로 그치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었다.
그 무렵 다산도 몹시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다산이 강진을 떠날 때 얼마간의 전답을 마련했으나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다신계(茶信契)가 와해된 지경까지 이르러 다산의 논을 몰래 팔아먹는 사건까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다산의 마음이 얼마나 쓰라렸을까. 배신감에 치를 떨며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다산의 제자 중 누구하나 과거에 합격한 제자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쪽에서도 차며 기타 선물 등을 보내지 않았으니 사제지간의 정분이 아예 끊어진 상태였다. 다산이 해배된 지 17년 뒤의 일이었고, 31년만에 막내 윤종진이 과거에 합격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어쨌든 무심한 세월 앞에서 다산학당은 흙담처럼 스르르 무너져 내린 거였다.
3) 황상 드디어 18년 만에 다산과 재회하다
1836년 2월 22일은 다산의 회혼연(回婚宴)이었다. 그날에 때를 맞추어 황상은 강진을 떠나 상경했다. 실로 다산을 만난 지 34년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었지만 다산의 용태가 여간 심각하지 않았다. 황상은 손수 약을 달여 스승께 바치기도 했다. 잔치는 다산의 건강 때문에 이미 취소가 된 뒤였다.
한 이틀 머문 황상은 서둘러 고향을 향해 떠나고자 했을 때 다산의 아들 학연이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다산이 간밤에 썼다던 <규장전운>이란 책자 한 권과 중국제 먹과 붓, 부채 하나, 담뱃대 하나를 건넸다.
황상은 다산과 헤어진 후 서울 구경을 잠깐 하고 있을 때 다산의 죽음을 풍문으로 알았다. 다시 마재로 간 그는 장례절차를 친자식처럼 해냈다. 해배한 후 처음 찾아간 길이 결국 다산과의 마지막이 되고 만 거였다. 그러나 10년 후 학연과의 각별한 관계로 다시 마재를 찾는다. 둘은 서로 시를 짓고 화답하며 회포를 풀었다. 부친과 친하면 자식과도 친하게 되는 것은 만고의 진리가 아니던가.
거기에서 정씨와 황씨끼리 정황계(丁黃契)를 맺기로 한다. 이 내용은 황상의 <치원유고>에도 실려 있다. 두 사람은 그 후 인편이 있을 때마다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추사가 제주도에서 황상의 시문을 보고 놀라고 만다. ‘두수한골(杜髓韓骨)로 그의 시를 평가한 추사는 귀양이 풀려나 상경하는 길에 백적동 황상을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황상이 집에 없는 터라 만나지는 못했지만 천하의 추사가 황상의 집에까지 찾아갔다는 사실은 그가 시성(詩聖)임을 말해주고 있다.
황상은 나중 초의와도 깊은 교분을 갖는다. 다산의 1등 제자로, 다산의 아들 학연과의 각별한 우정, 그리고 만나기를 그토록 희망했던 추사, 일지암의 초의 등과 깊은 교분을 가졌던 황상은 결국 강진의 뼈와 살을 만든 정신적 인물은 아니었을까.
4) 일속산방(一粟山房)
일속산방은 지금의 용운리 저수지로 추정하고 있다. 물에 잠겨서 그렇지만 그 주변의 풍광은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다산의 말대로 그는 염불 잘하는 정수사 스님이 찾아오면 술 한 잔 나누며 고담준론을 나누는 목소리가 저 푸른 저수지 물 위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다.
송하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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