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려청자의 원류를 찾아서
무형문화재 청자기능 보유자 故 조기정
나의 삶 나의 예술
수많은 일 중에서 자기 좋아하는 것을 하고 돈까지 받는 일은 얼마나 될까?
일이 하나의 방편, 즉 다른 어떤 중대한 삶의 전환이 올 때까지 잠시 내 삶을 의탁하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요즘엔 그런 생각을 자주 해본다. ‘가지 않는 길’에 대한 회환이 없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어쩌면 주제넘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가끔 이런 생각에 잠겨본다. 도공으로서의 나의 삶, 내 생애를 쏟아 부어 만든 도자기 예술은 이제 나의 신앙이다. 삶의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내 삶의 전부로서 살아온 이 길이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찌 그토록 운명적이었는지.
나는 1937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선조들은 대대로 갑부란 말을 들을 정도로 부유했고 할아버지가 한의사였다. 그러나 9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다. 그때는 어머니가 더 소중한 존재였으므로 아버지에 대한 결핍감을 느끼지 못했으나 자랄수록 그 상실감이 커졌다는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포목상을 운영한 덕으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는 생활이었다. 서중 일고를 거쳐 전남대 법대에 진학했다. 건장한 체격에 어울리게 중학 때부터 시작한 태권도는 대학 때 5단을 땄다. 뿐만 아니라 축구, 핸드볼, 포환, 유도 선수로 운동 방면에 두루 두각을 나타냈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처럼 운동은 나에게는 늘 낙천적인 사고를 심어 주었다. 그리고 운동으로 단련된 덕분에 밤낮으로 온 산야를 헤매도 지치지 않는 체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늘 운명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듯 나에게도 그런 계기가 찾아왔다. 해방이 되면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우리 동기들은 처음으로 한글 교육을 받기 시작한 세대였다. 그런 만큼 우리나라를 짊어질 동량제로서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충만해 있었다. 그래서 ‘한국자원조사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우리 산천의 자원을 조사, 적절히 사용토록 방향을 제시하기로 했다.
대학 졸업 무렵 한국자원조사연구회 전남지부장을 맡게 되었다. 사회인, 대학생으로 구성되었는데 전남 일대를 누비며 육상 자원을 조사하다 깜짝 놀랐다. 요업 원료 매장량이 어찌나 많던지…
산비탈 하나 산굽이 하나 돌아서면 무수히 흩어져 있는 청자 파편들, 모두 옛날의 가마터였다. 옛날엔 그렇게 청자가 성해 그 우수함을 세계에 떨쳤는데 오늘날은 무엇이 남아 있나 하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55년 당시 일본은 도자기 한 종목의 수출고만 3억5천만 달러를 육박했고 우리나라는 총 수출고가 7천만 달러였다. 도자기의 원조인 우리 조상의 기술을 뺏어다 일본은 그토록 발전했는데 정작 본 고장인 우리는 이렇게 페허가 되었구나 생각하니 아찔했다. 분노마저 일었다.
특히 전남 지방은 세계 최고의 고려청자를 만들었던 도요지만도 전국에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고 조선시대 분청자 도요지도 수백 개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알면 알수록 도자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작 나 자신이 도자기에 직접 몸을 던질 생각은 갖지 못했다. 당시엔 아무리 도자 문화에 대해 강조해도 눈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법관이 되고자 법대에 진학했던 나는 ‘법관은 내가 아니라도 할 사람이 많은 것. 내가 한국 도예 중흥에 힘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다 62년부터 도공수련의 길을 나섰다. 마침 월산동에 사기 공장이 있어 본격적으로 도자기 수업에 들어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63년부터 도요지 발굴의 기쁨을 함께 했다. 무안 함평에서 고급 점토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나의 큰 도전은 고려청자 재현, 어떻게 하면 그 영롱하고 아름다운 비색을 재현해 낼 수 있을까. 끊긴 전통의 불모지에 스승도 선배도 없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수십번 가마를 묻었다 헐었다 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옛 조상들이 자기를 굽던 가마터에서 ‘바로 이거다’싶은 덩어리를 주워와 곱게 가루를 내서 초벌구이를 한 자기 조각에 입히고 그걸 가마 속에 넣고 높은 온도로 구웠다. 그러나 불을 다 때고 난 뒤 끄집어내 보니 시꺼멓게 변질됐을 뿐 청자색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밑을 내려다보니 실험용 조각들이 청자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때가 1966년도, 국립박물관의 미술관 최순우 씨에 의해 청자유약에 대한 재현도를 90%까지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고려청자의 신비스러운 빛깔은 바로 유약이 답이었던 것이다.
66년 강진 고려청자 재현 작품으로 제1회 ‘석기전’, 73년 제2회 ‘고현연유전’. 87년 제3회 ‘백유철재전’ 등 세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고려청자 재현 사업을 꾸준히 해오다가 77년에는 제자 이용희에게 고려청자 재현을 위한 유약의 비법을 전수하고 광산구 연산동에 ‘무등요’를 열고 정착을 하기 시작했다.
1981년에는 청자유약에 대한 개요인 ‘고도자 소고’를, 85년에는 ‘녹청자 소고’라는 논문집을 펴내 나의 이론을 정리했다. 내친 김에 1981년에는 고려청자 및 백자 조선백자 및 분청자기는 동질 유약임을 입증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청자나 백자나 청백자 모두 똑같은 유약을 사용한다. 다만 두께의 차이에 의해 빛깔이 달라질 뿐이다. 물이 깊으면 파랗고 엷으면 하얀색이 나오듯 청자는 청자대로 백자는 백자대로 다른 유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고민할 것도 없이 한 가마에서 동시에 한국, 중국, 일본의 청자 백자를 동시에 재생할 수 있었다.
나는 도자기의 본질은 유약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 널려 있는 어느 흙과 무슨 돌가루를 어떻게 하면 어떤 색깔이 된다는 것을 집중 연구, 영원 불멸의 색깔을 지닌 자연 유약을 개발해 갈색, 회색, 녹색, 황색 등의 색깔을 자유자재로 구사해낼 수 있게 됐다.
앞으로는 청자, 백자의 재현 뿐 아니라 우리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현대 민예자기를 개발해 세계화 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나는 늘 도자기 부국론을 강조한다. 세계 제 2차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던 힘은 독일의 쿠르트 철광과 일본의 찻잔 수출로 쌓은 것이다. 우리 도공들을 끌어가 도자기를 만든 17세기 일본 항구에는 무려 2백 13년간 7백여 척에 이르는 네덜란드 상선이 도자기를 실어 날랐다. 도자기 수출이 일본을 상업주의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요즘에는 청자를 이용, 신소재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청자에 물을 부으면 고기가 놀고 국화가 뜨고 음식을 담으면 썩지 않는다. 이에 착안, 원적외선 발사체 세라믹스를 만드는 것이다. 21세기 과학은 최첨단 신소재인 세라믹스가 관건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역시 도자기에 건 앞으로의 과제이다.
나의 이러한 계획들이 끊기지 않도록 큰 아들의 이름을 나의 호와 발음을 같이해 ‘고현(高鉉)’이라 지어 도업을 이어받기를 원하고 있다. 손주를 얻으면 그 역시 ‘고현’으로 이름을 지어 일본의 ‘심수官家’처럼 제10대, 20대 고현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큰 아들이 내 뒤를 이어 동양의 고전 문화를 해득해 낼 수 있도록 일부러 화교 학교에 입학시켜 한자 문화권에 적응시켰다. 2남 2녀의 자녀중 두 딸은 미술, 두 아들은 도자기를 이용한 신소재 공부를 시킬 계획이다. 주위에서는 아버지의 인간 구도에 맞춰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인생은 ‘집중’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별반 개의치 않는다.
늘 삶에는 실패를 하더라도 의도적인 집념이 따라야 한다는 게 내 주의이다. 그래야 일관성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집중 없이 무엇인들 하나라도 이룰 수 있겠는가.
- 조기정 선생의 생전에 전남대학교 미술대 강의내용을 김은영 옮김으로 싣습니다.
조기정 프로필
조기정 선생의 호는 고현(古現)이다. 1939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일고를 졸업했다. 전남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에 끌려 도예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77년부터 1984년까지 강진 고려청자사업소의 기술담당이사를 역임하였다.
청자의 성형보다는 원료에 관심을 두고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기술이 단절되었던 고려청자를 재현하는 데 힘썼다. 고려청자의 매혹적인 비색의 비결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조개껍질 또는 석회석과 미량의 철분이 함유된 원료를 혼합하여 만든 유약이 열쇠라고 제시하였다. 이를 위하여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1000여 개가 넘는 도요지를 발굴 및 답사하였고, 이때의 경험을 정리하여 1987년 《녹청자소고(綠靑磁小考)》라는 저서를 펴내기도 하였다.
1986년 자기공예의 청자도공(靑磁陶工) 기능보유자로 전라남도 제10호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광주광역시 제5호 무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 1978년 성옥문화재단과 1988년 금호문화재단으로부터 예술문화상을 받았다. 2007년 12월 20일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작품 전시회'를 하루 앞두고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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