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비우고 살아오니 만사형통 여기 있네”
한 점 나비의 날개짓처럼 곱게 살아오신 김유홍 할아버지(92세))
아흔 살이 넘은 지난 해 김유홍 할아버지는 제35회 강진군민의 상(지역사회봉사)을 수상했다. 물론 군민의 이름으로 주는 상이니만큼 상의 권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솔직히 까다롭기로도 유명한 상이다. 그런데 그만한 연세에 수상을 했다는 것은 군정발전에 공헌한 바가 작아서가 아니라 세상에 이름 석자 내놓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 쪽에는 아예 꿈도 꿔보지 않은 채 한평생 살아왔고, 한 점 나비의 날개짓처럼 곱디고운 삶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맘 편히 먹고 살아왔어. 누가 돈을 떼먹어도 내가 적선했다 생각하고 애써 생각하질 않았지. 손해 보더라도 나는 금방 잊어버려. 그러니까 마음비우고 살아왔다고나 할까.”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과 상통된 말일까? 말은 쉽지만 어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도(道)의 경지가 바로 마음을 비우는 자리인 것이다. 마음의 변화는 변화무쌍해서 어떻게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말해본다면 칠정(七情: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이 곧 마음의 변화이다. 그러나 그 칠정을 걷어내면 마음의 본자리에 앉게 되어 주위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항상 닦아놓은 거울 같은 것이 마음의 본자리요, 그 거울에 때가 낀다면 그것은 칠정으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의 변화인 것이다.
김유홍 할아버지의 외모는 역시 당신의 말처럼 잔잔한 호수였다. 깊은 눈은 한없이 인자했고, 부처님처럼 큰 귀는 귀상(貴相)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면서도 범접하기 어려운 무게를 달고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살아왔다는 말에 필자는 나쁘고 불편한 마음은 버렸으되 좋고 기쁜 마음은 더욱 키우고 즐겼다고 해석을 해보았는데, 살아온 얘기를 듣고 보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교촌리지. 그러나 아직까지 주민등록 한 번 옮기지 않고 강진에서만 살아왔어.”
강진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를 6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녔던 김유홍 할아버지는 그 후 강진으로 돌아와서 한평생 주민등록 한 번 옮기지 않았다. 땅 투기 하느라 주민등록을 골백번도 옮기는 토지투자가들과는 아예 가는 길이 틀린 김유홍 할아버지였다.
“강진에서 주조공장, 극장 대표이사, 운수사업, 특히 부산이나 일본까지 강진 백금포에서 갔을 때 배 사업까지 해봤어. 참, 그때 백금포는 강진의 항구로써 무척 번화했었지. 요정과 식당이 즐비했고 잘 됐었으니까.”
문득 그 옛날 화려했던 백금포 얘기가 나오자 지그시 두 눈을 감으며 잠시 회상에 젖어보는 것 같다. 당장 그 시절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 또한 없지는 않을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이것저것 해보았지만 특별히 실패한 일은 없었어. 그저 근면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 내 마음이었는데, 그런 정신으로 살아왔지.”
새벽 4시면 기상해서 곧장 사업장을 둘러보았던 김유홍 할아버지는 특히 강진정미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부터는 더욱 철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새벽 4시 통금해제를 알리는 싸이렌 소리가 울렸던 그 시절, 싸이렌이 거짓말 하느냐 김유홍씨가 거짓말 하느냐는 말까지 유행될 정도였다.
“나는 살아오면서 누구보다도 어머니를 존경했지. 여산 송(宋)씨였던 어머니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지. 지금처럼 모내기 할 때면 막걸리를 비롯해서 음식을 일꾼들에게 주면서 손을 꼬옥 잡아주는 미덕을 보이셨고, 자식들을 위해서는 새벽 3시 쯤 일어나 교촌리샘에서 정화수를 떠와 기도를 하신 후 다시 고성사 절까지 가서 기도를 해오셨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누가 여산 송씨라고 말하면 귀가 번쩍 띄지.” 그런 어머니의 모성은 3형제 모두를 출세시켰다. 맏형은 지금의 광주지방 국세청장 자리인 사세청장을 지냈고, 아래 막내동생은 강진에서 첫 민선도의원을 지냈다.
“내가 고생하며 공부를 해서 그런지 교육에 관심이 많았어. 무엇보다도 강진에 인문고가 없는 것을 절실히 느낀 나머지 강진고등학교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지. 추진위원장을 맡아 추진할 때 나부터 솔선수범 돈을 기부해야 남들도 내놓지 않겠어? 79년 당시 5천 8백만원 기금 조성했고, 나는 4천 8백만원 기부했는 데 그 돈으로 강진고등학교를 세웠지. 그 후로 학교 설립당시부터 3백만원씩 16년간 장학금을 기부했고, 그 후 10전부터는 매년 5백만원씩
장학금 기탁을 해왔지.“
애써 당신의 공을 표현하지 않으려는 겸손 때문에 필자는 군민의 상 공적조서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강진처럼 잘 된 도서관을 인근 군에서 찾아보기 힘들만큼 활성화된 도서관 부지 2천평을 77년도에 희사하여 현위치(강진읍 중앙)에서 건축할 수 있도록 하였고, 70년도 강진원호청 부지 4백평을 내놓아 원호청이 강진으로 유치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다산 동상과 영랑 동상 건립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79년도에 2천만원을 퀘척하였다. 지난 4월말 영랑문학제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서 귀국했던 영랑 선생의 아드님인 현철씨가 찾아와 감사의 말씀을 건넨 것도 동상 건립에 대한 인사였다.
김유홍 할아버지의 사회봉사활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강진에서 한평생 살아오셨기 때문에 이 밖에도 다 열거하기 힘들 만큼 여러 봉사단체에 희사했거나 도움을 준 사실들은 많을 수밖에 없다. 강진의 살아있는 원로로서 이런저런 일에 자연스럽게 관여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느껴지는 것은 김유홍 할아버지가 특히 교육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자녀들 역시 4남1녀가 모두 일류대학을 졸업했다. 장남은 연세대, 차남은 외국어대, 삼남은 서울대법대, 막내는 고려대, 그리고 따님은 전여고와 숙명여대를 졸업한 것은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원호청이 강진에 유치될 때만해도 강진의 인구는 13만이었어. 그러나 지금은 5만도 채 안되고 있지. 안타까운 마음이야. 그래서 그저 강진이 날로 발전되었으면 하고 비는 것이 이 늙은이의 소망이야.”
올해로 아흔 두 살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허리 하나 구부러지지 않을 뿐 아니라 눈도 밝고 귀도 밝은 김유홍 할아버지. 그래서 신문도 보고 지내는 모습에 필자는 대문 밖을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 하나 비우고 살아오니 사업이며 건강이며 자녀들이며 안 되는 일 없이 만사형통한 삶을 살아오신 분이라는 것. 산천초목도 숨을 죽이는 저승사자도 그 자리 내팽개치고 “나도 그런 인간의 삶 한 번 살아보고 싶다”고 말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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