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
김현임(수필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의 광고 문구였다. 그 글귀를 읽는 순간 큰 몸피의 고래가 우쭐우쭐 춤추는 광경이 떠올려지며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良藥苦口, 좋은 약은 입에 쓰다, 네게 달콤한 말을 하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둥의 이런 충고들이야말로 그렇잖아도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요즘 세태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위로와 덕담이 흐르는 칭찬은 말로 엮은 꽃다발이려니 꽃을 받고 기뻐하지 않은 이 없듯 칭찬 받고 상 찌푸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남자들이 여자를 유혹하는 방법이라 했다. 최상급 미모를 갖춘 여자에겐 예쁘다는 찬사를 해서는 안 되지만 약간 부족한 외양의 여자에겐 칭찬이 필수라고 했다. 여자가 맘에 둔 남자를 사로잡는 방법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매력을 찾는 더듬이를 키울 것, 그것을 찾아내어 헤풀 정도로 상대를 칭찬하는 것이 연애를 성공 시키는 최상의 비법이었다. 때론 열등감까지 유발하던 상대의 빈 부분을 메워주는 칭찬이야말로 사랑의 묘약이었다.
며칠 전 만난 가슴 아픈 기사였다. 거짓 계정을 만들어 ‘온라인 관계 맺기’에 접속한 중년 여성이 16살 미소년으로 위장해 13살의 소녀에게 장난 쪽지를 보냈다. 비록 인터넷 상이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이성의 눈길을 받아 본 적 없던 소녀에게 쏟아진 또래 소년(?)의 찬사는 황홀했다. 매사 쭈뼛대던 소녀는 자신감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흔 아홉, 불혹의 터널에서 허우적이던 여자는 탈출구 삼아 벌인 자신의 장난질마저 권태를 느꼈을까. 이제까지의 찬사를 거두어들였다. 급기야 매달리는 소녀에게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고 말았다. 파란 화면에 깜빡이는
“네가 없어져 줬으면 좋겠어”
이 한마디 말에 소녀는 그만 생의 기력을 잃었다. 하여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 소녀다. 이런 화근이 말 대신 못된 그녀, 차라리 침묵해야 했다.
‘좋은 음악은 요즘 세상에서 찾기 어려운 정적을 콘서트홀에서 불러오는 힘을 갖고 있으며 高音樂은 결국 침묵으로 가는 길이다.’ 고음악의 여왕으로 불리는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의 말이다. ‘사운드 스케이프’라던가. 이른바 ‘소리환경’,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고 한다. 1960년대 말부터 현대인들의 소리환경 문제를 연구한 캐나다 작곡가 역시 비슷한 결론을 내놓았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모든 소리연구는 침묵으로 끝난다고.
아침까지 해질녘까지 쫑알대는 떠벌이새들을 품어 재우는 적막산천에게서 배우는 도도한 의젓함이랄까. 말의 끝이 침묵이라는 결론은 의미심장하다. 지지부진 늘어지는 장황한 말보다 단아한 한 마디 말이 훨씬 위력 있다는 뜻이려니 연신 지청구를 늘어놓는 안주인의 말보다 안방에서 들려오는 어르신의 헛기침 한 번이 집안의 법도를 바로 세우는 이치랄까.
어찌 三思而行 뿐이랴, 三思而言이다. 말을 할 때는 네 생의 마지막 말, 유언을 하듯 하라했다. 말수가 적을수록 다툴 일도 적다했거늘 이런 저런 말바꾸기로 버티며 민심을 무마하려던 쇠고기 사태가 기어이 국무총리를 비롯한 총 내각이 일괄 사의를 표명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정국은 시끄럽다 못해 아우성이다. 함부로 뱉은 말, 생각 없이 뱉은 무책임한 말들의 홍수를 일으킨 장본인들이니 당연한 귀결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뱉은 말을 되담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정부각료들을 보노라면 안쓰럽다. 국민에게 겸손히 충성하겠다는 말로 온갖 유혹을 하여 마음을 산 지가 언젠데 언제 내가 그런 찬사를 쏟았나 국민들을 무지몽매한 무리와 엮어 도매금으로 넘기려다 결국 수습할 수 없는 작금에 이르고 말았다.
국민들이야말로 마흔 아홉의 교활한 여자의 노리개로 마침내 죽음에 이른 소녀와 진배없는 절망감에 빠졌다. 아니 더듬이의 촉수를 아무리 내둘러도 마땅한 칭찬거리를 찾아낼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한 듯한 아득한 절망감이다. 제발이지 구차한 변명보다는 차라리 겸손히 침묵하라. 우리는 칭찬에 목마르다. 제발이지 정부여, 진심으로 반성하는 그대들을 보며 칭찬하게 하여다오. 미모야 좀 빠지지만 상대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여주는 어여쁜 태도를 지닌 여자가 되어다오. 그대들, 국민들이 하는 칭찬에 춤추는 고래들이 되어다오. 그래서 그 덩치 큰 포유류의 군무를 보며 우리가 잃었던 미소를 되찾게 하여다오.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