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5)
쌍부벌고수(雙斧伐孤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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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임(수필가) |
‘해가 질 무렵, 해변으로 기다리던 낙조(落照)가 뜰 안에 번지면 빨갛게 숯불이 불붙고 그 빛 닮은 와인그라스에 수평선 아래로 넘어가던 해가 잠시 머문다.’ 이 글을 읽는 순간이 때마침 내 집의 서향 창으로 해가 저무는 시간이어서일까. 글 속의 고즈넉함이 절절히 가슴에 스민다. 아니 노을빛 감미로운 술을 단숨에 들이킨 듯 나는 휘청, 잠시 흔들렸다.
12월의 모임 일자는 항상 선수(先手)를 쳐야한다던가. 한 해 마지막 모임 날짜를 조율하는 우리 고운회 멤버들 얼굴 가득 피어났다 사리지는 홍조(紅潮)다. 세밑의 아쉬움과 새해에 대한 설렘이 교차하는 연말이 다가오면 너나없이 마주하게 되는 술자리.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이 일 년 동안 마신 술, 그러니까 알콜 소비량으론 세계의 우위를 차지한단다, 하지만 술 좋아하기로 러시아 사람들을 따르랴. 술에 관한 그들의 유머도 풍부했다.
두 술꾼이 치즈조각을 물고 전나무에 앉아있는 까마귀를 발견했다. 어떻게 하면 안주감인 치즈를 뺐을까 궁리하던 둘은
“까마귀야, 술잔 있니?”
“없습니다.”
치즈가 땅에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냉큼 안주로 삼았다.
까마귀가 이번엔 쏘시지 조각을 물고 왔다.
“까마귀야 술잔 있니?”
까마귀는 애써 침묵했다.
“까마귀야, 우리와 합석해 마실래?”
“합석해 마시겠습니다.”
까마귀는 합석하자는 제의의 반가움에 냉큼 대답했고 땅에 떨어진 소시지 역시 두 술꾼들의 안주감이 되고 말았다.
다시 날아간 까마귀는 또 다시 빵조각을 물고 왔다.
“까마귀야 술잔 있냐?”
“까마귀야, 우리와 합석해 마실래?”
거듭된 물음에도 까마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어이, 그만둬, 저 까마귀는 벌써 취했어”
그러자 까마귀는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당신들이 언제 내게 술을 부어 주었소?”
어렵사리 안주감을 구해 와 술꾼들과 합석해 술 한 잔 나눠 마실 기대로 침 삼키는 까마귀라니! 하긴 러시아 우화에는 시계 속의 목각뻐꾸기도 안주인이 제 뱃속에 감춰 넣어둔 술을 훔쳐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시각 알리는 걸 잊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0도에 이르는 보드카를 도드나(한 번에 다 마셔 술잔을 단숨에 비우는 것)로, 그것도 최소한 세 번에 이르도록 거부하지 말아야 상대방의 성의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라니. 과히 유주무량(有酒無量)의 경지를 구가하는 대주가(大酒家)가 많다는 러시아다운 술문화를 엿볼 수 있으렷다.
술, 술이 주는 매력은 무엇일까. 한밤중 끝내 잠 못 들고 일어나 기어이 술 한 잔을 홀짝이고 마는 까닭은 상대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한 말이 있어서다. 밤이 깊을수록 탕약처럼 졸아드는 가슴, 그곳에 가득 고이는 것은 술 보다 더 독한 눈물이다. 수풀의 꿩은 사냥개가 내몰고 오장육부에 있는 말은 술이 내몬다했건만 뜨거운 눈물이 마음속의 회한을 씻어 준다는 진리만을 어렴풋이 깨달을 뿐.
상처 받은 인생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주는 유일한 벗인 술, 그래서 유주가이우환(唯酒可以憂患), 오직 술만이 흉중의 번민을 잊게 해준다고 했다. 그래도, 그래도 주의하고 또 주의하라는 경고가 술보다 더 많은 게 있을까. 위에서는 비 내리고 옆에서는 바람 몰아치는 상우방풍(上雨旁風)의 상황, 아니다. 시퍼런 두 날 도끼에 찍히는 한 그루 나무 신세, 쌍부벌고수(雙斧伐孤樹)가 술의 폐해라는 걸 너무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술의 유혹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은 모두 숲이어서 그 속내를 알 수 없다했다. 차라리 저 바다의 바닥을 볼 수 있을지언정 사람의 마음은 종내 알 수 없다고도 했다. 너와 나,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커다란 바위산을 마주한 중압감에 시달리는 이유다. 장자의 오장재(五臟哉)에 따르면 간(肝)에서 인(仁)이 나온다고 했다. 술로 부푼 간은 상대와의 어떤 불협화음도 포용할 듯 푸근하고 너그러운 심성을 만들어 주는 걸까. .
‘신해년 여름, 나는 여러 벗들과 조촐한 모임을 가졌다. 술잔이 이미 돌고 있는데 혹독한 더위가 푹푹 찌더니 먹장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며 마른 우레가 우렁우렁 소리를 냈다. 나는 술병을 차고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건 폭우가 쏟아질 조짐일세. 자네들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는가? 가지 않은 사람은 벌로 술 열 병을 내서 술 한 상 차리도록 하세!”
모두들
“이를 말인가!”
맞장구를 쳤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펴고 앉았다. 난간 앞의 나무는 벌써 미친 듯이 흔들리고, 뼈에 사무치도록 비바람이 크게 일며 산골짜기 물이 갑자기 몰려와서 순식간에 계곡을 메우고 골짜기를 울렸다. 정자의 주춧돌을 할퀴는 물살은 형세가 웅장하고 소리가 사나워서 서까래고 난간이고 마구 흔들렸다. 오싹하여 마음 편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가?”
내가 묻자
“이를 말인가!”
맞장구를 쳤다. 술과 음식을 내오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왁자하였다. 서로 뒤섞여서 베고 기대서는 시를 읊조리며 누웠다. 조금 뒤 한 친구가 이 소식을 듣고 뒤따라 정자에 왔으나 물은 잔잔해진 뒤였다. 그와 함께 술을 한 순배 더 마시고 돌아왔다.’
정약용 선생의 짧은 유기(遊記)인 ‘세검정 폭포’의 일부분이다. 매사 누구보다 엄정한 성품의 다산 선생께도 이런 장난기 발동하는 시절이 있으셨다니! 글에서 연연히 흐르는 호쾌함은 넉넉히 마신 술이 준 효과려니 폭우 내리치는 세검정의 거센 물살과도 같은 사나이들의 호기도 술이라는 오랜 벗의 힘을 빌지 않고 어찌 가능할까. 이런 유쾌하고 호방한 술자리라면 나 또한 거부하지 못하리라. 한 며칠 두 날 도끼에 찍혀 꼼짝 못하고 끙끙거리며 누워 지내게 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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