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지원(羅隱之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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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임 수필가 |
무려 54년 만에, LG전자에서 창사 이후 처음으로 고졸 사장이 탄생했다. 공고를 나온 뒤 36년 동안 세탁기 하나만 붙잡고 매달린 인고의 세월, 그 결실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좋았다고 했다. 특유의 뚝심과 오기로 공장에서 먹고 자며 기술을 익혔단다. 다른 건 몰라도 세탁기에서만큼은 최고가 되겠다는 각오로 숱한 밤을 지새웠고 그 결과 스팀드럼 세탁기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개인적으로 사장 자리에 오른 것도 기쁘지만 우리 기술이 세계 중심이 되는데 기여했다는데 더 큰 보람을 느낀다는 세탁기 세계 1위의 주역 조성진 사장. 그는 고졸로 재벌기업의 수장(首將)에 오르는, 그 난공불락의 벽을 최초로 정복하는 신화를 이루어냈다.
기사 속 ‘오기(傲氣)’와 ‘독학(獨學)’이 내 마음에 오래도록 머문다. 언제였던가. 불쾌함에 머리 흔들어 털어버린 기억들이다. 깍듯한 어투의 정중한 제의였다. 그러나 어느 문화사업체의 필진이 되어달라는 간곡한 청도, 어느 중학교의 작문선생으로 채용하겠다는 제안도 나의 이력서가 도착하여 그들의 눈이 내 학력을 훑었을 즈음 걸려온 몇 마디 철회의 전화로 끝이 났다. 둔기로 가슴을 세차게 맞은 것 같은 통증은 꽤 오래 갔다. 그래 맞다. 너나없이 몰두하는 학벌 따기 대열에는 끼지 않겠다는 내 오기도 한 몫, 게다가 스물 넘긴 딸의 대학진학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능력미달의 어미가 어찌 감히 만학도의 꿈을 꿀 수 있었겠는가. 연이은 좌절의 연속, 그 와중에 다행히 딸은 음대를 졸업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나는 여전히 주변의 충고에 귀 틀어막은 채 천천히, 느린 행보로 내 길을 걷는 중이다.
다만 마이너리티, 소외된 자의 동류의식에다 세상에서 받은 이런저런 상처가 빚은 편협된 내 성벽인가. 배 두드리는 영화(榮華)를 누린 문사들보다는 궁벽한 처지의 글쟁이들에게 더 끌렸다. 좌절한 영혼의 독설가라는 심익운 선생, 냉소와 자의식의 산문가라는 노긍 선생,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로 후세인의 마음을 흔들지만 빈 쌀독에 맹자책을 팔아 밥을 해먹을 정도로 신산했던 이덕무 선생 같은 분들에 사로잡혀 지냈다. 25세에 문학의 신께 올리는 제문을 지었던가. 시대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이옥 선생의 기발한 글도 실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심정의 토로였으리니 글을 읽는 내내 동병상련(同病相憐)에 빠진 건 당연하다. 쓸쓸하기 그지없는 고적한 외길을 더불어 걷는 든든함, 지기지정(知己之情)이었다. 그런 내게 나은(羅隱)의 이야기가 그냥 스쳐갈 리야.
당나라 말기의 시인인 나은은 실력이 있는 데도 열 번이나 과거에 실패한다. 혹자 전하길 제 실력을 믿고 오만방자하여 시험관들의 눈 밖에 났다고도 하고. 급기야 그는 자신의 이름인 횡(橫)을 은(隱)으로 바꾸어가면서까지 출세에 매달리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기생 운영과의 10년 걸친 인연도, 막강한 실력자인 전정의 아름다운 딸과의 연분도 무위로 끝난다. 평소 그의 시에 반한 전정의 딸은 그를 짝사랑하기에 이르렀으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발 사이로 그를 살짝 엿보고선 일순 그 마음을 접었다고 한다. 그의 외모가 너무도 비루하였던 까닭이다. 득의하지 못하는 자신의 심경을 주변의 새나 나무, 꽃 같은 경물(景物)에 실어 읊은 나은의 시들에서는 하나 같이 폐부에서 우러나는 신음의 소리들과 신경질적인 예민한 감수성이 묻어난다.
‘나은의 성격은 한 마디로 비정상적이다. 호연지기가 있고 준일(俊逸)하였으며 시재(詩才)가 발군하여 서법(書法)에 정통, 특히 행서(行書)에서는 당대(唐代)의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었지만 외모가 매우 누추하여 볼품이 없었고 성격은 오만하고 남을 경시, 과감한 면도 있었으나 괴팍하고 자존심이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이런 편벽한 면 외에도 권력지향적인 공명심이 적지 않아 변화무쌍, 이 같은 성품의 표출이 시풍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그의 벗인 심숭이 쓴 나은의 묘지글(墓誌)이다.
나은은 참서(讖書)를 많이 남겼다. 처지를 울분하여 불평하며 쓴 글에 따르자면 ‘나는 어려서부터 타향을 떠돌며 궁색하게 지냈고 20년 동안 하는 일마다 막혔으며 남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고 신세한탄을 했다.
江花江草暖相偎 강의 꽃과 강의 풀이 따뜻이 가까운데
也向江邊把酒杯 또 강변에 기대어 술잔을 잡노라
春色惱人遮不得 봄볕은 이 내 마음 억누를 수 없게 하고
別愁如瘧避還來 이별의 수심은 학질처럼 갔다가 오는 도다
安排賤跡無艮策 천한 자취 지우려 해도 좋은 계책이 없고
裨補明時望重才 밝은 문재로 도우려니 재주를 중히 여기길 바라노라
一曲吳歌齊拍手 한 곡조 오나라 노래에 모두 손뼉을 치나
十年鹿眼未曾開 십 년의 먼지 낀 눈 아직 열리지 않았네
빗을 풍자해 끝이 뾰족한 물건이라 미리 단정 짓지 말라고도 했다. 언제나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히 해주는 사명을 지닌 물건이라는 것이다. 또한 작은 소나무를 빗대 세상이 크게 변할 때 고상한 절개가 필요하니 굳이 인간 세상에서 큰 사람 되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시구로 은연 중 자신을 다독였다. 차가운 창가에서 호호 입김 불며 좋은 글귀를 찾고 있는데 눈 한 조각이 종이 위에 녹아내리는 정경도 그의 시가 그린 생의 호젓하고 외로운 풍정이다.
세상이 원하는 이런 저런 잣대의 미흡함으로 사는 동안 당대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나 덜어낸 부피만큼 다른 것으로 채워주는 게 하늘의 섭리였다. 뚫린 문풍지의 바람뿐이던가. 허전한 가슴팍으로 세파의 냉기가 계절 없이 스며든다. 이렇듯 고절(孤節)한 문사의 삶을 견뎌낸 나은은 사후 스물네 명의 당나라 시인 반열에 당당히 자리 잡았고, 우리 문학사의 비조(鼻祖)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였으니 사진 속 조성진 사장의 파안대소(破顔大笑)가 저 높은 곳에서 터트리는 나은의 웃음과 겹친다. 공자의 제자인 원헌이 평생 가난에 시달린 고사(原憲之貧)와 더불어 ‘나은의 원통함’이라는 나은지원(羅隱之寃)은 불우한 처지의 문인이나 선비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음이 외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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