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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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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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8)
비오하아몽(非吳下阿蒙)

 

비오하아몽(非吳下阿蒙)

 

수필가 김현임
책상에 자리한 12월의 달력은 흥겨운 풍경을 펼치고 있다. 환하게 불 밝은 창문, 눈 쌓인 마당에선 아이들이 썰매를 즐기고 있고 갖가지 장식 매달린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는 현관 앞엔 성장(盛裝)한 사람들과 그들을 실어 온 마차가 멈춰 서있다. 감미로운 음악과 푸짐한 음식, 얼음놀이에 지친 아이들의 빨갛게 상기된 볼이 함께 떠오르는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보며 내겐 어떤 생각들이 스쳤던가. 청춘들의 삶과 고민을 밝고 솔직하게 풀어낸 노래들로 사랑을 받아온 여성 포크 듀오의 연말 콘서트 제목이 ‘수고했어, 올해도’라던데 과연 그런 덕담을 가책 없이 들을 만큼 나의 최선을 다했냐는 반성이다.

하루, 또 하루가 한 해의 납월(臘月), 세모의 끝자락으로 치닫는 아쉬움을 떠들썩한 파티로 마무리하는 정경 속 나는 외톨이처럼 떠돈다. 한 발 진전도 없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싶어 문득 떠오른 말이 비오하아몽(非吳下阿蒙), 비부오하아몽(非復吳下阿蒙)이 전문(全文)이다. 한참 만나보지 못한 사이에 놀랄 만큼 장족(長足)의 진전을 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서 그의 변모에 너무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한다는 괄목상대(刮目相對)와 같은 말이다.

위(魏)와 촉한(蜀漢)이 오(吳)와 더불어 천하의 패권을 두고 경합을 벌이고 있던 때다. 오왕 손권은 무사로선 뛰어나나 학식이 없던 여몽에게 배움을 권했다. 그러자 여몽은 그날부터 학문에 매진했다. 어느덧 그의 박식함은 오의 실력자 노숙도 당해낼 수 없을 만큼 큰 발전을 이루었다. 어릴 때부터 여몽을 알고 있던 노숙은 그의 애칭인 아몽으로 부르며 칭찬했다.

"그대가 무략이 뛰어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젠 학식도 넓어져 오에 머물러 있을 때의 아몽과는 아주 딴판이로구나.”

여몽은 대답했다.

“선비란 대저 헤어져 3일이 지난 다음엔 그 달라진 모습에 놀라 상대가 눈을 비비고 볼 정도는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몽이 전장의 무장에 안주했더라도 역사에 제 이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가 학문에 매달린 이유가 무엇일까. 비상의 염(念)만은 아니었으리라. 다시 새로운 꿈을 향함은 지극한 겸손함이다. 삶에 임하는 경건한 자세의 회복이었으리니 선배인 노숙의 비부오하아몽(非復吳下阿蒙)에 사별3일 즉갱 괄목상대(士別三日 卽更 刮目相對)라 거침없이 대답한 여몽, 큰소리에 걸맞게 노숙에 이어 손권을 보좌한 여몽이다. 장비와 함께 유비의 오른팔이었던 천하의 용장(勇壯) 관우, 그의 목을 떨어뜨리고 명실상부 오나라의 탄탄한 기반이 여몽에 의해 굳혀졌으니 실로 옛날의 여몽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해의 벽두에 홀로 꾸었던 숱한 꿈들, 그를 향해 몸부림하던 어지러운 흔적은 내 자신만이 아는 부끄러운 발자취의 기록이다. 혼자서 꾸는 꿈은 단지 꿈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비로소 현실이 된단다. 꿈을 날짜와 함께 적으면 계획이 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선가. 혹한이 기승을 떨치는 겨울 초입, 이주노동자를 위해 1000Km 달리기 도전에 나선 스님의 올 한 해의 마지막 꿈이 신선하다. 전날 내린 눈으로 바닥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회색 승복에 염주를 매달고 ‘100원의 나눔’을 광고하며 달리고 또 달린다. 남편의 사망이나 가정폭력으로 모자가정이 된 이주노동자 가족들을 위해 ‘달팽이 쉼터’를 만들어 주겠다는 꿈, 너비 큰 소망실천의 달리기다.

꿈을 향해 전진하는 또 한 사람도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2009년 게다 안다 콩쿠르의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이진상(31)씨다. 피아노 제작의 명가(名家)인 스타인웨이의 독일 공장에 ‘도제(徒弟)’신분으로 입사한 그는 밑바닥부터 배우고 싶어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을 숨겼단다.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2시까지 피아노 제작 공정을 배우는 그의 일과는 고교를 마치고 입사한 현지의 초짜 기술직들과 똑같다. 콩쿠르 우승 이후 매년 80여 차례의 연주회를 유럽과 아시아에서 가졌지만 문득 회의가 들었단다.

“작곡가의 고통과 절규를 쏟아내며 작품을 연주했는데 막상 음악회가 끝나면 관객들은 그저 아주 아름다운 소리라는 평을 했지요. 내가 청중과 제대로 소통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컸어요. 모차르트의 소나타 2악장에서 ‘구름 뒤에 감추어진 햇살’ 같은 음색을 주문하면 스타인웨이의 수석 조율사는 다소 멀게 들리면서도 은은하게 광택이 빛나는 소리를 잡아주었지요. 머릿속에서 추상적 관념으로만 존재하던 음색이 실제 눈앞에 나타나는 모습은 제겐 신비하면서도 황홀했죠. 피아니스트들은 정작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해서 잘 모르거든요. 원래 늦바람이 무섭다고 건반 뒤의 세계를 내 눈으로 직접 들여다보고 싶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업은 피아니스트라고 적어 주세요.“

이렇듯 성실한 일꾼으로서 포부를 밝히는 젊은 연주자의 목소리도 여몽의 어조(語調)와 톤이 같았으리라.

우리는 또 다시 찬란한 새 꿈을 꾼다. 때마침 싱가포르 국민들이 뽑은 올해의 한자가 ‘색(色)’이라 전한다. 지난해의 한자였던 가득 차다, 푸르다, 싸늘하다는 의미의 ‘창(滄)’은 물러가고 개혁의 ‘개(改)’와 분노의 ‘노(怒)’, 꾸짖다와 책임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 ‘책(責)’, 그리고 덕과 베품을 의미하는 한자인 덕(德)도 2012년의 글자후보로 올랐단다. 때론 잘못을 고치고 때론 각박한 현실에 노하다가 결국 게으른 자신을 혹독하게 꾸짖는 참담함에 빠져보지 않은 이 있을까. 끝까지 간절하게 남아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게 후회라 했다. 갈수록 꿈은 눈에 띄게 소박해지겠지만 여전히 현란한 색채의 새 꿈을 꾸기 좋은 연말(年末)이자 연시(年始)다. 이루지 못한 지난 꿈을, 가슴 벅차게 피어오르는 또 하나의 꿈을 다시 떠오르는 새 날의 새 태양처럼 욕심껏 품어보려는 지금, 오나라의 여몽처럼 한국 영화사에 거목이 될 가능성이 충분한 젊은 배우의 겸손한 말이 만년 몽상가인 내게 잠언(箴言)처럼 떠오른다.

“CF를 찍고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를 찍어야만 배우라고 생각하던 아이가 한 줄 대사에도 감사하게 됐습니다. 맨발로라도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자체가 저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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