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서(雁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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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임(수필가) |
오고가는 시간의 찰나에 겸허히 무릎 꿇고 싶은 기도의 극점이 새해맞이라 했다. ‘필히 당신만 개봉하세요.’ 겉봉의 수신인 이름자 끝에 친전(親展)이라 적혀 도착한 봉함편지 같은 1월이다. 두툼한 부피의 새하얀 지면엔 내가 겸손히 음미할 소중한 글귀들이 적혀있으리니 봄의 향연, 여름의 신록, 가을의 청아함, 그리고 겨울의 고적함이 쓰인 자연의 문장을 올 한 해도 나는 아껴가며 읽겠다. 해맑은 편지 같은 1월의 입구에서 이런 청량한 문구의 편지도 받고 싶다.
‘적어도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이 광란 속에서 제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붙잡고 있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가치들이 죽어가고 있는 지금, 최소한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가치들만이라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게는 인간을 괴롭히는 불행과 고통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명철한 의식을 유지할 것이며 절대 맹목적이 돼 넘어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그 편지에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이제 막 선생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손에 닿기까지 멀리 돌아온 편지였습니다.’ 모두가 뒤숭숭한 전란(戰亂) 탓이었다. 때론 ‘제 편지가 잘 전해질지 알지도 못한 채 무턱대고 씁니다.’라는 서두로 시작된 날도 있었다. 까뮈가 그의 고교시절 스승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 구절이 가슴에 스민다. 끊임없이 본질과 근원적인 것에 대한 탐색하며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고민하던 까뮈는 안타깝게도 마흔 일곱에 교통사고로 숨졌지만 섬의 작가로 알려진 그르니에와 나눈 까뮈의 서한집은 한 줄 손상 없이 고스란히 남았다.
기러기 울어 예는 정월의 어느 한 밤 문득 깨어 쓰는 그대 향한 편지가 안서(雁書)다. 끝없는 하늘, 바다와 같은 호수 둘레에 대밀림(大密林),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그 곳에 한 사나이가 있다. 손에는 화살, 머리에는 모피를 뒤집어쓰고 수염은 덥수룩하게 얼굴을 가렸다. 영락없이 산사람 같은 모습이나 눈에는 정기(精氣)가 흐른다. 끽끽, 머리 위를 지나가는 기러기 소리에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나이, 그가 소무(蘇武)다. 무제(武帝)의 천한원년(天漢元年 BC100년), 그는 사절이 되어 북쪽 흉노에 왔다. 포로 교환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흉노의 내분에 휩쓸려 그를 포함한 사절단은 모두 체포되어 항복하지 않으면 죽을 위험에 처했다. 그 중 소무만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아 산 속 어두운 동굴에 갇혔다. 음식도 주지 않아 바위의 이끼를 씹고 고인 물을 마시며 버텼다. 오랜 굶주림에도 소무가 죽지 않자 그를 귀신이라 여긴 흉노는 북해, 인적 없는 바이칼 호수로 보내 그곳에서 양을 치게 했다.
“네가 기르는 양이 새끼를 낳으면 네 놈의 고국으로 보내주겠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양은 모두 수놈뿐.
가없는 하늘, 울울창창 우거진 숲, 드넓은 호수, 그리고 매서운 추위와 굶주림, 게다가 도둑들이 기르던 양마저 모두 훔쳐가고 말아 들쥐를 잡아 연명했다. 그래도 끝까지 흉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이 황량함 속에서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가혹하고 단조로운 나날들, 그러나 넓고 넓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기러기는 고향을 떠오르게 했다. 한의 무제가 죽고 다음 소제(昭帝)가 등극하여 6년, 한의 사신은 흉노에게 왔다. 그리고 소식불명의 소무를 놓아 달라 요구했다. 흉노 측에서는 소무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잡아떼었다. 그 진위를 알 수 없던 한나라의 사신들로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앞 서 소무와 함께 왔다가 투항하여 지금 그 곳에 머물고 있는 시혜라는 자가 한나라의 사신에게 귀띔했다.
“한나라의 천자께서 상림원(上林園)에서 사냥을 하고 계실 때 기러기 한 마리를 쏘아 잡으셨다. 그 기러기 다리에 비단 헝겊에 매어져 있었는데 헝겊에는 소무가 대택(大澤) 속에 있다고 적혀 있었으니 소무는 살아있음이 명백하다.”
그것은 소무의 거처를 알고 있던 시혜가 거짓 꾀로 흉노의 속셈을 찌른 것이다. 결국 바이칼 호수에서 발견된 소무, 머리와 수염은 희고 헤어진 모피를 걸친 남루한 양치기 모습이었으나 소무가 틀림없었다. 무려 15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소무, 이 고사가 근원이 되어 편지나 문안을 안서라 하게 되었으니 안찰(雁札), 안신(雁信), 안백(雁帛)도 동류의 말이다. 마음이 돌아선 상대를 설득하기에 간곡한 어투의 편지보다 더 좋은 게 있으랴. 오죽하면 실수로 쓴 상대의 글귀를 확대해석하여 그럴 듯한 문구로 받아들인다는 영서연설(郢書燕說)이라는 고어까지 있을까. 초나라 영 땅에 사는 사람이 연나라 재상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주인이 불러주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문구를 적어가던 아랫사람, 너무 어두워 행여 실수 할 새라 주인은 곁에 있던 하인에게 ‘등불을 들어라(擧燭)’ 명령했다. 그 말조차 편지를 대필하던 이가 그대로 적어 보냈다. 편지를 받은 연나라 재상은 편지 속 적힌 ‘거촉’의 뜻을 두고 몇 날 며칠 고민하다가 무릎을 쳤다. ‘옳거니! 어진 인재를 찾아 등용하라’는 말로 받아들여 왕에게 아뢰었으니 이후 어떤 주장이 본뜻과는 달리 높이 평가되는 경우를 이르는 고어로 영서연설은 자리 잡게 되었다.
흰 여백의 종이를 펼치면 저절로 뱉어지던 큰 숨이니 한 해라는 긴 편지의 첫 줄인 1월만 그러하랴. 모든 것의 시작에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경건함이 있다. 날을 벼리는 바람 소리마저 범상치 않아 심기 뒤숭숭한 날, 그런 날은 우리의 움츠러든 마음을 녹여 줄 몇 줄 글이라도 나누자. 그래야 날 바짝 섰던 우리 마음의 각(角)도 스러져 평평해 진다니.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노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따뜻한 어깨와/강물소리로 여자를 적셨다/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고/여자는 백 여든 아홉통의 편지를 부치고//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완벽한 겨울이었다.’ 고정희의 시 ‘관계’ 중 부분 발췌
새 연필 깎아 사각사각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날 문득 떠오른 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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