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11
사이불망(死而不亡)
김현임(수필가)
책을 엮은이는 서문에서 미리 밝혔다. 세상에 숱한, 그리고 내노라는 예술가 집단에서 그들을 선정한 이유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먼저 탁월한 예술적 성취가 있을 것, 거기에 삶의 행정(行程)이 순결하고 치열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는 예술가일 것, 마지막으로 선자(選者) 자신의 삶이나 생각, 느낌에 관여적일 것, 말하자면 그에게 특별한 호소나 울림을 주는 예술가일 것을 꼽았다. 굳이 책으로 엮어 펴는 까닭도 자신이 그들의 삶과 예술에 자욱하게 번져있는 삶의 취기를 훔치고픈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만나게 된, 죽었지만 기리는 이들의 가슴에 영생 중인 사이불망의 예술가들은 하나 같이 자만덩어리에다 원칙주의자들이었다. 또한 평생 궁핍한 생계에 대한 압박과 쓸쓸함에 시달렸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는 내내 내 눈과 가슴은 감동으로 크게 떨렸다. 자신의 처지를 콜로세움의 고양이처럼 가련하다했다. 온통 먼지와 석회로 뒤덮인 작은 마을의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소설과 시, 평론을 쓰며 나중엔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힌 이탈리아의 전천후 작가 파올로 파졸리니가 선두였다. 불꽃같은 열정으로 빛나는 시어들을 조탁해 내었으나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천재 여류시인 실비아 플러스의 족적도 만만찮았다. 뒤이어 소개된 이는, 스스로 자신을 가난 씨라고 부르며 그 누구의 방문도 허용치 않고 27년간을 창문까지 굳게 봉해진 상아탑이라 명명한 집에서 홀로 지냈다. 을씨년스런 거미줄과 고장 난 피아노 뚜껑 밑에 감춰진 쓰레기더미와 온갖 잡동사니 속에서 철저히 은둔자의 생을 살다간 작곡가 에릭 샤티, 그는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온 당신’이라는 책의 표제가 되었다.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된, 자신이 쓴 소설 ‘인간 실격’처럼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부적격자라는 자책에 시달리며 숱한 자살 시도 끝에 39세의 생일날 물에 뜬 시신으로 발견된 일본의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도, 구원도 없고 상담도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일에 자신의 재능을 소진한 조각가 케테 콜비츠도, 영광도 많았으나 비난 또한 적지 않아 한바탕 난투극과 같은 삶을 꾸리다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가 무대에 나설 때마다 언론은 격찬했고 대중은 열광했으나 30여 년을 각처의 요양원을 전전하다 런던의 정신병원에서 실어(失語)와 자폐의 삶을 마감한 무용가 바슬라프 니진스키까지. 온갖 파격과 오만이 뒤범벅된 고집쟁이들의 흔적을 나는 가쁜 숨 헉헉대며 읽었다.
그림자는 서정적이지만 실체는 냉혹하다던가. 그들의 빛나는 예술혼과 비례해 피폐하기 짝이 없는 삶의 여정, 하지만 재능 위에 비추는 역광이 빚은 아름다운 형체의 그림자처럼 엮은이의 화려한 문체로 서술된 그들의 삶은 눈부심 그 자체였다. 죽어서야 그만 두게 되는 것이 사기후기(死而後己)다. 하나의 이념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그를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살아있는 동안 한 시도 쉬지 않고 자신의 길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비로소 죽어서야 끝을 내는 꿈의 삶,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도저히 꾸리지 못하는 사이후기(死而後已)의 본보기가 그들이었다. 척박한 현실에 대항해 자신에 대한 긍지로 무장한 그들도 종종 자학하듯 내뱉었다. 끔직한 고립 속에서 완전히 혼자였으며 고아처럼, 때론 고독한 벌레처럼 괴로웠다고.
목아불효사(牧兒不曉事)라, ‘어린 목동은 새벽일을 모른다?’ 이렇게 서툰 해석을 해놓고 보니 픽 웃음이 나온다. 그 또한 사이후기의 존재였으니 훗사람의 불경 탓에 곡해된 박제가의 그림 속 구절을 문자에 어리석은 목동처럼 몇 번이고 되읽는다. 유난히 살찐 소를 타고 섶다리를 건너기 직전인 그림 속 목동아이의 손에는 피리가 들려있다. 박제가, 그가 추구하고픈 삶의 모습이었을까. 눈 뜨기 무섭게 바위에, 마당에 글씨를 끄적이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틈틈이 종이뭉치를 선물해 주었다던데. ‘어려서는 문장을 배웠고 커서는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학문을 좋아했으나 수개월 집에도 가지 않고 공부를 해도 지금 사람들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서자로 태어나 갖은 박대 받으며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겨우겨우 연명하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지만 벼슬길은 요원했다. 그러나 그는 비굴하지도 세상에 아첨하지도 않았다한다. 대신해 뜻이 높고 고독한 사람들만 골라 사귀었다니 이덕무와 박지원 등등의 백탑파가 그들이다.
나는 늙으려고
조창환
나는 늙으려고 이 세상 끝까지 왔나보다
북두칠성이 물가에 내려와 발을 적시는
호수, 적막하고 고즈넉한 물에 비친 달은
붉게 늙었다 저 괴물 같은 아름다운 달
뒤로 부옇게 흐린 빛은 오로라인가
이 궁벽한 모텔에서 아직 다하지 않은 참회의
말 생각하며 한밤을 깨어있다
삶, 징그러운 얼굴들 뿌리치려 밤 새
몸 흔드는 나뭇잎들, 아주 흐리게 보이는
소리 사이로 눈발 같은 미련이 섞여 있어
눈물겹다 세상의 길이란 길
끝에서는, 삭은 두엄 냄새 같은 편안한
잠 만날 줄 알았건만 아직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저 기막힌 그리움
벗어 놓는단 말인가 부끄러운 나이도 잊고
한밤을 여기서 늙어 머리 하얗게 세도록
바라본다 허망한 이승의 목숨 하나가
몸 반쯤 가린 바람 사이로 흔들리는 것을
애초 함께 도모하였던 선의(善意)는 어디로 갔는가. 제 이익 앞에 눈 하나 까딱 않고 배신의 얼굴을 하는 무리들 속에 내 얼굴도 보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당황해 적당히 타협하려드는 낡고 비루한 표정이다. 지혜라는 당의정으로 포장된 비겁함, 그들은 우리의 이런 혼돈을 잡아줄 뿐 아니라 막힌 생각까지 꿰뚫는 정문일침(頂門一鍼)의 바늘이었다. 그 바늘은 현기증에 시달리던 우리의 마음을 순치시켜 주었다. 하니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死者不可復生)는 말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만나는 매순간 우리의 영혼 속에 스며드는 그들은 영원히 젊다. 죽어서도 결코 썩지 않는다는 사이불후(死而不朽)한 존재, 그들의 푸른 정신은 길이길이 살아남아 정갈한 샘물에 갈급한 후세인의 목을 축인다. 어느 한적한 숲에서 그들이 쏜 화살들은 아직도 대기를 가르며 과녁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중이다.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