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13
김현임(수필가)
명경지수(明鏡止水)
거울을 본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 탓일까. 좀체 물러가지 않는 이 칙칙한 우울함, 침울한 표정이 못마땅해 찌푸린 울상에 더욱 고약해진 내 얼굴이다. 당돌서시(唐突西施)라 했던가. 미인계(美人計)의 미끼가 되어 적국으로 갔으나 매사에 당당했다던 월나라의 미녀 서시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 그녀도 고국을 향한 그리움, 그 남모를 속 끓임은 어쩔 수 없었던지 위장에 병이 생겼다. 그래서 항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이마를 찡그린 표정이었다(서시빈목西施矉目). 하지만 그 모습조차 너무도 아름다워 나라의 오나라의 모든 여자들이 흉내를 내는 통에 주제파악을 못하고 남의 흉내를 내는 사람을 이르는 동시효빈(東施效顰)이라는 사자성어가 탄생했다던데... . 천하의 담 큰 서시도 차마 감추지 못하던 속내, 이렇듯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 나이답잖게 거울 속에선 금방이라도 한 톨 눈물방울이 떨어질 듯, 이런저런 근심에 갈등하는 내 마음이 빚은 아름답지 못한 내 얼굴이 애잔해 감히 꿈꾸어보는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다.
노나라에 형벌로 발 하나가 잘린 왕태라는 사람이 있었다한다. 그는 덕망이 매우 높아 제자의 수가 공자의 제자와 맞먹을 정도였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상계(常季)가 스승에게 물었다.
“왕태는 외발이 병신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 수가 선생님과 노나라 인구의 절반씩을 갈라 가질 정도로 많습니다. 왕태는 불편한 다리로 그저 서 있을 뿐 애써 가르치지 않고 앉아 있을 때에도 딱히 어떤 주제를 택해 사람들에게 논한 일조차 없는데 빈 마음으로 찾아갔던 자들이 가슴에 무언가를 가득 안고 돌아온다고 합니다. 말없는 가르침이란 게 있습니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속마음은 이미 완성된 자가 왕태라 하더라도 그는 스스로 수양하여 자기의 지혜로 변함없는 본심을 터득했다 합니다. 그러니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한 수양일 뿐인데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모여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대답했다.
“그는 성인(聖人)이다. 내 아직 그를 직접 찾아뵙지는 않았지만 나도 장차 스승으로 모시려 하니 나만 못한 자들이야 오죽하겠느냐. 머지않아 노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천하의 사람들이 왕태를 따르려할 것이다. 사람은 본디 흐르는 물을 거울삼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을 거울삼는 법. 왕태 자신이 잔잔하게 가라앉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잔잔하게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우화인 응제왕편(應帝王篇))을 통해 일렀다. ‘지덕(至德)의 성인, 즉 지인(至人)이란 저 환하게 맑은 거울(明鏡)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명경은 사물의 오고감에 내맡긴 채 자신의 뜻을 나타내지 않는다. 미인의 얼굴은 고운 얼굴 그대로, 추부(醜婦)의 얼굴은 추한 그대로 비출 뿐 머문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어떤 물건을 비추었던 그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어떤 것에 차별도 집착도 없으므로 마음이 한없이 자유롭다.’ 애써 더듬어보는 책 속 선인들의 말은 지당하기 그지없건만 한 뼘 거울 속의 우리는 여전히 흔들린다.
누구보다 폭풍우 치는 내면을 지녔던 에곤 실레다. ‘거울 속의 나르시스트’라던 그에게는 죽음의 고독과 삶의 욕망이 고리처럼 뒤얽혀 있었다. 고독한 자아와 욕망하는 자아, 그 분열적 세계가 공존하는 자신을 연민했다. 음울하고 분노에 찬 눈빛을 가진 자신과 그를 애틋하고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자아, 둘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가. 그의 이젤 앞에는 늘상 커다란 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커다란 거울을 이사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겼다. 전신을 비추는 거울은 그의 눈이었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심지어 모델을 그릴 때도 모델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화상을 그렸다. 에곤 실레의 파격적 행위, 그의 지나친 오만과 자존심은 외부로부터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 살고 있는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는 등등. 비싼 모델료에 가난한 화가들은 즐겨 자신을 모델로 삼아 그리기를 즐겼다지만 그는 어떤 모델보다도 자신을 모델로 삼아 더욱더 자신의 고독을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생령(生靈), 도플갱어를 거울을 통해 만났다. 거울 속 도플갱어를 그리고 또 그렸다. 한 명의 에곤 실레의 머리 위에 살포시 고개를 얹은 또 하나의 에곤 실레, 끊임없는 내부분열에 시달리는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의 두 자아가 그려진 에곤 실레의 명작 ‘이중 자화상’은 그렇게 완성 되었다. 스물여덟에 요절한 그의 사인은 사흘 전에 죽은 그의 아내와 동병(同病)인 스페인형 독감이었다. 하지만 관객모독이라고 지탄 받던, 발가벗고 자위하는 모습이 그려진 파격적 그림 속 그의 나른한 무표정이 우리에게 암시하려던 건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얼굴에는 많은 그림이 그려진다. 슬픔과 기쁨의 그림이 진한 색깔로 그려지는가 하면 그리움이나 아쉬움이 선연한 물빛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굴을 일러 마음의 거울이라고 한다. 거울 앞에 서서 우리가 보려는 것은 외면만이 아닐 터, 저 깊은 내면의 풍경을 살펴보려 노력한다. 공자는 말했다. ‘그대의 내면을 거울에 비쳐보라. 밝은 거울은 그대의 본 모습을 살필 수 있게 하고 지난 일은 무릇 현재의 자신을 알게 해준다(子曰 明鏡 所以察形 往古 所以知今).’
입춘을 넘겼으니 봄비인가 겨울비인가. 습기 탓에 부옇게 흐린 거울이 내 맘인 듯 답답하다. 빡빡 문질러 닦으며 또 하나, 내면의 거울을 꺼내든다. 그것에 어제까지의 삶을 비춰보며 오늘의 나를 응시한다. 먼지가 낀 거울은 맑지 못하니 내면의 거울도 말끔하게 닦아두지 않으면 오늘의 내 위치를 직시할 수 없을 터. 내 허세의 검불과 욕망의 오물들을 털어낸들 어찌 서시의 고운 외모, 그 흉내를 낼 수 있으랴. 다만 환하고 맑은 명경지수, 그 평온한 얼굴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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