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20)
김현임(수필가)
고사성어, 그 맛과 멋
우리는 시시때때로 거울을 보며 자신을 다듬는다. 되도록 흐트러짐 없는 매무새를 보이기 위해서다. 삶 또한 마찬가지다. 내면의 거울 속에서 만나는 맛과 멋, 그 중 멋이 어느 정도 타자의 시선을 염두에 둔 삶의 모습이라면 맛있는 삶이란 전적으로 자기 본위로 꾸려가는 행태의 삶이 아닐까. 맛있게 살면서 남의 눈에 멋있게까지 보이는 생을 꾸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삶이라는 건 그리 수월하게 짜 내릴 피륙이 아니다.
지사(志士), 열사(烈士), 의사(義士) 등등이 멋을, 손꼽히는 반열에 오른 부호(富豪)나 왕위를 포기하고 사랑을 택한 왕족이라던가, 자유분방한 여행가, 아니면 남이야 뭐라든 은둔하여 일정한 직업도 갖지 않고 제 취향과 방식대로 살아가는 자연인 등등이 제 맛 위주의 삶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어찌 되었건 생의 멋과 맛을 누린 사람들의 행적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염분 섭취의 농담도(濃淡度)가 건강수호의 이슈로 떠오른 작금, 우리의 재래 장에서 나트륨 없이 짠 맛을 내는 물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간장이 숙성되는 과정에서 탄수화물이나 당분이 사슬구조로 이루어진 글리칸 분자를 함유한 펩타이드계 활성물질이 짠맛을 낸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40%의 소금물만으로도 같은 수준의 짠맛을 낼 수 있게 해주는 물질이니 고혈압 등 각종 성인병을 유발하는 소금섭취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낭보(朗報)다.
몇 년 전인가. 1950년 6, 25동란 때 피란 나서며 허겁지겁 묻은 장독의 장이 시가 1억을 웃도는 가격에 팔렸다는 기사도 있었다. 100년, 150년의 세월 묵은 우리 고유의 장은 위장병 치료의 효능도 발휘했다. 이른바 세월이 빚은 무해, 무자극의 소중한 맛이다. 어찌 맛뿐이랴! 개결(介潔)한 정신의 결정체, 우리의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는 끌이요, 망치인 옛 사람들의 행적이 파생시킨 고사성어야말로 삶의 정수(精髓)가 담긴 사리함(舍利函)이니 어느덧 수정체로로 엉긴 재래장이다.
‘골동(骨董)과 상완(賞玩)하는 것은 병을 물리칠 뿐 아니라 수명을 연장하는 좋은 놀음이다. 달인단사(達人端士)와 더불어 담예논도(談藝論道)를 하며 고인(古人)과 마주 대한 듯 잠심흔상(潛心欣賞)하는 동안에 울결(鬱結)한 생각은 사라지고 방종한 습관도 고쳐진다’, 이를 쉽게 풀이하자면 매사에 도통한 사람을 만나 그와 세상사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곽 막혀 답답하던 마음이 툭 트인다는 얘기다. 명나라의 동현재(董玄宰)는 덧붙이길 옛 것을 즐김으로 해서 각병연령(却病延年), 병을 물리쳐 오래 오래 살게 된다고 했다. 건강한 마음에 건강한 몸, 마음이 후련하게 개이니 몸도 덩달아 좋아지는 이른바 일석이조(一石二鳥)다. 오래된 것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올곧은 마음과 척박한 현실을 무사히 헤쳐 나갈 삶의 지혜를 함께 수련하는 심지쌍수(心智雙修)란다.
송나라 미원장(米元章)은 채유(蔡攸)와 함께 배를 타고 놀다가 유가 가진 왕우군(王右軍)의 글씨를 보았다. 너무 황홀하여 자기가 가진 그림과 바꾸자는 제안을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아무리 사정해도 소망하는 그림을 갖고 싶은 염을 이룰 수 없겠다는 것을 간파한 미원장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차라리 그림을 품고 물에 빠져 죽겠노라는 선언을 한 것이다. 목숨을 내건 친구의 협박에 채유는 아끼던 소장품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한 폭 서화를 향한 지나친 소유욕이라 지탄할까.
그 채유가 들으면 대성통곡을 할 일화다. 중국 북송 시대 제작된 1000년 역사의 흰색 사발 도자기가 며칠 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220만 달러,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24억 원을 호가하는 가격에 거래되었다. 창고 세일 때 3달러를 주고한 도자기의 진가가 궁금해 경매에 내놓았다가 횡재를 한 것이다. 명품에 얽힌 웃지 못 할 일화는 또 있다. 감정가 8억이 넘는 영국의 유명 조각가 헨리 무어의 작품이 도둑들에 의해 고물상에 8만원에 거래되어 다행히 해체 직전 반환되었다는 황당한 뉴스다.
중국의 한 마을에서는 전 주민이 명화복사(名畵複寫)로 생계를 유지한단다. 모네의 수련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드가의 무용수도, 뭉크의 절규를 비롯해 고호의 해바라기까지 단 돈 6만원 내외의 가격이면 전문가도 진위여부를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진품과 다름없는 그림들을 집에 앉아서 배송 받을 수 있으며 모사(模寫)마을은 갈수록 성업 중이란다. 그 벽엔 분명 물리칠 수 없는 찜찜한 기분도 함께 걸리겠지만 진짜를 가질 수 없다면 그 모조품이라도 곁에 두고 싶다는 가엾은 우리의 심리를 이용한 상술이다.
학문도, 예술도 요즘 것은 옛 것만 못하다는 금불급고(今不及古)의 탄식이 도처에서 들린다. 우리는 왜 이렇게 골동품에 경도(傾倒)되는가? 한 개 사기(沙器)를 어루만질 때나 한 쪽 파와(破瓦)를 얻었을 때나 모름지기 그것들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옛 형제의 피를 느끼고 그들의 감각이 어느 모양으로 나타났는지가 궁금해서라는 고차원적 우의(友意)가 시발인가. 아니면 세월이라는 혜안(慧眼)이 검증을 거쳤으니 안도감 높은 부(富)의 축적수단이라는 솔직한 말이 더 타당할까?
매연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거리의 현실만이 아니다. 갈수록 변화무쌍하게 돌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매순간 활로를 모색해야하는 현대인들이다. 삶은 과히 숨 가쁜 전장(戰場)터를 능가하는 긴장도를 요구한다. 더구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가중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게 통찰(洞察)의 힘이다. 글로벌 시대, 디지털 사회로 속진(速進)하면서 너무도 많은 변수들에 따른 분석 과잉으로 두루 살피는 힘인 통찰(通察)력도 결핍 상태다.
고사 속 등장하는 삶의 유형은 대다수 상처의 흔적이다. 하지만 세월이 침전 시킨 앙금 속에는 의리, 용기, 인내, 배려 등등의, 우리가 잃어버린 그윽한 삶의 향취가 얼마나 많이 가라앉아 있는가. 삶에 대한 진한 애정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열정,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의 문을 여는 열쇠다. 선인(先人)들이 생의 피땀을 먹물 삼아 기록한 인간 백과사전(人間百科事典) 속 대다수 네 자로 요약된 낙수(落穗)의 낱말들, 그 짧은 단어 속에 감춰 둔 깊고 오묘한 진리는 무궁무진하다.
생이란 본디 황무지 아니던가. 잡초와 가시덩굴 우거진, 애초 길도 없던 그 길을 그들은 몸소 걸었다. 이렇게 미리 탐색한 지도를 아낌없이 건네준다. 욕망과 소란의 거리를 떠나온 자에게 건네는 호쾌한 턴키(turnkey) 방식의 거래다. 열쇠만 돌리면 모두 장착된 설비이니 네 맘껏 운용하라 권한다.
음악을 받아들이는 최고의 명기(名器)는 자신이란다. 명곡 속에 숨은 폭넓은 해석을 감당할 수 있어야 뛰어난 악기가 된다고 했다. 음악에서뿐 아니다. 미술, 문학, 역사서 등등의 모든 古典들이 주는 최고의 경지는 우주와 자신과의 관계를 뚜렷하게 통찰(洞察)하게 해주는 순간이다. 그것이 무리라면 최소한 그동안의 자신을 뒤돌아보는 기회라도 만들어라. 그래서 이제까지 붙들려 있던 무기력의 포위망 속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자신감에 찬 새로운 시작을 하는 뜨거운 용기를 회복하라.
사람이 부귀빈천을 떠나 세상에서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열에 아홉이니 한 번 움직여 보려는 자의 행보를 막는 것은 고슴도치의 털처럼 숱하다는 것이다. 백정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가는 수모를 견디고 빨래터의 아낙네에게서 찬밥으로 연명하면서도 절대로 천하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신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을, 비천한 농민출신이었지만 구국의 신념으로 신(神)의 반열에 오른 악비는 운용지묘재일심(運用之妙在一心)의 선명한 발자국을 찍었다. 우정의 전범을 보인 관중과 포숙아는 관포지교(管鮑之交)를, 진정한 의리가 무엇인지 죽음으로 보여준 예양의 행적도 칠신탄탄(漆身呑炭)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으로 남았다.
이렇듯 역사의 포폄, 그 냉혹한 여과를 거친 그들의 피투성이 이력이야말로 잘 정수된 샘물이요, 자양이 넘치는 에너지원이다. 우리를 역사의 깊은 사고로, 단숨에 몇 천 년을 단번에 꿰뚫는 넓은 조망의 세계로, 진정한 삶의 원리로 이끈다. 고투했지만 결코 자신의 꿈을 향하는 길에서 무릎 꿇지 않았다. 악전고투의 여정에서 끝까지 패배하지 않는 혼을 지녔던 이들은 깊이 있게 사고하여 현명하게 판단하는 법, 나아가 삶에 대해 성찰하는 비결을 알려준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라 알려주는 진실성 있는 조언자들이다.
인간을 가장 즐겁게 해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라던가. 삶이란 요람에서 죽음의 경로에 이르기까지 그 곳에 펼쳐진 장난감가게를 들렀다가 가는 길이라 했다. 한 때 손에 쥐고 놀았던 멋진 장난감도 미련 없이 다 놓아두고 가는 것, 그가 실패자이던, 아니면 천하의 패권을 거머쥔 자이건 인생은 한 때의 즐거운 놀이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우쳐 준다. 각기 제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눈을 뚫고 들판을 걸어가노니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를 말자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될 테니
바퀴가 뒤집어졌던 자국이 남은(轉轍)의 길은 부디 피해라. 후세인들에게 전자의 바퀴자국을 살피라 당부하는 전철(前轍)이 떠오르는 이 시는 조선 정조와 순조 때의 시인인 이양연의 작품이다. 어느 날 눈길을 헤치고 들판을 걸어가면서 자신의 행로가 지니는 의미를 반추해 본다. 누가 보지 않아도 똑바로 걷자. 혹시라도 내 어지럽게 찍힌 행로가 뒤에 올 누군가의 행로를 비틀거리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똑바로 살자. 뜨는가 하면 어느새 가라앉고 때론 몸 구부려 슬슬 숨어 지내다가 원하지도 않는 뜻밖의 우러름을 받기도하는, 그야말로 부침부앙(浮沈俯仰)의 연속이 삶, 하니 살펴 조심조심 걷는 내 인생이 다른 인생의 거울이 될 수도 있다는 촌철살인의 잠언이 들어 있다.
“천 년 만 년 길이 남을 명예라는 것은 쓸쓸한 사후의 일이라네(千秋萬歲名 寂寞身後事). 그러니 여보게들 삶이란 이 보너스를 맘껏 누리게나.”
삶이란 바다에서 우리는 황금을 노리는 사략선의 선장이다. 사략선(使掠船)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해적선의 이름이란다. 숱한 구주(舊主)들은 우리가 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낌없이 퍼준다. 마주 앉아 간담상조(肝膽相照)하며 제 흉중의 모략까지 탈탈 털어주며, 패자(敗者)를 향해 터트리던 승자들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들려준다.
“여보게들 제발 자네들은 우리처럼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게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실패자들의 뼈 깎는 후회의 옥(獄) 중 당부다. 그들의 눈물로 얼룩진 페이지는 덤으로 얻는 진주다발이다.
명실상부 명인(名人)들의 일기장이자, 천세만세(千歲萬歲)에 제 이름 석 자 남긴 자들의 방명록이다. 삶이란 죽음이라는 동굴로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이라지만 곰곰 되새겨 읽게 되는 곳이 분명 있다. 글 속 어느 한 장면에서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진다. 사람이나 사물, 혹은 오랫동안 머물렀던 장소까지도 그것들이 품어내는 어떤 기운과 정서가 우리 몸속에 스며들어 우리의 정신, 그 한 부분을 만드니 삶의 유형은 반복된다. 천년 노목의 나이테나 십 년 남짓한 젊은 나무의 결, 그 모양새는 유사하지 않던가. 무엇이 과거이고 무엇이 현재이며 무엇이 미래인가. 하긴 영겁(永劫)도 찰나려니 고금(古今)을 따져 무엇 하려는가. 고사 읽기란 결국 산을 오르며 마주치는 숱한 하산자(下山者)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생생한 충고 듣기다. 우리 모두 삶이란 산을 쉼 없이 오르내리고 있을 뿐 시차는 중요하지 않다.
최근 만과(晩課)라는 멋진 단어가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드리는 저녁기도다. 누구에게나 생의 노을은 공평히 찾아올 터, 편안한 저녁 기도처럼 아늑한 잠자리에 들기 전의 나이에 삶을 되새기며 읽어보는 옛글의 맛이 고기 맛 보다 좋다고 했지만 이왕이면 아직 꼭뒤가 단단해지기 전의 나이에 사람 물결 넘치는 古典의 바다, 그 항해에 나서보라 권하고 싶다. 청소년기, 장차 장대한 거목으로 자라 장원(莊園)과 숲의 일원이 나무들이 그 묘목들의 푸른 가지가 갓 돋아나 지상에 어깨를 뻗어나갈 즈음, 그 나무의 맥(脈)에 평생을 도도히 흐를 건강한 수액을 만들어주는 일이 고전읽기다.
그대, 거울을 보라. 아직도 세상이란 망망한 바다의 위력에 겁이 난 파리한 안색인가? 파도 몰아치는 창해(滄海)를 견디는 비법이 실린 보옥선(寶玉船))이요, 아울러 멋과 맛이 흐르는 삶의 안내도요, 정신의 준령에서 애타게 찾던 금맥(金脈)의 지형도가 고사성어 탐독이니 그를 강추(强推)한다. (마지막부분을 고딕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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