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21
김현임(수필가)
세답족백(洗踏足白)
“내 음악은 나를 위한 따뜻한 위로예요. 그래서 팬들도 위로를 받나 봐요.”
‘루시아’라는 세례명을 예명으로 삼아 활동한다는 가수의 인터뷰를 읽는다. 물빛 같은 음악을 추구한다는 스물일곱 아가씨의 표정은 담담하다. 깊이나 넓이에 따라 바뀌는 물빛처럼 듣는 이의 가슴에 다양하게 다가가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소년원 원생들의 발을 씻기고 있는 신임 교황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스쳐갔다.
더럽고 냄새나는 부위인 발을 씻기는 세족식은 성(聖)이 속(俗)이 되고 속이 성이 되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카톨릭 고유의 의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최후의 만찬에서 열두 제자의 발을 손수 씻겨준 것을 기리는 데서 출발한 의식이다. 카톨릭은 세족식(洗足式)이라는 의례를 통해 평범한 일상에서 성스러움을 재발견하고 체험하도록 한다. 부활절 직전의 성(聖) 목요일을 택해 남자 신도 열두 명의 발을 교황이 직접 씻겨주는 게 전통인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랜 전통을 깨고 로마 근교 소년원을 찾았다. 그 곳에서 소년소녀 재소자 열두 명의 발아래 허리를 굽힌 교황은 아이들의 발에 물을 부어 씻긴 뒤 입을 맞췄다. 아이들은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 중 소녀 둘과 이슬람교도 둘, 그리스 정교회 신자 한 명도 있었다. 교황이 여성과 이교도의 발을 씻어준 것도 처음이라던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을 때 우리 안에 사막이 생긴다. 하니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의 몸을 낮춰 주변에 사랑을 실천하라’ 호소했다는 교황은 유머도 풍부했다. ‘부족한 나를 뽑은 당신들의 죄를 주님께서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기 바란다’는 말로 시작한 부임 첫날 저녁의 기도만 신선할까. 존귀한 신분의 교황이 천한 재소자의 발바닥으로 내려가고 천한 재소자는 교황의 입술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장면이니 아래에만 있던 속이 위로, 위에만 있던 성이 아래로 내려가는 우주적 균형을 잡는 의례의 완성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언제였던가. 어느새 서른 해가 훌쩍 넘었지만 선명히 기억되는 풍경이다. 바로 이 무렵, 난분분하게 벚꽃이 바람에 날리던 봄날 오후였다. 무등산 자락으로 봄꽃놀이에 나섰던 우리 일행 중 H가 계곡 앞에서 훌훌 양말을 벗어 재끼며.
“창랑지수청혜 가이 탁오영이요, 창랑지수 탁혜 가이 탁오족이라”
갓 스무 살의 우리에겐 주문으로 들리는 문자들을 읊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우리를 향해 사학(史學)전공의 그는 원문까지 한 자 한 자 공들여 가며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창랑지수청혜 가이 탁오영 창랑지수탁혜 가이 탁오족(滄浪之水淸兮 可以 濯吾纓, 滄浪之水 濁兮 可以 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을 벗어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 출원은 굴원의 어부사(漁父詞)요, 때마침 맑은 물 만났으나 벗어 씻을 갓이 없으니 이리 탁족(濯足)이라도 아니할 수 없다고 했던가.
‘부도덕한 세상에 대해 적개심을 품지 않고 이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달관의 경지를 상징하며 작은 일에 분노해서 자기 몸을 망치지 말라’는 충고이기도 하다는 탁족의 진의(眞意)를 내가 제대로 깨달은 건 과연 언제쯤이었을까. 물이 맑은 지 흐린 지, 눈 비비고 봐도 작은 그림 속 물빛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시냇가에 한가로이 앉아 갓 벗고 벌건 종아리를 드러낸 채 발을 씻는 선비다. 탁족도(濯足圖)는 숨어사는 은자를 상징하는 그림이기도 한데 ‘장자(莊子)’의 발에 대한 대목에서는 ‘도를 통한 진인은 숨 쉬는 동안 호흡이 발뒤꿈치까지 내려가지만 보통 사람은 목구멍에서 그친다. 무릇 마음 편해지려면 숨이 발뒤꿈치까지 내려갈 정도로 깊어야 한다’ 는 구절이 나온다. 세족이건 탁족이건 더 나아가 종식(踵息)까지 이르는 열쇠는 결국 마음의 평화라는 이야기다.
장애인 시설이나 불우시설에 봉사를 다녀온 사람들은 너나없이 고백했다. 자신보다 불행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작은 위로나마 베풀겠다는 명분으로 찾아갔던 곳에서 오히려 그들에게 큰 위로를 받고 왔다는 후일담이다. 이른바 세답족백(洗踏足白)이다. 어원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빨래봉사를 해 준 이는 이웃의 홀로 사는 병든 노파였을까. 열심히 더러운 빨래거리를 문지르고 주물러 빨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새까맣던 발이 깨끗해졌다.
모처럼 맞은 주일날, 병원에 들러
교회 아닌 백화점엘 간다.
통증을 호소하며 닫힌 병원 문을 밟아 왔을 환
자들로
성시(盛市)를 이룬 병원.
건강한 가족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쇠약해진 몸으로 찾아간 백화점은
병원 대기실만큼 부산하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끼리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끼리
서로의 안부를 물어 장터를 이룬
그들의 절묘한 닮음태(態).
엘리베이터 앞까지 쇼핑 수레를 밀어 오다
오이뭉치를 툭 떨어뜨린다.
순간 비닐봉지를 깔아뭉개는 또 다른 수레바퀴.
비린내를 풍기며 산산이 뭉개져버린 오이보다
마음이 더 심하게 깨어져 흩어진다.
정은숙-‘휴일의 세계’ 전문(全文)
‘인생이란 가없는 심연 위에 드리워진 좁은 들보와도 같으며 우리는 장님인 상태로 그 위를 걸어야 하는 처지’라고 한 스티브 킹이다. 알게 모르게 타인의 오이뭉치를 뭉개버리는 실수를 범하는 우리가 아닌가. 너나 나나 제 욕심에만 눈 먼 자들이니 누굴 탓하랴. 한 발 물러서 가엾은 처지의 서로를 부추기며 돕는 자세가 필요한 이유다. 몸 낮춰 타인의 발을 씻겨 주다가 제 오염된 마음까지 말끔히 세탁하는 류의 이야기는 동화 속에서는 너무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배고픈 길손, 그것도 아주 추하게 늙은 할머니나 못된 손길에 다쳐 신음 중인 약한 짐승에게 떡 조각 양보하는 작은 선심의 보답으로 잘 차린 그들먹한 식사대접을 받는 동화도, 흉한 몰골에 모두가 외면해 홀로 사는 도깨비, 그 도깨비의 간청을 거절 못하고 함께 살다가 귀한 보물을 얻는 젊은이가 등장하는 고전동화의 주제도 모두가 세답족백(洗踏足白)이다.
장수(長壽), 부귀(富貴), 건강(健康)에 이어 유호덕(攸好德)하다 고종명(考終命)... , 즉 건강하게 부귀를 누리며 널리 덕을 베풀다 자신에게 부여된 명을 마치는 게 예로부터 꼽는 오복(五福)이다. 힘으로 지키는 자는 홀로 영웅이 되고 위엄으로 지키는 자는 한 나라를 지킬 수 있으나 덕으로 지키는 자는 천하를 세울 수 있다고 했다. 덕승재(德勝才)요. 덕불고(德不孤)에 덕자유린(德者有隣)이니 덕은 재주를 이기며 덕은 좋은 이웃을 만들고 작은 덕은 큰 덕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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