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초고령화시대(54회)
성전면 신기마을
이광례 할머니(81)
“23살에 밤 사람한테 죽어부렀어.”
남편이 일찌감치 세상을 떠난 이야기였다. 6.25사변 때 좌익 공비세력이 수암산에 숨어들었다. 청년단장을 맡았던 남편이 교대를 하며 숙직을 하고 있었던 어느 날 저녁 남편이 총에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간신히 기어서 들어왔다. 그리고는 잠시 후 한마디도 없이 가버린 것이다.
“죽어부렀는디 어짤것이요.······딸이 이제 막 쩌벅쩌벅 걸어 다닌 때여.”
그러나 남편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딸을 두고 자신마저 죽을까싶은 두려움이었다. 동네는 반란군으로 인해 해만 지면 모두 다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침이 되기만 기다리는 날이 얼마동안인가 계속되었고, 결국 죄 없는 마을 사람들 10여명이 희생되었던 끔찍한 해였다.
이할머니는 해남 계곡면에서 16살 되던 해 신기마을 18살 총각에게 시집왔다. 친정도 가난했지만 시댁도 마찬가지였다. 시집왔을 때부터 시름시름 아프던 시어머니는 1년도 못되어 세상을 떠났고, 남편마저 딸 하나를 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시아버지와 시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할 가장이 되었던 것이다.
“시아버지가 늘 내가 어디로 가까만이 벌벌떨어······.”
일을 하러나가다 뒤돌아보면 시아버지가 담장너머로 보고 서 있었다. 어린 세 명의 시아제들 또한 형수가 행여 나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불안한 눈망울로 바라보았다. 그런 식구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은 차마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혹여 장에 나가면 시아버지 좋아하는 풀빵과 시아제가 좋아하는 사탕부터 사두었다.
“홀애비 시아버지에 애린 것 셋 놔두고 가면 죄가 될 것 같아서 못 가겄습디다. 친정서는 시아제만 여워 불먼 가라고 허더만, 암것도 안 먹고 정신이 백도로 좋아야가지 그런 맘이 안 됩디다.”
그러나 30살이 되던 해 그믐날 저녁에 왜 그리도 잠이 안 오던지 한 밤을 꼬박 새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이할머니다. ‘이제 내 젊은 청춘이 끝나는 구나’ 라고 생각하니 몹시도 서글퍼지면서 사무치는 외로움이 밀려왔던 것이다.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밤. 청춘이 그토록 슬프게만 느껴졌다. 그리고는 더욱 단단히 맘을 먹었다.
“시아제가 꿩 잡을라고 놓은 청산가리를 방에다 갖고 살았어. 만약에 내가 혼자 있다가 나쁜 소리라도 듣게 되면 죽어버릴라고 말여.”
먹고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삶은 치열한 전쟁이었다. 그러던 중 결혼해서 6남매를 낳았던 시아제가 술로 죽고, 동서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딸 하나를 두었던 이할머니는 시아제가 남긴 6남매를 자식처럼 키웠다.
“아이구, 울음도 안나오고 설움도 안나와, 앞이 캄캄허니 아무것도 안 보입디다.”
이할머니는 자신의 복에 아이를 여섯이나 공으로 얻었다 싶어 모두가 자식 같이만 보였다. 그러나 없는 살림에 뜻대로 해주지 못하는 마음에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쓰리고 아려왔다.
“테레비에 청소년이 나오면 혹여 우리 애들 얼굴이다냐하고 유심히 들여다 보여지더만.”
아이들에게 맘만큼 해주지 못해 미안했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말을 잘 듣고 엄마라고 부르며 따라주었다. 지금도 자녀들이 7남매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것도 착하고 고운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라며 잘 자라준 아이들이 고맙다고 말한다.
“내말이다 하면 시킨 대로 하고 모다들 저그가 벌어서 학교도 가고 그랬어요.”
큰아들을 학교 보낼 때는 논 세마지기를 지으면서 3년 동안 천 원짜리 갈치 한 마리를 사보질 못했다.
“광주까지 차비가 어른은 천원, 애들은 오백원인디 그 돈이면 아들 교통빈디 하는 마음에 차마 만지작거리다가도 못 사겄더만.”
참으로 마음 아팠으면서도 기뻤던 때의 이야기도 꺼내놓으신다.
“아들이 처음에 대학에 떨어졌다고 헌게 속으로는 차라리 잘됐다 싶더만, 이제 안보내도 되겄구나 싶은 마음에 말여, 근디 두 번째도 떨어졌다 한게 맘이 쓰리고 아프더만, 세 번째에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니 최고로 기분이 좋더만, 그때 점을 치러 갔는디 점쟁이가 그러더만, 대학교를 가야지 안 그러면 미치겄소. 허고 말여.”
어렵게 키운 7남매가 모두 자기 힘으로 노력해서 잘 살고 있어 고마울 뿐이라는 이할머니. 자식들이 지어준 크나큰 집이 아까워 죽지 못하겠다며 웃는다.
“나 죽으면 우리집 아까워서 어차까이·····.” (이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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