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릿재와 약수(藥水)
강진군 월남리에서 영암읍 개신리로 가는 고개를 누릿재라고 부른다. 현재는 불티재를 통해 터널이 뚫려있어 누릿재를 지날 일은 없으나, 말을 타거나 걸어가던 과거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은 누릿재였다. 과거 터널이 뚫려있지 않은 불티재를 통하면 월출산을 돌아서 가야했지만, 누릿재를 통하면 곧 바로 영암과 강진을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개에는 애달픈 사연들이 전해져온다. 조선시대 과거 중죄인이 되어 남도나 제주 등으로 귀양을 떠나는 이들이 숱하게 이 고개를 넘었기 때문이다. 강진에서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을 보낸 다산 정약용 또한 이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한양에서 850리가 넘는 이곳까지 오게된 귀양인들의 얼마나 참담했을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과거 탐진(강진의 옛 지명)과 탐진 이남의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상경하기 위해 지나는 길이기도 했다. 누릿재는 나지막한 황토의 고갯길로 누런 황소가 드러누운 형국인데, 이 때문인지 주변에 좋은 묘지터가 많다고도 전해진다.
옛날, 누릿재에서 영암쪽으로 가까운 곳에 황치폭포라 부르는 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완전히 사라져 흔적이 없고 사람들에게 명칭조차 잊혀졌다. 그런데 과거 이 폭포물은 한 설화에 의해 병을 치료하는 약수(藥水)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옛날 본적이 나주인 어떤 꼽추가 강진에서 살았다. 그는 마을에서 손꼽을 정도로 가난한 빈민이었다. 가난한 것도 힘든데 운이없게도 부친이 한 여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는 워낙 가난해서 부친를 모시기 위한 영구(靈柩)를 갖출 수 없었다. 그는 남몰래 부친을 묻으려 했다. 옛날에는 이렇게 상조차 치를 수 없는 사람들이 몰래 남의 땅에 시신을 묻고 가는 일이 종종 있고는 했다. 꼽추는 부친의 시신을 지게에 누릿재로 향했다. 그러나 한 여름에 부친의 시신을 지고 가는 일은 고역이었다. 시신 섞는 냄새도 고약한데, 등에 매고 있는 시신은 무거웠다. 그렇기에 그는 한번 쉬었다 가기를 계속 반복했다. 그러다가 그는 황치폭포 쪽에서 잠시 쉬게되었다. 그는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폭포물로 목을 축이고 물을 맞으며 흐르는 땀을 씻어냈다. 그런데 땀이 씻겨나가 개운함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허리가 점점 펴지기 시작한 것을 알게되었다. 수십 년간 곱은 등이 갑자기 올곧게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슨 신기한 조화이면서 아이러니한 상황이란 말인가, 부친의 장례만 아니었어도 당장에라도 춤을 추고 싶었을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이 이야기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주변 사람들은 이 물을 신통한 물이라 여기며 ‘송장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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