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초고령화시대(88회)
“이제와 생각하면 허망허요. 아흔 다섯이나 되았는디...”·
성전면 명산리 명동마을 김제순(95) 할아버지
입을 크게 벌려 큰 목소리로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했다. 김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귀가 많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허망허요. 아흔 다섯이나 되았는디······.”
목소리를 더 높이고 손짓까지 동원했지만, 삶을 애기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할아버지의 방을 들여다보니 방바닥에 신문 잡지 등이 쌓여있고, 책꽂이에는 누리티티한 옛날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손바닥만한 태극기도 꽂혀 있었고, 2007년 명동마을 주민일동이 전달한 공로패도 있었다. 그 공로패에는 마을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여 마을에 기여한 공이 크기에 마을 주민들이 감사의 뜻이 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옆에는 사모패(思慕牌)라고 적인 상패가 있는데, 국가와 민족을 위한 큰 뜻이 실린 공적비 건립에 제44주년을 맞아 애국적 삶을 사모하여 드린다는 내용으로 청주김씨 자손일동이라고 적혀있다. 책꽂이에 꽂혀져 있는 책들은 <강진향교지> <한국인의 족보> <6.25초전격파 구국대승전자> <儀禮典書> <만족의 등불19기에> <청주김씨 세보2권> <한국인간상5권> <공산주의의 활동과 선전> <민족의 수레> <김덕란 의병장 순절국>과 <시경> <서경> <맹자> <논어> <대학.중용> <주역> <장자> 등의 두꺼운 책들이다. 김할아버지께 책을 좋아하시냐고 물었다.
“심심한게 보요.”
대화가 풀리지 않아 고민했던 기자는 메모지에 글자를 적어 보여 드리면서 계속 대화를 풀어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아조 인심이 선후해서 한집안같이 지내요. 그 전에는 여가 도둑이 없는 마을입니다.”
김할아버지는 마을일에 앞장서서 일해 왔던 분으로 40여 년 전 마을 사람들이 마을에 비석까지 세워주었단다. 3남 3녀를 둔 김할아버지는 첫 아내가 68세에 돌아가신 후 만나서 20년을 살아왔던 두 번째 아내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큰댁에 바느질을 배우러 다니던 아가씨가 자신의 어머니를 중매했다는 거였다. 열아홉에 혼자되어 딸 하나와 유복자를 키우며 살았던 여자였다. 20여년을 함께 살았지만 한 방을 쓰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김할아버지의 성격 탓이었는데, 꼿꼿하고 대쪽 같은 이조인처럼 대했기 때문이었다. 옆 사람이 어떻든 상관없이 내 한 몸 챙기면 그만이니, 그 누가 정이 들 수 있으랴. 그래서 특별한 정을 나누고 살지 못하고 동거인처럼 생활했다는 거였다. 그래도 20여 년 간 떠나지 않고 한 집에서 살았던 것은 자식들이 효자였기 때문이란다. 황혼의 나이에 만나 서로 의지하고 살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인데, 김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따뜻하게 해주지 못한 날들이 못내 마음에 남는 모양이다.
“여자가 담배를 피워서 같이 못 잤어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김할아버지는 담배가 싫었다는 거였다. 순한 성격이 아니었던 할머니는 맘에 맞지 않으면 대놓고 퍼부어 버리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작년에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셨다. 자신의 아들이 사고로 죽었는데도, 모르고 있었던 것을 나중에야 알고서는 가슴아파하고 괴로워하였고, 결국 병으로 이어져 1년도 못되어 떠났다는 거였다. 마음속으로야 정이 넘치고도 남았지만 족보와 삼강오륜 속에 살아온 전형적인 이조인 김할아버지는 겉으로는 있는 정도 뚝뚝 떨어지는 꼿꼿한 선비다.
“내가 복이 없어서 먼저 간거지라.”
95세 김할아버지는 귀는 어둡지만 얼굴색은 젊은이보다도 더 좋았다. 그 혈색이 술 때문이라니........안채 뒤에는 김할아버지가 매일 마신다는 소주병과 막걸리 병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이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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