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강화도에 갔다
김현임(수필가)
어느 특정한 공간, 오랜 침묵 속 묻혀 있는 그곳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는 뜻 깊은 여정이 답사다. ‘변이중 선생 유적지 탐방’에 기꺼이 합류한 것은 무엇보다도 ‘강화도’라는 매력적인 지명에 끌려서다. 자신이 처음 시도한 위리안치(圍莉安置), 집 주위를 높게 둘러 싼 가시 울로 하여 대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던, 결국 그 형벌을 받는 죄인의 처지가 된 연산군을 비롯해 광해군처럼 실패한 군주들의 유배지요, 저 유명한 강화도령 영창대군의 원혼이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섬의 유혹을 무시할 수 없었다.
‘메멘토 호라’, 아직 이 땅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목하 지난 시간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명령어라던가. 누군가의 억울하게 묻힌 세월의 부피를 낱낱이 들추어내 증언하는 것은 글 쓰는 사람의 몫이라고 했다. 이제는 곁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와 만든 꽃밭처럼 한 가족의 추억이 서린 공간에 대한 애착도 그러하지만, 핏줄이라는 큰 인연으로 만나 공유하게 된 가문의 정서는 우리에겐 특별하다. 보폭 큰 선대 어른에 대한 긍지의 뿌듯함 때문이다. 하여 할 수만 있다면 그 향훈을 널리 퍼뜨리는 것 또한 후손의 무거운 책무다.
망암(望庵) 변 시중 선생은 행주산성 전투 때 자신이 쓴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에 따라 화차를 만든 발명가이자 장수다. 자비로 만든 화차 300량을 권율장군에게 보내어 행주대첩을 이룬, 그런 선조의 위업을 널리 알리고자 변씨 문중에서 마련한 행사다. 참으로 후덕하고 겸손한 접대가 우중(雨中)에 태풍의 예고까지 겹친 여정의 불안함을 일순에 가시게 한다. 화차는 4면 40경의 총구를 내어 적중을 달리면서 일시에 적을 박살낼 수 있는 현대전의 전차와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선생을 모신 봉산서원에서 확인한 갖가지 옛 무기의 위용은 후세인의 눈을 빛나게 했다.
‘이 때 왜적은 10 만. 겨우 2천명의 우리 군사로 맞싸우기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우리 군사 한 명이 최소한 왜적 50을 감당해야한다. 조총을 쏘며 기어오르는 왜적을 향해 화차는 일제히 꽝 소리를 내며 불을 뿜는다. 동이덩이 같은 불이 적의 진중으로 떨어졌다. 불덩이가 우박 쏟아지듯 한다. 왜적은 거의 전멸되어 시체가 산더미 같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왜적은 아홉 번을 덤볐다가 아홉 번을 도망갔다. 우리 군사들은 달아나는 왜적의 목 110급을 베었다. 권율장군은 혼비백산 달아나는 왜적을 화차를 몰아 5리 밖까지 추격하여 총과 칼 투구 등 727건의 전리품을 획득했다. 행궁에서는 행주대첩의 낭보를 듣고 절처봉생(絶處逢生)이라고 활기를 띠었다. 훗날 사가들은 평하길 권율은 실로 좋은 부하를 데리고 있었기에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권율은 만약 변이중의 화차가 없었다면 행주산성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고 변이중을 치하하며 그 공을 돌렸다.’
이런 기록물을 읽으며 부끄러웠다. 살다보면 어느 순간 어딘가 허물어진 옷깃 단정히 여밀 장소가, 때론 큰 어른의 숨결을 숭모할 공간이 아쉬울 때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바쁘게 치닫는 일상은 그런 순간의 아쉬움조차 지나치게 한다. 하긴 나라가 평안하면 백성들은 임금의 존재조차 잊는다던가. 6,25전쟁 발발 올해로 61주년이 된 것도, 임란 당시의 변이중 선생의 활약도, 당신의 화포가 맹위를 떨친 행주대첩도, 강화도가 이토록 치열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도 한동안 망각하고 있었다. 마혁과시(馬革裹屍), 타고나선 말의 가죽에 자신의 시체를 싸서 돌아오리라던 구국(救國)의 맹세는 아득한 옛말이 되었고. 국난의 위기 때 제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위인들의 분루(奮淚) 닮은 빗속의 강행군이어서인가. ‘교동우우(喬桐遇雨)’, 안내 책자에 실린 선생의 시를 읽는 감회가 유별하다.
교동에서 비를 만나다
久雨令人苦 비가 오래 내리니 사람이 괴롭구나
孤城漲百川 외로운 성에는 모든 냇물이 불어났네
急流疑裂地 급히 흐르는 물은 땅을 찢어 놓을 듯
高浪勢滔天 높은 물결 기세는 하늘에 닿을 듯
却恐崩山塚 산의 무덤들이 무너질까 두렵고
還愁沒浦田 갯가의 논들이 잠길까 걱정이네
平生未曾見 평생에 이런 일 보지도 못했는데
災咎在誰邊 재앙과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가
임진왜란, 정묘호란, 신미양요, 운요오호 사건.... . 그 어느 곳보다 외세와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이 강화도다. 하지만 망암 선생의 염려의 시 속 교동 풍정과는 달리 오늘의 강화도는 적요할 만큼 평화롭다. 난중이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어버이를 향한 후회와 그리움으로 얻은 호가 망암(望庵), 효자이자 누구보다 꼿꼿한 성품이셨던 공께서는 후세인의 이런 떠들썩한 행보에 손 내저으실 것이다. 자신의 공이 돈, 혹은 상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욕이라고 했다. 바란다면 그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고개 끄덕여 주면 그만이란다. 어쨌든 미처 모르고 있던 이에 대한 관심으로 상대의 이면을 조심스레 추적해가는 여정이 어찌 뜻 깊지 않을까. 강직하고 올곧던 망암 선생, 만년에는 한가로이 사시며 시골 노인들과 함께 여씨향약을 본받아 예법을 강의하셨단다. 망암선생께서 돌아가시자 원근이 모여와 곡하고 부조로 정성을 다하였다는, 구국의 큰 발자취를 더듬는 나그네의 발길은 숙연하고 숙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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