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준 (주)선도소프트 사장 회고록 2
어린 날들
l 설날
요즘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엔터테인먼트 시설은 그 당시에 하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문화 도구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TV 는 물론 라디오, 시계도 없었다. 내가 시계를 처음 갖게 된 때는 1960년 육군사관학교에 1등으로 합격했다고 해서 큰 아버지께서 사주신 것이 처음이다. 시계도 없으면서 어떻게 학교에 다니며 생활했는지 궁금하다. 그렇지만 지금보다 덜 즐겁거나 덜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즐겁고 기다려진 때가 설날이다. 설날이면 우선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 좋았다. 그리고 운이 좋은 해는 새 고무신에 새 바지 저고리를 얻어 입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어른은 주로 하얀 고무신을 신으시고 아이들은 까만 고무신을 신곤 했다. 그때만 해도 밭에 목화 재배를 많이 했다. 목화밭에 하얗게 목화가 피면 온 산자락이 하얀 꽃밭이 된다. 목화나무에서 목화를 하나씩 따내고 이것을 실 틀에서 실을 뽑았다. 다시 이 실로 베틀에서 베를 짜서 검정색이나 쪽물로 염색과정을 거친다. 작은 방에는 늘 베틀이 있고 어머니께서는 사람을 사시든지 혹은 직접 베를 짜시는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설날이 되면 까망 면으로 만든 바지 저고리를 해 주셨는데 이 때가 일년 중 가장 기다리던 날이었다고 기억된다. 7살 터울로 여동생이 있었는데 내 옷은 해주지 않으셔도 됐지만 여동생 옷을 해주지 않으면 어머니께 땡깡을 놓곤 했다.
양말은 면 양말 아니면 버선을 신었다. 면 양말이라 쉽게 닳아서 헤지기 일수다. 나는 어머니 닮아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지 해어진 양말을 천 조각을 앞 발바닥과 발뒤꿈치 크기로 오려서 재봉틀로 항상 기워 신곤 했다. 설날 세배 후에는 세배 돈이 얼마 걷혔는지 모여서 계산하곤 한 기억이 난다.
설 전날에는 아버지와 남자들은 떡국 떡을 써는 작업을 맡았다. 지금도 그때 먹었던 차가워진 무나물과 개엿이 생각난다. 설날에는 일년에 한번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이다. 동네에서 소를 한 마리 잡아 조금씩 나누어서 쓴다. 떡국에는 보통 굴을 넣고 달걀을 썰어 넣지만 설날에는 소고기가 들어간 떡국을 먹을 수 있다. 겨울철 방 구석에는 고구마 볏집 싸이로가 있었으며 고구마는 겨울에 중요한 간식 내지는 식량이 되었다. 지금도 그때 화롯불이나 부엌 솥 아궁이에서 구워먹던 고구마 생각이 난다.
l 항촌교회
다행스럽게도 항촌에는 일찍부터 교회가 있었다. 처음 몽냉기 산 기슭에 있었는데 그 후에 새로 건축을 해서 항촌마을 뒷산으로 옮겨왔다. 지금은 도암면 소재지인 장촌으로 옮겨와 교인 수, 재정 및 선교활동에서 시골 교회로서는 손색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골 농촌교회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고 다양하다. 종합교육기관으로 역할을 한다. 유치부 초, 중등부에서는 음악, 율동, 연극 및 사회성을 배우게 된다. 남녀 할 것 없이 노인까지 교회생활은 여러 가지 도움이 된다. 생활 상식에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우고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장으로도 쓰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을 듣고 배우게 된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은 성장해서 음악을 전공하게 된 사람이 많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도 사회성과 풍부한 삶의 지혜를 갖춘 사람이 많다.
나는 4~5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 나가기 시작 했다. 해방 직 후 아버지께서는 시골에서 답답하셨던지 일본에 돈을 벌러 가셨단다. 어머니께서는 큰댁 사랑채에 사시면서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다가 큰댁에 할아버지께서 계셨으므로 시집살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늘 차별대우를 받으셨다고 불만을 토로하시곤 했다. 이즘 월어리 당숙모로부터 항촌교회로 전도를 받으셨던 것이다. 월어리 아주머니는 큰 큰댁의 주인으로서 하얀 테의 안경을 쓰시고 인자하신 인상에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인테리 여성의 이미지를 풍기신 분이다. 어머니께서는 신앙생활이 없으셨으면 살아 남기 힘드셨을 게 아닌가 싶다. 주일 예배는 물론이려니와 수요예배 새벽기도 또한 때때로 금식기도를 하신다고 도암 근교 산에 가셔서 며칠씩 지내시곤 하셨다. 내가 좋아하는 찬송가도 어머니가 젊었을 때 자주 부르셨던 노래들이다. 91세 이시지만 지금도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시느라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신다. 우리들에게 교훈하실 때는 항상 성경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신다. 얼마 전에는 교회에서 성경 암송대회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일등을 했다고 좋아하셨다. 며느리들은 어머니 머리를 닮아서 자식들이 머리가 좋을 거라는 데는 토를 달지 않았다. 나는 원래 음악이나 연극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교회 찬양대에서 찬송가 연습도 하고 X-Mas 때 연극도 했다. 한번은 내가 집 나간 탕자역을 맡았으나 별로 잘 한 것 같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X-Mas 때면 새벽에 등불을 들고 X-Mas 캐롤(carol)을 부르면서 모든 교인 집을 방문한 후 마지막에 삼수골 원순이 집에서 따끈따끈한 새알 팥죽을 먹는 것이다. 그때 먹었던 동지 팥죽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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