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를 따라오느냐고 묻질 않는가?”
거듭 재촉을 받고서야 나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합장을 했다.
“탱화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호, 그래애?”
해월 노화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부친이 호봉(虎峯), 그 분이렷다?”
호봉은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 집에서 얼굴을 마주쳤는데도 확인하듯 묻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호봉한테 배우지 왜 내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말이 나오자 잔뜩 화난 목소리로 대들 듯이 따졌다.
“어떻게 아버지한테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알고 계시다시피 아버지는 귀가 멀어서 말씀을 듣지 못하시고, 그러다보니 말씀 한 마디도 못하신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공부하는 데 말이 필요할까? 나도 스승에게 배울 때 등 너머로 배웠는걸. 내가 가르쳐 달라고 하면 스승님은 알아서 배우는 것이지 일일이 가르쳐야만 배우느냐고 꾸중까지 하셨지.”
해월 노화사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그보다도 아버지는 제가 탱화 그리는 일을 싫어하십니다. 아니, 어머니 때문에 더욱 그러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지금까지 결사적으로 반대를 해 오셨으니까요.”
내 말에 해월 노화사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나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예전엔 아버지가 싫었지요. 지금껏 커오면서 아버지란 콤플렉스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태고종 종정이셨던 송만암(宋蔓庵) 스님의 손자뻘이 되시는데, 그 같은 인연 때문에 아홉 살 되던 해부터 절에서 자라셨지요. 양친 모두 잃은 터라 천애고아이자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불구자인 아버지를 석초 스님이란 분이 탱화를 하나하나 가르치기 시작해 오늘 날 금어로 만드셨다 들었습니다. 절에서 20여년을 보낸 아버지는 서른일곱 살이 되던 해에 가까이 지내는 노스님 한 분이 절벽에서 그만 발을 헛디뎌 숨을 거두는 모습을 목격하셨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나면 시신을 거두어 줄 자식 하나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20년도 더 나이 차이가 나는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는 한평생 식솔을 위해 어느 하루 쉬는 일이 없이 꾸준히 탱화를 그려오셨지요. 탱화를 그려서 어찌 큰돈을 만질 수가 있었겠습니까만, 워낙 부지런한 분이다 보니 헐벗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아아, 그런데 왜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끄러움 때문이었을 거예요. 누구네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말씀 한마디 해줄 수 있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와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겠다니······.”
이미 격앙된 내가 하소연하듯이 말을 토해내자 해월 노화사가 염주를 천천히 굴리면서 자상하게 말했다.
“젊은이의 부친이야말로, 그러니까 호봉은 단순한 금어가 아니지. 관음(觀音)과 보현(普賢)의 보살정신이 살아있는 불보살(佛菩薩)이라구. 젊은이 말대로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고통을 불심으로 이겨내서 인간문화재까지 되셨지마는, 어쨌든 호봉의 탱화는 참 좋아. 아암, 좋고 말구. 나도 40년 간 탱화를 그려왔지만 호봉이 한 수 위라고나 할까. 도무지 세필만큼은 따라가지를 못하겠어. 그러니 다시 말하지만 부친에게 배우는 게 좋을 것이야.”
아버지 호봉을 치켜세우는 해월 노화사의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탱화는 안목 있는 스님들로부터 찬탄을 받아오고 있었고, 넓게는 불교계로부터 대단한 금어라고 인정을 받고 있는 터였다. 부산 동래사, 부안 내소사, 광주 원효사, 제주 황룡사 등 아버지 대표 작품들은 이름 있는 금어들조차 감동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저는 싫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어머니께서 한사코 싫어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절 인도해 주십시오.”
나는 떼를 쓰듯이 애원했다.
“······탱화가 어찌 말로 공부하는 일이던가? 먼저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아야 돼. 그리고 부처님을 받드는 마음이 하늘에 닿아야만 되는 법. 젊은이의 뜻이 정 그렇다면 머리부터 깎아야지.”
“아니, 승려가 되라구요?”
나는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출가를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상과 인연을 끊는 일이고, 그래서 젊으나 젊은 청춘을 잿빛 승복에 친친 감아버리는 일이 아닌가. 반드시 승려가 되어야만 탱화를 그릴 수 있다는 해월 노화사의 말이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아서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갑자기 해월 노화사의 목소리가 축축해지면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오늘 날, 신(信)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으면서 찍어대듯 탱화를 그려대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래, 젊은이 역시 붓장난이나 하는 환쟁이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부처님의 생음(生音)이 들리는 탱화를 그리고 싶은가?”
“아니 그림도 말을 다 하나요?”
“그럼, 하고말고. 그래서 부처님을 그리면 부처님 말씀이, 아미타부처님을 그리면 아마타부처님 말씀이, 관세음보살님을 그리면 관세음보살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그런 탱화를 그려야지.”
해월 노화사는 간곡히 출가할 것을 권했고, 기왕 금어가 되려고 한다면 출가 이상 더 좋은 길이 없음을 강조했다.
“출가를 하지 않아도 탱화를 그릴 수는 있지. 하지만, 그리면 그릴수록 더 어려워지는 게 탱화여서 종내는 신심(信心)에 의지하게 되어 있어. 젊은이 부친인 호봉도 비록 재가승이지만 탱화를 그리기 열흘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밤마다 부처의 꿈을 꾸기 위해 마음까지 청결히 하질 않는가? 옛날 어느 금어는 오른손이 부처님을 그리는 손이었다 하여 혹여 다른 일에 사용하면 불경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왼손만 사용한 분도 계셨느니. 그러므로 신심이 없으면 결국 한계가 오기 마련이지. 당장 큰절에 가서 머리를 깎고 와.”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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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월 노화사의 말대로 산 속의 절을 찾아갔다.
원주 스님이 방 하나를 주면서 입산을 할 것인지 그냥 돌아갈 것인지 일주일 동안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서 공양간 물을 긷고 쌀을 씻었다. 이른바 행자생활이 시작된 거였다.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짧은 세월도 아니고 그렇다고 긴 세월도 아닌 그 세월 동안 나도 모르게 각 사찰의 많은 불교미술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다.
사찰에는 부처님의 일대기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그 분의 일생을 담은 그림들이 석탑에 조각되었는가 하면 벽화로도 표현되어 있었고, 해인사 대적광전과 범어사 팔상전 등에는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사찰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장승과 사자, 사천왕이 있었는데, 사천왕 발밑에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말해주는 생령좌(生靈座)가 있었다. 삼보를 옹호하고 불자를 지키는 신중은 모습은 노기와 분노의 형상이었다. 온 몸은 화염에 뒤덮여 있는 가운데 위엄과 용맹의 신중은 누가보아도 온 몸이 떨리는 모습이었다.
사찰에는 사홍서원을 지키는 근육질의 힘센 두 남자도 있었고, 두 날개를 펴면 360만 리나 된다는 인도신화 속의 조류 가루라도 보였다.
사찰에는 극락정토에 살면서 아름다운 음성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가릉빈가가 있었고, 부처님의 으뜸 제자 가섭 존자와 부처님 10대 제중 하나인 아난존자도 보였다.
사찰에는 토끼며 용이며 호랑이며 원숭이의 모습도 있었는데,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그림마다 근엄하면서도 해학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상이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 쇠붙이나 흙으로 만들어진 불상, 돌로 만들어진 불상이었는데, 불상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모양을 그린 탱화도 많았는데 스님들과 불자들은 그 불상과 탱화에 예배를 올리고 있었다.
부처님의 세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광대무변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천상과 지옥,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일월(日月)의 세계를 한 세계라고 하는데, 이것이 1.000개이면 중천세계(中千世界)가 되고, 중천세계가1.000개 모이면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되며, 다시 대천세계를 세 번 곱하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였다. 바로 이 삼천대천세계가 한 부처님이 교화를 담당할 세계의 단위였다.
부처님의 몸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으로 나누어졌다. 법신은 우주의 진리 그 자체이고 인격화된 진리법칙을 나타내는데, 비로자나불이 여기에 속했다. 보신은 바라밀의 수행을 통해 중생구원을 서원해서 그 결과로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부처님을 말하는데,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이나 중생들의 정신적 육체적 병고를 치료해주는 약사여래가 여기에 속했다. 응신과 화신은 2.600년 전 인도 카필라국에서 태어난 석가모니부처님을 가리키는데, 응신은 부처님의 육체적 덕목인 32상 80종호 등을 여법하게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그와 반면에 화신은 부처님이 중생 ‧ 아귀 ‧ 축생 등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을 내보일 수 있었다. 화신의 부처님과 같은 관세음보살은 33응신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는데, 부처님의 몸이 되었다가 제석천의 모습이 되었다가 벽지불의 모습이 되었다가 아수라의 몸이 되었다가 동남동녀의 몸이 되는 등 자유롭게 나투셨다. 지장보살 또한 중생교화가 바로 수행이므로 화신의 부처님으로 삼계육도를 다니며 중생을 구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덕목을 지녔는데 여기에서 정신적 덕목은 부처님만이 지닌 18불공법(十八不共法)의 특징이 있고, 육체적 덕목은 32상 80종호가 있었다.
열 가지 힘이 있고, 어떤 상태에서도 두려움이 없고 자심감이 있으며, 사람들이 부처님을 지극 정성으로 신봉하거나 말거나 항상 잔잔한 고요와 지혜를 유지한다는 것이 18불공법, 그러니까 열여덟 가지 특징적 덕목이었다. 그리고 육체적 덕목을 나타내는 것이 32상 80종호였다.
32상 80종호.
서면 양팔의 길이가 무릎을 넘고, 생식기가 말의 것과 같아서 감추어져 있으며, 신체의 균형이 맞고 단정하며, 치아가 희고 고르고 최상의 미각을 갖고 있으며, 혀는 얇고 연하고 길어서 입 밖으로 내밀면 얼굴은 물론 이마의 머리카락까지 덮으며, 미간에는 흰 털이 나 있는데, 이것을 펴면 다섯 자가 되는 것들을 일컬어 32상이었다.
걸음걸이가 엄숙하여 사자와 같고, 또한 걸음걸이가 조용하여 소의 걸음과 같으며, 남근의 무늬가 묘하고 위세가 구족하여 원만하고 청정하며, 배가 네모지고 반듯하여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았고, 손금이 깊고 곧고 분명하여 끊어져 있지 않으며, 입술이 붉고 윤기가 있고, 목소리가 깊고 웅장하여 위엄이 있는데 그 소리가 사자와 같고, 코가 높고 곧아서 들창코가 아니며, 이가 깨끗하고 반듯하고 희며, 눈이 맑고 깨끗하며, 흰자위가 분명하고, 눈썹이 훤칠하고 빛나고 윤택하여 초승달과 같고, 귀가 두껍고 크고 길고 가지런하여 아무런 흠이 없고, 몸의 윗부분이 원만하여 사자의 위엄을 갖추었고, 키가 크고 단정하여 얼굴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듯 하고, 한 말소리로 법을 말씀하시되 여러 중생들이 각자의 근기에 따라 알아들으니 이것이 80종호였다.
20상이나 15상만 잘 그려도 대수확이니라.
해월 노화사는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의 32상에서 그 절반만 잘 그려도 대단히 잘 그린 작품이라는 것이었는데, 막상 한 장의 종이에 부처님의 모습을 담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5상은커녕 5상도 제대로 그려지질 않는 거였다. 그림을 시작하면서부터 십왕초, 보살초, 여래초, 천왕초의 초화를 제각기 1천 장씩 그려보았으므로 바로 그 초화에 채색만 하면 완성될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것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 한 발 떼는 마음이거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다.
나는 그 뭔가를 잡기 위해 선방에도 기웃거려 보았다.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며, 셋째는 큰 의심이었다. 만약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큰 신심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결심이요, 확신이었다. 큰 분심은 자신이 여지껏 수행과 정진을 안일하게 하고 있다는 점을 분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큰 의심은 내가 누구인가의 화두에 깊이 빠져들어 의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방에서의 용맹정진은 죽을 맛이었다. 나는 분명히 졸지 않았는데도 어느 틈에 장군죽비는 내 어깻죽지를 사정없이 내리쳤고, 주먹질까지 서슴지 않았다. 화두가 잘 들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섬세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다가 화두를 놓아버렸을 때는 다시 붙잡기가 힘들었다. 다른 생각으로 옮겨가지 말고 ‘이뭣고’를 붙들고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놈은 무엇인가, 뭐라 대답해야 하는가, 언설이 끊어진 자리에서 화두와 씨름을 했다.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될 때까지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가 점차 몸이 적응하면서부터는 잠이 오질 않았고 반수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공양 시간이 빼놓고는 시간이 정지되는 세계였다.
“절에서는 이판승이 있고 사판승이 있질 않습니까. 제각기 자신과 맞는 근기에 따라 수행을 해야겠지요. 법능 수좌는 아무래도 붓만 잡고 살아야지 이런 선방은 체질에 전혀 맞질 않는 것 같습니다.”
선방 생활을 몹시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늘 미소로만 대하던 법인 스님이 걸망을 짊어지고 하산하는 길에서 내게 말했다. 생사를 이겨보겠다고 다섯 손가락을 부처님께 소신공양한 대단한 스님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자기만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입산한 게 아닐까요?”
법인 스님의 말은 진정한 죽비소리였다. 역시 내게 있어서 진정한 화두는 부처님을 그리고 또 부처님의 세계를 그리는 일이었다. 하안거나 동안거 때 선방을 찾을 것이 아니라 붓을 잡고 지내는 것이 진정한 삶이요, 화도(畵道)임을 일러준 스님이었다.
안거 때면 주로 선방을 찾았던 나는 절에서 그림만 그렸다. 그림을 그리다가 붓이 잘 잡혀지지 않을 때면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는 관음전엘 곧잘 들어갔다. 금방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절로 굳어진 손목이 풀리곤 했다. 그런데 절에서 지내려면 누구나 한 가지 소임을 갖고 지내야만 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주지 스님의 특별한 배려로 나는 열외였다. 새벽예불과 저녁예불만 참석하면 그만이었는데, 주지 스님조차 빠지지 않는 아침 청소며 울력 같은 것도 열외였다. 종일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이 없었고 간섭하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저 방 안에 틀어 박혀 탱화를 그리거나 또는 그 같은 일을 위해 잠시 절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다 돌아오곤 했다. 국외자(局外者)처럼 지냈으므로 항상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으로 나는 절을 떠나고 말았다. 묵고 있던 절을 비우고 마곡사(麻谷寺)에서 한 계절 여러 화공들과 함께 대웅전 단청불사를 할 때였다.
“나랑 바람이나 쐬고 올까요?”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모처럼 차분하게 쉬고 있는데 요사채 맨 끝 방에서 기거하는 박거사(居士)가 모처럼 말을 걸어왔다. 조그만 목불상(木佛像)을 조각하는가 하면 선묵화(禪墨畵)를 그리기도 하고 풍수에 깊은 조예가 있는 운상거인(雲上居人)이었다. 그러다보니 명당자리를 봐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럴 때면 패철(佩鐵)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절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곤 하였다.
하지만 나와는 별로 대화가 없는 편이었다. 달포 남짓 다섯 사람의 화공들과 더불어 대웅전 단청불사를 하는 중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래서 겨우 공양을 할 때나 경내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나 하고 지내는 처지였다.
“무슨 바람을 쐬자고 그러십니까?”
“바람은 바람일 뿐, 바람에게도 이름이 있나요? 선암사(仙巖寺)나 한 번 다녀옵시다. 마침 볼 일도 있고 하니······.”
“좋습니다.”
일주일 동안 딱 하루 쉬는 날에 때를 맞추어 그는 말을 걸어온 것인데 내심 은근히 반가웠다. 산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어쨌든 새장 속을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순천 선암사에 도착해서였다. 박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팔상전을 둘러본 후 지장전에 들어가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지장보살도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렇듯 유려한 필치로 그렸으며 과연 저 탱화를 그린 이는 어떤 화사였을까, 잠시 감동에 빠져 있을 때 지장보살상 곁에서 우렁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지장보살이니라······.”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지장보살님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오른손에 보주(寶珠). 왼손에 석장(錫杖)을 들고 연화좌(蓮花坐) 위에서 중생을 내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지장보살이니라. 그대는 내게 잘 왔도다······!”
거듭 지장보살의 음성이 불덩이처럼 머리 위로 떨어졌다. 분명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장보살이 아니라 박거사의 목소리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온 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지, 장, 보, 살, 님!”
순간, 나는 무너지듯 지장보살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지장보살의 친견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친견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무치고 사무쳐서, 또 간절하고 간절했을 때 뵐 수 있다던가. 붓을 잡으면서부터 내가 그리는 석가모니불 미륵존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대일여래 약사여래 같은 부처님을 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그릴 때에도 단 한 번만이라도 뵐 수 있다면 일생일대의 광영이자 사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나는 지장보살로서 너에게 숙의(宿意)를 말하노니 너는 장차 해동(海東)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인 불모가 될 것인즉, 더욱 용맹정진토록 하라······.”
만일 한 사람의 중생이라도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誓願)을 세운 지장보살. 그래서 비증보살(悲增菩薩)이기도 하는 지장보살께서 내게 가피(加被)를 내리시다니······.
나는 그대로 엎드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어느 틈에 내 두 뺨에서는 뜨거운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아. 나는 반드시 해낼 수가 있겠구나. 그리하여 끝내는 부처의 얼굴을 그리고 그려서 성불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온 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산문 밖 계곡으로 달려 나갔다. 둥싯둥싯 솟은 바위틈으로 맑고 시원한 청류가 흐르고 있었다. 두 발이 둥둥 구름 위를 걷는 듯 얼얼한 기분이었다. 사방에서 만다라의 아름다운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환희였다. 법열이었다. 제천선신(諸天善神)들이 오색운(五色雲)을 타고 내려와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질녘이 될 때까지 계곡을 오르내리며 한껏 달뜬 기분을 맛보다가 다음 날 아침, 주지 스님에게 어제 일어났던 일을 은근슬쩍 자랑삼아 끄집어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지 스님의 표정이 대번에 험상스러워지더니 여지없이 공박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그 늙은이가 노망을 했군, 노망을 했어. 제 앞길도 추스르지 못한 주제에······.”
낙심천만이었다.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 지장보살님께서······.”
“글쎄, 얼풍수 반풍수 주제에 신도님들을 현혹시키면서 지내더니 아예 이제는 지장보살님 흉내까지 내다니, 미쳐도 한참 미친 게 아니요?”
주지 스님의 말은 뜻밖이었다.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아니, 그 다음 날도 그랬고, 그 다음다음날도 그랬다. 도무지 붓끝이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는 것이었다. 대웅전 단청불사를 함께 하는 다른 화공들이 눈치챌까봐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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