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령화시대(47회)
성젼면 신풍마을 6반
정주언(91)할아버지, 박병덕(82)할머니 부부
정주언 할아버지는 6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소학교를 다니던 중 돈이 없어 공부를 그만 두었다.
“그 당시 800원인가 들었는디 그 돈이 없응게 학교에 못 댕기고 만것이재.”
정할어버지가 26살, 박할머니가 17살에 혼인을 했다. 박할머니 친정에서는 딸이 빨리 죽는 사주라 해서 나이 차이가 많은 곳을 찾아 혼인을 시켰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군에서 근무했던 정할아버지는 남양주에까지 파견근무를 하기도 했다. 일제시대 막바지에 이르러 젊은 남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징용대상이 되었다. 그때 군사회과에 근무했던 정할아버지는 징용이 아닌 징용대상자를 관리하는 입장에서 남양주에 가게 되었다.
“가서 보니까 맨 집짓고 땅 고르고 그런 일인디, 그 반장으로 조께 있었는디 못있겄더만.”
남양주의 노동자들은 거의가 조선인 징용자들이었다. 조선인 징용자들이 하는 일은 길을 닦고 집을 짓고 하는 일들이었다. 눈뜨면 노동으로 시작해서 노동으로 하루를 마감하기 때문에 희망이라고는 전혀 있을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정할아버지는 징용자들을 관리하는 입장이었으니 그나마 나은 생활이었다. 결국 남양주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몸이 안 좋아지게 된 정할아버지는 빨리 돌아오기 위해 많은 편지를 썼고 그 결과 고국에 빨리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일가 처남 벌이었던 차부진씨의 힘으로 남양주에서 빨리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멀지만 그런 빽이라도 있었응께 조께 있다 나왔지, 거가 있을 때가 못 돼아요. 그러니까 한국인 징용자들이 노동일을 혀서 많이 만들어놨다고 봐야재.”
해방이 된 후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이장 일을 맡아보던 정할아버지는 6,25전쟁이 일어나 또한번 혹독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인공 때 몇 번이나 죽을라다 살아났재.”
사상이라는 것으로 편을 갈라 네편 내편 하며, 편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쏘아 죽이는 시절이었다. 이장을 했기 때문에 정할아버지 집은 경찰 본부가 되어 버렸다. 경찰이 점령하고 있을 때는 온통 경찰의 초소가 되어 움직여야만했고 경찰이 밀려 빨치산이 점령하게 되면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의 도움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기가 일쑤였다.
“몇 사람이 툭탁툭탁 담을 넘어옵디다. 그러다니 총 들고 배가 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헙디다. 쌀을 준 게로 갖고 산으로 가붑디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뒤 박할머니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남편도 어디로 숨어버리고 혼자 남아 반란군이 총을 겨누고 달라는 쌀을 주었을 뿐인데도 박할머니는 끌려가 손바닥을 몽둥이로 얻어맞았다.
“손에 가락지를 끼고 있었는디 어찌 때렸던지 손이 퉁퉁 부어부렀어요. 가락지 낀 자리가 어찌도 아프던지······가락지가 원망 스럽디다.”
몽둥이는 넙덕지와 손바닥을 사정없이 후려쳤지만 박할머니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쌀 한 되 준 일 뿐이었다. 그 밖에는 더 이상 할 말도 없었지만 살 한 되 값만큼 몽둥이를 받은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경찰이 밀려가고 공산당이 마을을 점령하면 집에 남아 있던 살림살이는 모조리 싹쓸이 되다시피 했다. 그뿐 아니라 경찰에 협조했다는 일로 두 손 뒤로 묶여 월하리까지 끌려갔다가 살아오기도 했다. 정할아버지 또한 죽을 뻔한 고비가 여러번이었다.
“죽을란갑다하고 끌려간디 중간에 풀어줍디다. 공산당일을 했던 사람이지만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사람인디. 내 마음을 잘 안다고 함시로 상사에게 몇마디 허더니 풀어줘서 돌아왔재.”
사람이 살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길까.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는 질문일지 모르지만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은 어르신들은 늘 죽음을 직면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 그 외에도 인생의 또 다른 개인적인 즐거움이 왜 없으랴.
“저 아래에 영암에서 왔다는 홀엄씨가 하나 살고 있었는디, 새 색씨때 홀엄씨가 되아 장사로 돌아다닌 여자였는갑디다. 그란디 숙직허고 온다는 사람이 그 집에 가곤 했었는가벼, 이웃동네 남자 한 분이 와서 알려주더랑게.”
박할머니는 군복에 검은 물을 들여서 만든 사보리 잠바를 남편에게 입혀주었다. 옷이 귀하던 그 시절에 사보리잠바를 입으면 굉장히 멋있어 보였기 때문에 정성을 들여 검은물을 들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보리잠바가 자신을 고생시키더라며 웃는 박할머니.
“시아버지가 애들 셋 데리고 나가라고 합디다. 아들이 바람 핀 꼴을 못보겄다고 말여요.”
박할머니는 영암에서 왔다는 홀엄씨가 잘생긴여자라고 말했다가 얼른 말을 바꾼다.
“얼굴도 이삐도 안헙디다.’”
그 모두가 이제는 옛일일까, 박할머니는 남편의 한복을 반듯하게 입혀주며 거울을 갖다 대준다. 어려운 살림에 5남2녀를 키우며 황혼까지 밝은 표정을 잃지 않은 두 분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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