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을 떠나 선천군에 묵다(發龍泉冒雨投宿宣川郡)
김현임(수필가)
때 이른 더위다. 이럴 땐 저 북녘의 지명을 읊조리면 잠시 더위가 잊혀진다. 삭풍 몰아치는 변방에 먹 냄새 풍기는 사령장을 받고 이제 막 부임지로 떠나는 초임 벼슬아치의 심경의 상상은 더없이 소슬하지 않은가. 바람 한 점 없는 初夏의 더위에 백호 임제 선생의 시집을 당겨 읽는 나름대로의 피서법이다.
용천을 떠나 선천군에 묵다(發龍泉冒雨投宿宣川郡)
知心有短桐 應俗無長策
嘆息休明人 常爲鞍馬客
我有追風騎 胡驄玉面馬
塵沙靜四關 誰識千金價
從事詩書府 勞生客路中
天關如可叩 直欲御冷風
古道日蕭索 知音那可逢
莫如拂衣去 舊壑巢雲松
내 마음 알아주는 건 거문고 하나뿐/세속을 맞출 재주가 없네
아, 밝은 조정에서 태어난 몸이/언제나 말안장 앉아 나그네 노릇
추풍 천리마를 내 가졌으니/옥처럼 하얀 오랑캐 말일세
사방 국경 먼지 없이 고요하나/천금 값어치를 그 누가 알아주랴
시서의 관청에 종사하던 몸이/객지 먼 길로 고생하며 다니네
하늘 문 두드려서 갈 수만 있다면/산들바람 타고서 곧장 올라가고파
옛 도는 나날이 시들어가니/날 알아줄 사람 어디서 만나랴
옷자락 털고 훌쩍 떠나서/구름과 소나무 사이 내 고향 가 살리라
원 제목이 길다. ‘용천을 떠나 비를 무릅쓰고 선천군에 가서 묵다, 가는 도중 ‘빗속에서 채찍질하며 가는데 관문이라 만나는 사람도 없구나’,라는 글귀를 읊고, 운자를 나눠 5언 절구 10수를 짓다’라는 무려 두 줄 넘는 長題의 시다. 시 구절구절에서 당시 누구라도 붙잡고 당신의 답답증을 하소연하고픈 백호선생의 쓸쓸한 소회를 읽는다. 총 9연에 이르는 長詩지만 3연과 5연, 그리고 7, 8연이 수록되지 않았다. 본시 외롬 타는 이의 넋두리는 끝이 없지 않던가. 무려 네 연이 삭제되어 전함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다.
첫 연의 短桐, 그러니까 짧은 오동나무는 한나라 채옹이 焦尾桐, 말 그대로 불에 타다 남은 오동나무로 만들어 소리가 특이했다는 거문고다. 黨同伐異의 세태 속 여타 거문고와 다른 소리를 내는 내 악기의 소리를 알아주는 벗의 귀, 자신을 능히 知音하여주는 동지적 존재가 아쉬운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북송 초기의 시단을 대표하는 걸출한 시인 왕우칭이다. 그가 궁벽한 시골의 낮은 벼슬로 관직을 시작했을 때 벗에게 보낸 편지에서다. 단 몇 푼일지라도 나라의 녹봉을 받는 처지가 황송해 ‘백성을 해치는 좀벌레’가 되었다고 했던가. 다만 공무를 수행하고 조반을 먹는 것 외에는 부임 열흘이 다 지나도록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한 적이 없음이 견디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처음 시작하는 벼슬자리이니 장차 부지런에 힘쓰자. 지위의 높낮음이야 소나무가 물가에 있는 거와 매한가지다 다짐했다. 하지만 ‘그대 그리움 이제야 알겠노라’고 왕우칭 역시 백호 선생처럼 주변에 자신과 말 통하는 벗이 없음을 한탄했다.
내게 바람의 속도와 겨룰 눈부신 터럭의 천리마가 있다한들 그를 알아줄 벗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하여 고독한 이들은 호소한다. 그대여, 부디 내 진심에, 내 흥취에 함께 어우러져 주기를. 몇 이랑 채소밭과 농작물을 가꾸는 농부도 제 튼실한 작물에 감탄하여 주는 이웃의 칭찬 한 마디에 여름 무더위 속 노동의 피로를 잊는다. 한 줄 한 줄 고심하며 글 쓰는 이는 제 글귀를 눈뿐 아니라 가슴으로 읽어주는 독자가 귀하고 귀할 터이고. 한 자락 거문고, 한 줄의 글귀, 한 나절 땀방울 속에 간신히 숨긴 우리네 인생의 신산한 자락 아닌가. 무릇 벗이란 이 가파른 세상에서 기꺼이 나를 천거하여 주는 이라했으니 누구나 제 絃에 반응하는 단 한 상대의 마음 떨림을 고대한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냉혹히 평한 어느 극우언론의 필치도 서늘하다. 진흙 묻은 옷자락 털고 자신이 뛰놀던 유년의 바위가 있는 고향 마을에서 초부로 살고자 하던 분, 하지만 그 소박한 소원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자살을 택한 대통령을 두고 ‘대통령까지 지내신 분도 수틀린다고 자살을 할 수 있다니’란 표현으로 은근히 폄하하며 ‘이 땅의 어린이들이 따라 배울까 걱정’이라는 杞憂의 문장으로 점잖게 포장 맺음을 했다.
‘옛 도는 나날이 시들어간다’는 백호선생님의 싯구, 그 의미를 오래 되새겨 본다. 사라져가는 미덕이 어디 한 둘인가. 죽음조차도 애도치 않는 냉혹한 현실이 눈발 펄펄 날리는 변방의 한파에 비할까. 마땅히 대화 나눌 벗 없어 새벽녘 군내 나는 입에 문 새벽 담배의 씁쓸함. 궁여지책 세상의 知音을 구하며 하늘 문 두드리는 이들의 심정을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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