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어온 길 윤재준 (주)선도소프트 사장 회고록(22회)
에스콘디도 빌리지 (Escondido Village)
샌프란시스코는 눈이 안 오지만 봄 가을에도 바람이 심하고 안개가 끼고 코트와 두꺼운 자켓을 입어야 할 정도로 기후 변화가 심하다. 반면에 산 호제이는 사막 기후라 여름에는 덥다. 팰러앨토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40분 산호제이에서 20분 거리에 있지만 기후는 사뭇 다르다. 겨울에만 비가 조금 오고 그 외에는 일년 내내 청명하고 상쾌하다. 여름에는 조금 덥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다. 바다가 한 시간 거리에 있으므로 공기가 깨끗하고 밤에는 에어컨 없이 지낼 수 있다.
19세기 중반 미 상원의원 이였고 재벌이였던 스탠포드 (Stanford) 가 여기에 자리를 잡기로 하고 많은 땅을 사들인 모양이다. 그리고 유럽 여행 중 자기의 유일한 아들이 17세에 병으로 죽자 친아들 대신 더 많은 아들들을 만들겠다고 여기에 스탠포드 대학 (Stanford University) 을 세운 것이다. 그 많은 땅을 100년 동안은 팔지 말라고 해서 HP 회사, 스탠포드 쇼핑센터 (Stanford Shopping Center) 를 포함한 그 일대가 아직도 스탠포드 대학 소유로 되여 있다. 대학 캠퍼스 (campus) 도 워낙 넓기 때문에 강의 시간을 옮겨 다니려면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한다. 본 건물은 붉은 게와 지붕에 스페인 (Spain) 양식의 건물이다. 싱글들이 지내는 기숙사 말고도 기혼자용 아파트형 주택들이 들어선 마을이 있다. 여기를 에스콘디도 빌리지라 한다. 빌리지 안에는 건물 사이사이 넓은 잔디밭이 있고 통과하는 자동차가 없어 애들이 뛰어 놀면서 자라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학교에 등록을 하자마자 나는 가족이 있으므로 에스콘디도 빌리지에 방을 얻었다. 에스콘디도 빌리지 안에는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있기 때문에 새 학기가 시작 되였으므로 은영이는 오자마자 유치원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애들이라 영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래서 은영이는 캐시 (Kathleen) 라 부르고 덕규는 리차드 (Richard) 라 불렀다. 내가 마 대학에 있을 때 내 지도 교수가 Richard Gaggioli 이고 학과 비서는 친절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이름이 캐시 (Kathy) 였다. 딸 캐시는 환경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잘 적응해 나갔다. 화장실에 갈 때는 손짓발짓 해서 해결하곤 했다. 문제는 아들 리차드였다. 누나가 학교에 갈려고 하면 자기도 누나를 따라가겠다고 야단이었다. 할 수 없이 캐시가 공부하는 동안에 학교에 가서 혼자 기다렸다. 그럴 때면 캐시는 쉬는 시간에는 빨리 동생에게 와 동생을 안심시키곤 했다.
아내는 밤에 애들을 모아 놓고 그 동안 못 보았던 애들 재롱 떠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리차드에게 노래를 시키면 침대 위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 무슨 말을 하여야 할지 오! 토요일 밤 토요일 밤에 그녀를 만나리라’ 고 한국에서 배운 노래를 불렀다. 또 노래를 시키면 레퍼토리가 그것뿐이라서 뛰면서 같은 노래를 거기까지 반복하곤 했다. 캐시는 유치원 일년을 마치고 초등학교에 들어와서는 모든 일에 자기가 솔선해서 관여하는 ‘mom’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l 팰러 앨토 (Palo Alto) 생활
아내는 스탠포드에 오자마자 다시 직장을 찾으러 다녔다. 나와 캐시는 학교에 가고 리차드는 혼자 집에 둘 수가 없어서 차에 태우고 다녔다. 애를 혼자 차에 두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므로 남의 눈에 뜨지 않도록 뒷자석에 엎드려 있으라고 타이르고 면접 및 키펀치 실습까지 한 시간 넘게 시험을 보고 나오니 아직도 애가 뒷자석에 엎드려 있었다. 캘리포니아 햇빛은 따가워서 금방 차 안에 온도가 급상승한다. 더구나 미련하게도 차문을 꼭꼭 닫아 두었으니 애가 질식해서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 대신 온 몸이 땀에 다 젖었다. 이 일로 아내는 지금도 리차드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 하곤 한다. 다행히 아내는 해운보험 회사인 아고넛 (Argonaut) 보험 회사에 직장을 구했다. 아내가 직장에 갈 때면 리차드는 베이비시터 (baby-sitter) 에게 맡겼다.
미국 생활은 바쁘고 더욱 학생 생활은 고달팠다. 아내를 직장에 데려다 주고 리차드를 베이비시터에 맡기고 나는 학교에 갔다. 캐시가 걸어서 학교에 다니는 게 다행이었다. 생활이 안정되는가 싶더니 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내 직장 매니저가 아내에게 관심을 갖고 귀찮게 굴기 시작한 것이다. 직장에만 가면 먼 발치에서도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직장을 옮기기로 했다. 마침 스탠포드 대학 연구소인 SLAC (Stanford Linear Accelerator Center) 에서 데이터 처리하는 일자리가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키펀치는 손가락이 아파 어려움이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SLAC 은 스탠포드 대학 뒤 광활한 지역에 자리잡은 세계에 몇 안 되는 입자 가속기 연구소다. 아내가 키펀치 하면서 숫자를 많이 다루어 보았기 때문에 취업이 된 모양이다. SLAC 은 근무 환경과 대우도 좋을 뿐 아니라 연구원들이 대부분 물리학 박사 소지자 들이라 신사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온 가족이 처음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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