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예의 명가 심수관가(沈壽官家)
정유재란 당시 끌려간 도공, 4백년 가업 이어
아직도 한국 성 고집 가슴속 응어리 불가마에서 ‘활활’
강진의 청자축제에 초대 전시된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코너에서 심수관을 만나는 감회는 그야말로 특별했다. 1598년 일본에 끌려와 박평의(朴平意 )와 함께 사쓰마도기를 연 심당길(沈當吉)의 14대 손 심수관의 작품이다. 그는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한 때 정치에 뜻을 두었지만 국회의원 비서로 일하던 중 부친의 병으로 낙향, 도예수업을 쌓았다.
대대로 선대 가문의 이름을 계승하는 전통에 따라 1946년 13대 심수관이 죽자 14대 심수관이라는 선대의 이름을 습명(襲名), 도자기 제작에 온 힘을 바쳐 일본 도예계를 이끌었다. 특히 심수관가는 한국성을 끝까지 고집하며 400여 년 간 가업을 이어 오고 있다. 그런 공로를 인정 받아 1989년 한국 명예총영사가 되었다.
1959년 생인 그는 아버지가 다녔던 와세다 대학을 1983년 졸업하고 그 2년 후 경도부립도공고등기술전문학교(京都府立陶工技術專門學校)를 수료한 뒤 이탈리아 국립미술도예학교를 마친다. 이어 1990년에는 한국으로 와 경기도 여주의 한 토기공장에서 1년 동안 김칫독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등 도공으로서의 기술과 이론을 철저히 닦았다. 혹독한 수련 기간을 거친 후에도 아버지 밑에서 흙 개고 장작불을 피우는 등 밑바닥 일부터 새로 시작했다. 그로부터 9년 후 마침내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희한하게도 1대부터 14대에 이르도록 독자를 생산한 심수관 집안, 그 역시 외아들로 태어나 중고등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처럼 여행이나 캠핑 등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휴가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엄격한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단 한 번도 그런 기회를 가진 적도 없었다. 대신 흙과 씨름하며 보낸 세월, 본인 스스로도 이 일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인지 아니면 사백년 이어 온 가업을 버릴 수 없어서인지 모호하단다. 자신의 장래는 어릴 때부터 이미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되어 있었으며 마음대로 벗을 수 없는 옷과 같은 질긴 인연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조선도공의 일본 납치는 조선에 군량미를 실어 보냈던 군량선이 빈 배로 돌아갈 경우 배가 가벼우 균형을 잃고 침몰할 가능성에 돌 대신 쓸모 있는 사람을 대신해 싣자는 궁여지책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전설이 가고시마현 일대에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상류사회의 조선도자기 선호풍토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기 선호취향이 조선도공납치의 주요 요인이었다는 설이 훨씬 지배적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황족을 비롯하여 번주(藩主)들이나 상급무사, 거상(巨商) 등 상류층에는 조선도자기가 보물로 인식될 정도였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터까지 다기를 휴대하여 차를 즐겼고 어느 높은 중신보다 그와 무슨 말이든 나눌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일본의 다도 완성자인 센노리큐였을 정도였으니.
가끔 다기(茶器)가 공을 세운 무사에게 포상품으로 수여되기도 했다. 심지어 귀한 다기는 대규모 영지하고 맞바꿀만한 가치를 지니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 사쓰마 번주인 요시히로가 전라도 남원으로 쳐들어 간 것도 실은 조선도공을 잡아가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정유재란에서 패한 일본군은 1598년 12월 약 80명의 조선인을 3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탈출했다. 이 중 40여 명이 도공, 나머지는 측량, 양봉, 방충제 제조 등 도자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 첫 번째 배가 가고시마 만에 20여 명을 싣고 도착했으나 사쓰마현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여 처음엔 도자기 제작을 위한 가마조차 열지 못하였다. 무사나 상인 집으로 분산되어 끌려가 노비처럼 혹사 당하고 생명만을 겨우 부지, 7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일부 도공들이 마을 한 귀퉁이에 가마를 만들어 힘겨운 자립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10여 명을 태운 두 번째 배는 현재 사쓰마야끼가 있는 미야마 마을에서 가까운 히오기군의 이이찌기 마을 해변에 표착하였다. 이 배에 탄 조선인 중에는 뒷날 사쓰마관요(官窯)의 시조로 크게 성공한 김해(金海)라는 이름을 가진 도공이 있었다. 김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던 번주의 보호 아래 꽤 번창을 하였다. 하지만 명치유신 직전인 1862년 사쓰마번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휘말려 완전히 맥이 끊어져 후손의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세 번째 배는 40여 명의 도공을 태우고 표류, 생사의 고개를 넘나들다가 가고시마의 구시기노 시마히라에 겨우 닻을 내렸다. 이 중에 심수관窯의 창시자인 심당길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갖은 고초를 겪다가 끝내 그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5년 뒤인 1603년에야 결국 지금 그들이 400년 넘게 살고 있는 히오끼군 미야마 마을인 이슈인의 나에시로 이주하였다.
그 2년 뒤에야 심당길은 자신의 요를 처음 개설하였다. 초기에는 조선의 백자 원료인 백토를 구하지 못해 그 지방에서 나는 검은 흙으로 식기와 다기 등을 만들었다. 이른바 검은 도자기인 구로사스마(黑薩摩), 일명 구로몬(黑物)을 만들어 주변서민들에게 싼값에 팔아 생계를 이었다. 스무 해 넘는 각고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는데 사쓰마 번주가 그의 인품과 작품을 높이 평가, 신분을 무사반열로 올려주는 한 편 작품에 사쓰마의 蕃名을 붙여주고 요의 이름도 정식으로 ‘사쓰마야끼(薩摩窯)라고 부르게 했다. 사쓰마야끼는 조선도공 이삼평이 일으킨 규슈 시가현의 아리타야끼와 아이찌현의 세도야끼, 그리고 기후현의 미노야기와 더불어 일본 최고의 도자기 명문이다.
초대에서 9대까지 작품은 대개 멋을 부리지 않은 소박한 것들이었다. 특히 초대 심당길의 작품인 찻잔은 흙과 유약 등의 재료를 모두 조선에서 가져갔고 불과 물만이 일본에서 조달한 것으로 은은한 연황백색으로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수수한 생김새가 우리 민족의 혼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 후 12대 심수관부터는 그림과 색채가 화려하고 작품 종류도 광범위하게 다양해졌다.
나지막한 고개길을 넘어서면 좁은 도로가 숲으로 둘러싸인 동네가 나타난다. 낮은 구릉과 왼쪽으로 얕은 산, 그리고 바른쪽으로는 약간 편편한 지세가 뒷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실개천이 흐르는, 영락없는 조선의 산하요, 우리나라 남도의 어느 농촌마을의 전형적인 모습과 흡사한 나에시로 마을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시바료타로의 소설 ‘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에 실려있다.
‘나에시로 마을에는 고려인들만 살고 있다. 조선시대 풍속대로 의복과 언어가 모두 조선식 그대로이고 날이 갈수록 번창하여 수 백호를 이루었다. 처음 잡혀 올 때 성씨가 모두 17개, 모국의 풍속대로 그들은 모두 친절했는데 그 중 申씨에 얽힌 이야기다. 망건을 쓰고 비단 옷에 도포를 입고 분홍색 허리띠를 찬 기품 있는 노인인 촌장, 처음 집에 가서 통성명을 하게 되었는데 伸 자를 성으로 쓴다고 했다. 원래의 성은 申 이었으나 일본인 관리가 호명할 때 자꾸 사투(원숭이)라고 불러 그 뒤부터 하는 수 없이 사람 人자를 붙였노라고’
‘그게 참 이상해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도 자꾸만 고향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가 없어요. 때로는 꿈속에서도 나타나고 낮에 그릇을 굽다가도 불현듯 그립고, 지금이라도 갈수만 있다면 그만 훌훌 돌아가고 싶어요’라던 촌장 노인의 말처럼 14대 심수관도 어려움을 토로했다.
갈수록 경영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에 끌려간 후 상당기간 생존의 갈림길에서 헤맸지만 점차 자리가 잡히면서 정을 붙였단다. 막부시대 들어서서부터 관납을 주로 했기 때문에 경영이 안정 되었지만 지금은 경쟁이 치열한데다가 명치시대로 들어서면서는 모든 특권이 몰수되어 조선인에 대한 차별마저 가세해 어려움이 크다고. 400년 넘게 살았으면 동포나 같을 사람들에게 부리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일본사람들의 섬나라 근성을 이해할 수 없단다.
명실상부한 도자기 명가, 심수관가의 교육은 하나의 원칙이 있다. 대학에서는 도예와 전혀 다른 분야를 택한다는 것이다. 14대 심수관 역시 대학진학 때 미술과를 원했으나 아버지의 거부로 무산되고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차피 대학 졸업 후부터는 평생을 흙을 묻히며 살아가야하는데 대학에서조차 같은 계열을 택하면 인생이 너무 가엾다는 것이다. 대학시절이나마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며 마음껏 즐기라는 집안 어른들의 배려다.
미야마 마을에는 심수관요를 비롯, 14개의 가마가 있으며 인구는 600명 정도다. 불행하게도 사쓰마요의 창시자 박평의 가의 요는 6대를 마지막으로 맥이 끊기고 말았다. 대신 그의 후손 중에서는 일본정부의 외무대신이 나왔다. ‘도고 시게노리’가 바로 박평의의 직계후손, 도고라는 성을 쓰게 된 것은 명치시대에 일본이름으로 개명했기 때문이다. 마을 어귀에는 생가터가 있고 기념관과 동상이 있다. 기념관 뒤의 학교입구 길 옆 학생들이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나무 표지판이 하나 서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거짓말을 하지마라. 지지 마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마라. 도고 선배를 본받으라.’
반면 고집스레 한국성을 지켜 온 심수관家다. 심수관요의 자랑인 수장고에는 초대 심당길로부터 15대 심수관의 대표적 작품들과 함께 한글訓蒙과 朝鮮語集, 玉山宮由來記, 漂民對話錄 등 소중한 역사자료가 함께 진열되어 있다. 400년 넘게 일본인이 아닌 조선사람으로 일본 땅에 살면서 맺힌 가슴 속 응어리가 천도 넘는 불가마 속에서 활활 타오르지만 아직도 태우지 못한 설움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 대대로 자신의 혼을 쏟아 부어 흙을 빚고 거기에 불과 흙을 조화 시키는 작업을 소명으로 전수 받은 ‘심수관요’, 그들의 명성이 더더욱 강한 불꽃으로 맹렬히 타오르기를 기원한다.
이번 강진청자 축제에 진열된 작품은 심수관의 연한 황백색 연꽃모양 잔과 받침이다. 초대 선조들의 소박함과 꼼꼼하게 기교 부린 현대적 감각이 잘 살아 숨 쉬는, 도자기 명품의 감격에 새삼 더듬어 보는 도자기 명가, 심수관가 명맥의 흔적이다. (김현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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