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재
고향 강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내로라하는 여행전문가들도 ‘다산의 자취를 밟지 않고서는 강진여행을 했다고 할 수 없다’고 한다. 강진을 찾는 관광객들이 다산 순례지의 첫 출발지로 흔히 다산초당을 택한다.
하지만 필자는 다산초당이 아닌 사의재(四宜齋)를 택했다. 강진 유배생활의 첫 발을 내딛은 사의재 시절의 다산부터 차분히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흑산도로 귀양 가는 형(약전)과 나주에서 작별한 뒤 유배지 강진에 도착한 다산을 맞이한 것은 살을 에는 겨울바람과 주민들의 따가운 시선뿐이었다.
서학을 믿는 대역죄인이 귀양을 오자 마을사람들은 처음에는 불이익이라도 받을까 두려워 다산을 피했다. 해남의 윤씨외가에서도 다산을 모른 체 했을 정도였다니 당시 다산에 대한 경계가 얼마나 심했는지 가히 짐작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산에게 온정을 베푼 사람은 동문 밖 주막의 늙은 할머니였다. 늙은 주모가 내준 주막 뒷방 한 칸에서 다산은 유배생활의 첫 4년을 지냈다. 자신만의 공간을 어렵게 얻었지만 다산은 금세 실의에 빠진다.
그런 그를 일으켜 세운 사람도 늙은 주모였다. 다산이 큰 인물임을 알아보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지 말고 뭔가 뜻있는 일을 해야지 않겠냐.” 며 다산을 채찍하고 정성을 다한다. 무학·무지의 늙은 주모의 끝없는 온정에 다산은 큰 깨달음을 얻고 교육과 학문연구, 제자양성에 헌신한다.
마음을 추스른 다산은 자신의 방을 ‘사의재’라고 이름 짓는다. ‘생각, 용모, 언어, 행동의 4가지를 올바로 하는 자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생각을 맑게 하고, 용모를 단정히 하며, 말을 적게 하고, 행동을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며 붙인 이름이다.
다산의 다짐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사의재에서 느낄 수 있었다. 강진군의 복원으로 예전의 허름한 주막은 한결 깨끗하게 단장됐다. 단아한 사의재와 창포가 가득한 작은 연못, 초가 정자와 우물, 장독대에서 공직자인 필자도 다산의 올바른 생각과 용모, 언어와 행동을 닮겠다고 다짐했다.
다산이 몸과 마음을 추스르던 주막집은 지금도 여행자의 지친 몸을 쉬게 하고 고픈 배를 채워주고 있다. 직접 빚은 도토리묵과 파전, 동동주, 청정 강진만에서 잡히는 장어로 끓인 장어탕, 신선한 해물을 넣은 해물 수제비, 새싹 비빔밥 등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사의재는 영랑 김윤식의 생가와도 가깝다. 현재 강진군은 사의재에서 충혼탑, 강진읍내가 한눈에 보이는 금서당, 영랑생가에 이르는 언덕길을 '영랑과 다산의 예던 길'로 지정해 관광 코스로 운영하고 있다. 이 길은 다산이 잠시 머물렀던 제자 이학래의 집이 있던 목리마을과도 연결된다.
필자는 정약용의 다산초당에서의 삶이 유배생활의 가을이었다면 사의재에서의 삶은 추운겨울이었다고 생각했다. 세찬겨울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가을수확을 위해 씨를 뿌린 다산의 불굴의 의지가 서린 사의재, 여기에 오면 주막너머 환하게 웃고 있는 주모의 얼굴과 따뜻한 체취가 느껴진다.
그래선지 필자는 다산초당보다 사의재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주모가 아니었으면 다산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를 헤치고 위대한 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늙은 주모의 따뜻한 마음이 후대에겐 위대한 학자를 낳았고 강진엔 소중한 문화유산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다산 못지않게 주모가 위대해 보이는 이유다. 강진을 남도답사1번지로 이끈 힘도 이곳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고향사람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다.
광주지방조달청장 이 성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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