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문학상을 수상하고 나서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종로 운니동에 100여 칸의 집을 지니고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살았다는 그의 부친이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중퇴이긴 하지만 연희전문도 거쳤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으니 문운도 창창대로다. 그런 그가 폐병으로 죽어가며 고교동창 벗에게 보낸 편지가 오늘 내 가슴을 적신다. 삼류소설이라도 좋고 탐정소설도 좋으니 일거리를 주선해 달라던, 그 돈으로 뱀 서너 뭇 고아먹고 힘을 차려 좀 더 좋은 글을 쓰겠다던, 스물아홉 나이로 죽기 불과 며칠 전에 쓴 김유정의 애걸조 편지에는 문학을 향한 비장한 마음도 엿보인다.
태만 묻고 떠나온 고향이었다. 본정통이라는 일제 때 도로명이 여전한 도심 한복판에 이층집은 넓어서 더욱 쓸쓸했을까. 친척들로부터 부자, 장자로 불리던 내 부모님들, 하지만 어린 나를 휘몰던 극심한 궁핍감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 역시 남몰래 써본 김유정 류의 편지가 한 두통이었나.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 이는 한진중공업을 향한 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죄명으로 영어(囹圄)상태인 송경동 시인의 신동엽창작상 수상소감문 중 일부다. 조금이라니! 생의 고비 고비마다 나를 휘젓던 뼈 깎는 고독감, 그 부피는 대단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로서 ‘가벼운 주머니로도 만날 수 있는 심리치료사’였기에 문학을 택했다는 지난 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가의 말이 내겐 더 절실히 스며든다.
지난 13일, 광주문학상 수상은 내 문학행로의 뜻 깊은 이정표였다. 서툰 걸음마를 시작으로 한 사람으로 성숙하도록 까지 오십 해 성상을 토박이로 살아 온 도시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 수여한 상이어서 더욱 감개무량했다.
이른 아침 눈을 뜨면 나도 몰래 눈물이 나
철없던 스물부터 철 지난 지금까지
간절한 그 무슨 바람이 있는 것도 아니련만
스물의 사랑 앞에
삶 앞에
죽음 앞에
그보다 두려운 것은 사람의 쓸쓸함 앞에
나 항상 새로 눈뜨며 가만히 눈물이 나
김일연의 시 ‘아침 기도’의 나이, 스물이 아니었다. 열일곱의 어느 눈 오는 새벽이었다. 눈을 뜨니 커다란 방에 덩그마니 말라깽이 소녀와 그 앞에 혼자 걸어가야 할 까마득히 먼 길이 놓여 있었다. 충격처럼 맞이한 고립감이었다. 밀려드는 두려움에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게 하던. 그때부터였을 게다. 내 문학의 출발점이던, 평생 두고 아쉽고 아쉬운 세계인 미술용어가, 때론 갈 수 없던 음악회 프로그램을 송두리째 베껴 적기도 하던 손바닥 크기의 빨간수첩이 등장했다.
‘승리보다 더 중요한 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단상에 올라 발표할 수상소감 중 내가 가장 강조하고픈 부분이었다. 그런데 막상 마이크를 잡고는 부치지 못한 숱한 편지처럼 가슴에 꽁꽁 가두어 두고 말았다. 맞다. 가슴에 품고 있는 뜻은 원대했으나 부족한 그 무엇들이 내겐 너무도 많았다. 좌충우돌 문단에 얼굴 내민 지 스물 한 해, 남보다 더 긴 세월 매달린 훈련 끝에 드디어 획득한 계급장? 아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문학이라는 것에 나름 정진했다고 할 수 있는 세월이라야 겨우 요 근래의 오년 남짓, 어쨌든 상은 초급장교의 견장 뺏지처럼 빛나고 뿌듯하다.
수상 소감 몇 마디 준비하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이 말, 저 말 뿐일까. 무수히 많은 장면들도 스쳐갔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건 이 상으로 하여 내 문학의 발걸음에 탄력이 붙었다는 것이다. 모자란 것 투성이를 무릅쓰고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해 돌진하리라. 문학을 통해 내가 받았던 위로를 이제 남에게 돌려주리라. 백전노장까지는 아닐지라도 전장에 연마된 장수처럼 솟아나는 용기백배다. 작은 불씨 하나 얻었으니 내 앞 어둠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외롭고 힘들었다. 가벼운 주머니로 찾을 수 있는 심리치료사 겸 위로자로 문학을 택했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맹진하지 못했다. 단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점만은 높이 사 달라. 기쁘고 기쁘다. 문학, 그 황홀한 상대와 끝까지 사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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