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즈음에
어떤 단어이건 ‘첫’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면 그 말에 갑자기 광채를 띤다. 어린 시절, 노란 별의 카드를 그릴 때 물감이 마르기 전에 흩뿌리던 금분(金粉) 같은 것이 첫이다. 어느 시인이 영하 5도보다 1월이 더 차고 신선하다 한 것도 1월이 한 해의 첫 출발인 까닭이다. 가공되지 않은 원석(原石) 속에 숨은 보석이 1월이다.
12월이 장터마당이라면 1월은 절간마당이다. 대목장의 설레고 떠들썩한 분위기의 12월을 통과하면 우리는 낙엽 하나 없이 잘 쓸린 절간 마당의 적요함으로 다가오는 1월을 마주하게 된다.
竹影掃階塵不動 月輪穿沼水無痕
대나무 그림자는 티끌 먼지를 쓸고 쓸건만 티끌은 쓸리지 않고
달빛은 돌고 돌면서 연못을 뚫고 뚫어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네
세상의 모든 존재에 깃든 영혼과 감정까지 읽힐 듯한 고요함, 이 구절이야말로 고즈넉한 산사의 1월의 밤 풍경 아닌가. 한없이 경건한 심정에 빠져 지난해의 낡은 노트를 뒤적이다가 만난 해묵은 시가 새로운 느낌으로 읽히는 것도 1월이 주는 특혜다.
깨어난 꿈으로부터의 낙하산 강하
숨 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지대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들이 확 불붙는다. 파닥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 체계를,
지하의 샹들리에 가지를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호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 기울인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지대의 수갱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수직의 낙하 여행이 이제 멈추고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 시대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없는 심연 위에 부동으로 걸려 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의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 이래 서 있다.
죽음이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 위로 펼쳐질 것인가.
작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序曲’이 내 눈에 들어온 건 우연일까, 그는 우리에겐 낯선 시인. 10여 권의 시집을 냈고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될 정도라지만 국내 출간은 ‘기억이 나를 본다’가 유일한, 그의 시집 제목처럼 이제까지 지나 온 생의 기억들이 우리를 빤히 응시하고 있다.
‘깨어남은 꿈으로, 숨 막히는 소용돌이로, 그러다가 돌연히 맞이한 새 아침으로의 하강,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월이라는 펌프의 박자는 흐르고 태양의 터번의 소리는 강렬하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무법의 선율이 바닥없는 심연 위에 부동으로 걸려있다’는 대목이라던가. 새해 첫 날인 이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우리의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는 대목도 예사롭지 않은 구절로 읽힌다. 그 뿐인가. ‘여행자인 우리가 나무 아래 망연히 서 있다’는 시구에도 동의한다. ‘과연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인 우리의 머리 위로 펼쳐질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끝나는 시의 마지막 행에서 나는 너무도 놀랐다. 우리의 한 해는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사뭇 두려운 우리를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신기하게도 트란스트뢰메르의 시 속 등장하는 대부분의 이미지들이 모두 1월을 품고 있다.
네 손수 개간하라는 下命을 받고 삽자루. 곡괭이 하나 덜렁 들고 한 해라는 동토(凍土)를 향해 나아가는 비장함이 서려있는 달 1월. 그런 1월의 첫 카렌다를 걸면서 첫 수업처럼 설렌다면 당신은 아직 젊다. 그런 그대에게도 머지않아 맨발로 딛는 출입구 마루의 한기, 그 오싹함은 가중되리니. 1월 한 해라는 그 관현악곡의 장중한 서곡의 연주가 우리 앞에서 바야흐로 펼쳐지려는 찰나, 그 1월의 입구에서 나는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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