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연재 2
18년만의 해후⑵
다산은 병이 차도가 없자 무작정 회혼일 잔치를 미뤘지만 황상이 곁에서 떠나질 않자 혼미한 속에서도 정신이 들 때면 많은 말을 했다. 그가 곁에 있으면 크게 안심을 했고, 그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했다. 꿈속에서 강진을 보았듯 제자 황상을 보는 것도 꿈속이었다. 해배되어 구릉 땅으로 돌아온 지 18년. 어느 하루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을 만큼 황상을 그리워했고, 특히 병이 깊어갈 수록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했던 다산이었다.
회혼일을 맞이하여 잔치를 여는 것 보다 황상을 만난 것이 더 큰 기쁨이요, 일생을 통해 이 보다 더한 다행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다산은, 정신이 들 때마다 그를 찾았던 것이다.
“스승니임. 부디 쾌차하셨으면 좋겠구만이라.”
황상은 그런 다산을 지켜보며 스승이 씻은 듯 훌훌 털고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빌었고, 정성을 다해 탕약을 직접 달였다. 홍 부인이 하던 일을 빼앗다시피 해서 약을 달인 황상은 다산에게 떠먹이며 정성을 다했다. 그래야만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둠 속처럼 집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탓 때문이었다.
황상은 이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산에게 큰 절을 올렸다. 어느 틈에 황상의 두 볼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떠난다면 언제 또다시 스승을 뵐 수가 있겠는가. 이미 스승의 얼굴에는 저승꽃이 뒤덮여 죽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스승님. 전 결코 스승님께서 갈쳐주신대로 세상을 살 것이구만이라. 살과 뼈가 다 닳아진다 해도 전 그렇게 살 것이구만이라.’
황상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허리를 일으켜 세웠을 때 다산이 벽에 몸을 기댄 채 학연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학연이 붓과 벼루를 준비했다.
다산은 비록 혼미한 정신인데도 학연의 부축을 받으며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다. 지금까지 스승이 붓글씨를 쓰는 것을 수 없이 보아왔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황상은 소낙비를 맞은 것처럼 온 몸에 땀방울이 솟구쳤다. 한평생 5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한 스승은, 그 글을 쓰기 위해 갈고 간 먹물이 고향 땅 백적산 앞으로 흘러내리는 훈정강(訓亭江)을 까맣게 적시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수미산처럼 높은 다산학(茶山學)을 이뤄낸 그 붓끝도 이제 자신에게 주는 한 점 글귀로 한평생의 붓질이 멈추는가 싶어 감격해마지 않는 황상이었다.
送黃子中 황자중에게 준다
奎章全韻一件「규장전운」한 건
唐筆一枝 중국 붓 한 자루
唐墨一碇 중국 먹 한 개
扇子一把 부채 한 자루
烟杯一具 연배 한 개
路費 錢二兩 노비 돈 두 냥
학연이 아버지 다산이 써준 물건의 내역대로 보자기에 쌌다. 정조 24년 왕의 명령대로 규장각에서 이석무 등이 편찬한 한자의 운(韻)자에 대해 사전에 해당되는 「규장전운」소책자 한 권, 중국산 붓, 중국산 먹, 그리고 부채와 담뱃대였다.
황상은 그 보따리를 바랑에 보물처럼 집어넣었다.
“스승님, 감사하구만이라.”
다시 한 번 황상이 다산에게 고개를 숙이자 학연이 입을 열었다.
“부족하지만 아버님의 사랑이라 생각하시고 「규장전운」을 통해 더욱 정진하시게. 또 아버님이 그리우면 「규장전운」을 보고 부채를 보면 될 것이네. 아무튼 시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라는 아버님을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되네.”
황상은 다산이 기거하는 방을 나와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학연 형제가 나룻배가 있는 소내까지 따라 나왔다. 때는 2월 19일이었다.
황상이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손짓을 하자 학연이 그의 손을 갑자기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산석! 아무래도 산석에게 써 준 글씨가 아버님으로는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으이.”
“으짠다고 그런 말씀을······.”
“아버님께는 불경스러운 말이 되겠네만 산석에게 물건내역을 써서 주기 전 미리 ‘회근시(回巹詩)를 쓰셨네.
풍륜처럼 예순 해가 지나가니 눈 돌릴 사이네 六十風輪轉眼翻
복숭아꽃 짙은 봄빛이 신혼 때와 같구나 穠挑春色似新婚
살아 이별 죽어 이별 늙음만 재촉하니 生離死別催人老
슬픔 짧고 즐거움 길었으니 임금 은혜 감사하네 戚短歡長感主恩
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좋은데 此夜蘭詞聲更好
그 옛날 하피첩엔 먹 흔적 남아있네 舊時霞帔墨猶痕
갈라졌다 다시 합한 것은 우리의 모습이네 剖而復合眞吾象
합환주 남겨두어 자손에게 물려주리니 留取雙瓢付子孫
이렇게 회근시를 쓰실 때만 해도 힘이 있게 쓰시더니만 산석에게 물품 내역을 쓰실 때는 글씨가 흔들리시더라구, 어쨌든 그 물품 내역을 쓰신 것이 아버님으로서는 마지막 글씨가 아닐까 싶은데, 이제 산석이 떠난다고 하니 그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이.”
황상은 학연이 부러 스승이 지은 회근시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황상을 위한 학연의 배려였다. 아버지 다산의 마음을 전해줌으로써 한 평생 스승의 뜻을 이으려는 황상에게 그만큼 알아두라는 뜻이었다.
황상 역시 학연의 그런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회근이란 회혼(回婚)을 말하는 것으로 초례청에서 홀기를 부른 사람의 진행에 따라 사모관대를 쓴 신랑과 족두리를 쓴 신부가 합환주(合歡酒)를 나누는 합근례(合巹禮)에서 나온 말이다. 열다섯 살에 아내 홍씨와 결혼한 다산은 이제 60년을 함께 살아온 그 마음을 한 편의 회근시에 담았던 것이다.
목란사란 말을 인용한 것은 목란이란 어린아이가 늙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차림으로 전쟁터에 나간 지 10년 만에 공을 세우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을 시화한 것이다. 다산은 이 회근시에서 「하피첩」을 언급한 것은 아내 홍씨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다. 홍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 다섯 폭을 유배생활 하는 다산에게 보내왔었고, 그때 다산은 빛이 바래고 해진 이 다섯 폭의 치마폭을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직접 짓고 써준 것으로 1810년,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바로 그 하피첩에 먹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내 홍씨와 두 아들에 대한 애정까지 담겨져 있었다. 황상은 스승이 지은 회근시를 학연에게 들으면서 바로 자신에게 또 하나의 가르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상은 나룻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학연을 멀리하고 한양길로 접어들었다. 기왕 두릉까지 온 김에 한양을 한 바퀴 둘러볼 작정이었다. 세상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양을 가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이번 여행길에서 다산 스승을 찾아뵙는 일과 한양을 둘러보는 두 가지 목적을 이뤄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발걸음은 강진을 떠나올 때처럼 가볍고 경쾌하기조차 했다.
한양.
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시골촌뜨기 황상에게 충격적이었다. 말로만 듣던 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임금이 사는 궁궐은 소문대로 웅장했다. 길거리에 사람들은 넘쳐났고, 고관대작들의 벽제소리는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쉬이- 게 물렀거라. 쉬이-게 물렀거라.”
황상은 벽제소리에 그만 오금이 저려오는 느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스승인 다산이 바로 저 벽제소리를 울리며 큰 거리를 행차했어야 할 일인데도 정적(政敵)의 음모로 인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다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치밀었다.22세 나이에 소과(小科)에 합격해서 진사가 되고부터 임금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스승 다산. 34세에는 3사(三司)를 드나들며 두루 요직을 거쳤고 경기도 암행어사까지 지내다가 정 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오른 스승 다산.
임금 정조의 사랑이 넘쳐 두터운 은혜가 하늘처럼 끝이 없었고, 가르쳐 주심은 엄한 스승 같았으되 길러주심은 자애로운 아버지 같아서 성명(性命)을 보전케 해주었지만 막상 정조가 승하하자 죽음에 이를 만큼 정적의 칼날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스승 다산.
정조 임금의 승하도 그렇지만 채당(蔡黨)의 영수 채제공(蔡濟恭) 정승마저 앞서 세상을 떠나니 풍전등화가 되고 만 스승 다산은 끝내 죽음만은 면한 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니 벽제소리가 소름끼치는 소리로 들려왔다.
“사색당파에 놀아난 을 놈덜!”
황상은 절로 흘러나오는 욕지기를 입 밖으로 내뱉으려다말고 얼른 집어삼켰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스승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오지 않았더라면 한평생 한 점 이름 없는 풀잎처럼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그 또한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주막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개 눈 감추듯 먹고 있을 때였다. 보부상 두어 사람이 들어오더니 국밥을 시키고나서 뜻밖의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스승 다산이 별세를 했다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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