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연재 3
18년만의 해후(3)
‘아, 선상님은 기연시 떠나부럿구마이. 쬐까만이라도 더 살으셨으면 좋았을 것인디······.“
황상은 얼른 주막집을 빠져 나와 행인들이 눈에 띄지 않는 호젓한 곳에서 두릉을 향해 두 번 절을 올린 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오, 아이고오.”
황상은 무릎을 꿇은 채 한바탕 울음을 쏟아냈다. 강진 땅에서 열나흘을 걷고 걸어서 두릉 땅에 온 것이 영락없이 스승의 초상을 치루기 위한 것 같아 참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춘추 75세.
스승 다산은 홀연히 눈을 감은 것이었다. 파란만장한 세상을 이제 접고 유배가 없는 세상, 당파가 없는 세상, 싸움이 없는 세상으로 떠난 스승 다산은 하늘나라에서 원도 한도 없이 학문에만 매진할 수 있을 터였다.
“산석이 떠난 다음 날 아버님의 병세는 많이 좋아지셨네. 난 솔직히 산석이 정성스레 다려주는 탕약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으이. 산석이야말로 그 방면엔 식견이 뛰어나지 않는가. 그래서 미루었던 회혼일 잔치를 하려고 준비를 했었는데, 바로 회혼일 아침에 그만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고향 강진으로 떠날 줄 알았던 황상이 다시 되돌아오자 반가운 마음을 금치 못하던 학연이 그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잔칫날로 정한 22일 진시(辰時) 초각이었으므로 아침 8시 쯤 해당되는 시간에 별세를 한 셈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달여 준 탕약을 들고 단 하루라도 차도가 있었다는 말에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한 죄책감에 사뭇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학연이 말을 이었다.
“내 외갓집으로 먼 친척이 되시는 홍길주(洪吉周) 어르신께서는 잔칫날인 줄 알고 「정다산승지회근수서(丁茶山承旨回巹壽序」를 보내왔었네. 내용인즉슨 부부가 건강하고, 늙도록 저술하니 책을 쌓더라도 키와 맞먹을 정도이며 이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으니 세 가지 복록을 지닌 분이라고 했었네만, 설마 회혼일에 초상집이 될 줄은 몰랐으이.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회갑 때에 유명(遺命)을 적은 첩을 만드셨는데, 그 유명과 「상의절요(喪儀節要」에 따라 장례를 치를 생각이네.”
“스승님께서는 뭐라고 유명을 적으셨을께라우?”
황상은 스승 다산이 장례절차까지 미리 첩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스승 다산은 빈틈이 없는 치밀한 분이었다.
“반드시 예(禮)에 따르지 말라는 것이었네. 또 풍속을 따르지도 말고 오직 당신의 뜻을 따르라는 말씀이셨는데, 만일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효(孝)가 아니라고 엄명하셨네. 더구나 「예경(禮經」을 수십 년 연구하고 또 연구했으니 당신 맘대로 한 것이 아니라시며 마땅히 그 행함에 있어 어기지 말라는 말씀이셨네.”
학연은 거듭 아버지 다산이 일러준 유명을 설명하고 나서 그 말씀대로 장례를 치뤘다.
여유당(輿猶堂) 뒤편.
다산은 살았던 집 여유당의 뒷동산에 묻혔다. 장지(葬地)를 집 뒷동산에 하라는 아버지 다산의 뜻을 그대로 이행한 것이었다. 묘지는 사람이 사는 집의 연장이라는 생각에서 다산은 뒷동산에 매장할 것을 명했을까. 하지만 지관(地官)을 불러 청룡백호를 따지지 못하게 하였고, 광중(壙中)을 만들 때는 회(灰)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하관(下官)을 할 때에는 회를 모래와 잘 섞은 다음 다시 흙을 세 차례 섞어 고르게 채워 넣기를 당부했다. .
“아버님께서는 천하에 가장 업신여기는 것이 시체이니 시궁창에 버려도 말하지 못하고 비단 옷을 입혀도 말하지 못한다며, 우자(愚者)일지라도 살아 있으면 두려워하고 현자(賢者)일 지라도 죽었기 때문에 업신여긴다는 것은 슬픈 일이니 털끝만큼이라도 어기지 말라는 말씀대로 장례를 치루고 나니 마음이 편안하네.”
장례를 마치고나서 학연이 말했다.
황상은 장례기간 동안 상복(喪服)을 지어 입고 친자식처럼 상청(喪廳)을 지켰지만 몹시 바뿐 와중이어서 차마 물어보지 못한 말을 학연에게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혹시라도 아무 유언을 냉기지 않았을께라우?”
“아무 말씀도 없었으이. 여러 일가친척들도 한 말씀이라도 남기시지 않았을까 물었네만 정말로 아무 말씀 없이 조용히 눈을 감으셨네.”
황상은 그 말을 듣고 아, 하고 신음처럼 탄성을 질렀다. 스승 다산은 이미 회갑 때에 유명과 상의절요를 지어 죽음을 준비하셨으니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예정된 것처럼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중생들은 백년 미만의 몸뚱이를 가지고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황하의 모래 수만큼이나 망상을 갖기 마련이지만, 생사는 본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옷을 벗어버리듯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아신 분이었다. 송나라 동은봉 선사는 열반할 때 걸어가다가 거꾸로 물구나무 선 채로 돌아가셨고, 보조국사는 상당법문(上堂法門)을 열고 오늘 내가 떠날 테니 뭐든지 물어보라고 했는데, 질문을 다 받고 나서 법상(法床)에서 내려오자마자 돌아가신 것처럼 스승 다산은 생사의 문제를 마음대로 한 셈이었다.
학연은 아버지 다산이 시킨 대로 묘를 화려하게 석물로 꾸미지 않았으나 상석(床石) 만큼은 모셨는데, 그 곁에 묻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만 보아도 스승 다산의 성품을 읽을 수 있었다.묘지명이란 죽은 이의 일생을 간략히 밝히는 것으로 일가친척이 쓰기 마련이지만 다산은 회갑 때 직접 썼던 것이다. 바로 그 자찬묘지명을 쓸 때 스승 다산은,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고 곱게 다듬으려 했다’고 했으니 이 또한 한평생 자신에게 휘몰아쳤던 악과 고통을 오히려 이겨내서 당신의 저술이 백세(百世) 후에는 빛을 보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공자가 열국을 주유하다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어느 누가 큰 나무로 공자를 헤치고자 했으나 공자는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놀라서 공포에 떨었지만 공자는 하늘이 내게 덕을 주었으니 그가 나를 어찌하겠느냐고 했던 것이다.
황상은 스승 다산의 자찬묘지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스승의 위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다시 취조를 받고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으나 다시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정승 서용보(徐龍輔)의 방해로 석방이 좌절되었다. 1808년 다산초당으로 이사했다. 천여 권의 장서를 두고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의 주요한 저작은 거의 이 시기의 산물이다.
황상은 특히 이 대목을 읽으며 스승 다산이 당한 악에서 항상 한과 슬픔을 가져왔지만 아름다운 연꽃이 흙탕물에 오염되지 는 것처럼 선악의 대립을 초월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의 오계를 통해 악을 초극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스승이었다.
뿐인가.「논어」의 안연편에 ‘군자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스로 살펴보아 잘못이 없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란 말처럼 근심과 두려움이 없이 중도에 그만 두지 않고 갈림길이 없는 길(道)을 묵묵히 걸었던 스승이었다. 그러기에 다산초당에서 주요한 저적을 거의 그곳에서 했다고 기록하디 않았겠는가.
다산의 장례식을 마친 황상은 상복 차림 그대로 두릉을 떠나 낙향을 서둘렀다. 그러나 고향을 내려가는 길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올라올 때는 지름길(捷徑)을 부러 선택했지만 내려갈 때는 공로(公路)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황상은 이제 스승이 살다 간 것처럼 그렇게 살다 가면 될 성 싶었다. 어제도 걷고 오늘도 걸으면서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스승이 해배되어 강진을 떠난 지 18년. 황상은 비록 스승이 곁에없었지만 스승이 그에게 준 「제황상유인첩」이 유일한 스승이었고, 이제 스승을 여의었지만 역시 유일한 스승은 「제황상유인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부처의 가르침과도 똑 같은 것이었다. 열반을 앞둔 부처에게 아난존자가 물었다.
“부처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에는 스승으로 모시고 부처님을 의지하며 지냈으나 이제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면 우리는 누구를 스승으로 해야 하며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까?”
이에 부처가 대답하기를,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여래를 스승으로 하고 여래에 의지하여 지내왔으나 여래가 열반에 들면 계율로써 스승을 삼고, 내가 가르쳐준 법에 의지해야 한다. 마땅히 여러 사람을 놓아버리고 홀로 한적한데 처함은 괴로움을 없애버리는 근본이 되느니라. 계율과 정법에 머물러 한 시라도 방일하지 말고 한적한 곳에 조용히 앉아 선정과 지혜를 닦아 항상 부지런히 정진할지어다.”
말씀을 마친 부처님은 고요히 선정에 들었는데, 부처님이 열반한 지 230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모든 수행자가 부처님 법에 의지하듯이「제황상유인첩」이 오직 스승이요, 법으로 삼아 유인의 삶을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므로 황상은 스승 다산이 자신에게 준 사랑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백적산에 거처를 마련한 지도 오래 되었으니 마땅히 스승의 가르침대로 섬기며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실천하고 실천해서 그 뒤를 좇을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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