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강물에 내 마음 씻으리(4)
강물이 붉었다.
붉은 강물은 끝없이 이어졌다.
십여 리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돛단배도 돛이 붉게 물들여 져 있었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훈정강은 핏빛으로 물들어 미산 앞바다로 흘러가곤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저 강물은 붉게 물들여진 채 봄을 실어 날리고 있었다.
천개산(天蓋山) 허리가 터져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다시 백적산(白磧山)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과 합쳐져서 강물을 이루는데, 그 강가로 즐비하게 심어진 산복숭아꽃이 떨어지면서 붉은 강을 만들고 있었다.
황상은 다산 선생의 장례를 치른 후 고향인 백적산에 돌아온 후 여러 날 끙끙 앓으면서도 바로 방문 앞으로 흐르는 핏빛 훈정강을 바라보며 지냈다. 보름 남짓 걸어 내려온 여독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스승 다산의 죽음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탓이었다.
공자의 제자가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우리가 삶이라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焉得知死)고 답했다. 이 말은 삶도 죽음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보다도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 말이었다. 공자는 또 말씀하기를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했는데, 다산 선생은 당신의 삶을 원망하지 않았고, 당신을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아부하여 구걸하지 않았으며, 슬프다 비탄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왕년의 부귀영화 또한 꿈꾸지 않았다.
그렇다.
스승 다산은 사마천의 삶을 기꺼이 닮고자 했던 것 같다. 죽음보다도 참혹한 형벌 궁형(宮刑)을 받고서 그는 ‘이익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되는 화보다 더 참혹한 화는 없고, 마음의 상처보다 더 아픈 고통은 없으며,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 보다 더 추한 행실은 없고 궁형보다 더 치욕스러운 것은 없다’고 말했는데, 궁형이란 남자의 생식기를 절단하는 형벌로써 음행(淫行)을 저지른 자와도 같은 것이기에 살아서 멸시를 당해야만 했다. 당연히 당시의 한(漢)나라 사대부(士大夫)로서는 궁형을 받기에 앞서 스스로 자진(自盡)을 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형과도 같은 궁형을 받고도 인(仁)을 위해 죽음도 버리라는 살신성인(殺身成仁)도 저버리고, 동중서의 말대로 “군자가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어서 영광스럽지만 못하다”란 말도 무시한 채 한 줄 한 줄 「사기」를 썼던 것이다. 참담하고 비참하다 못해 목숨을 끊어야 할 지경임에도 분서(憤書)를 써내려간 사마천은 끝내 문화적 복수까지 해 낸 것이었다.
사마천은 자신을 일컬어 강개사림(慷慨士林)으로 자처하면서 명주(明主), 현군(賢君), 충신(忠臣)과 대의(大義)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사적을 수록하였으니,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지위의 고하를 또한 따지지 않았으므로 공명을 이뤄냈을 뿐 아니라, 하층민까지도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사기>는 크게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분량은 전 1백 30권으로 이는 다산이 6명의 아들을 잃는 기구한 삶의 시작 속에서도 유배지 강진에서 다산문학과 다산학을 꽃 핀 것과 다름 아닌 일이었다.
<사기>는 백이열전(伯夷列傳>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득을 취하고자 다투었으나 오직 백이와 숙제(叔齊) 만큼은 의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사양하고 굶주려 죽으니 천하가 모두 칭송하므로 <백이열전>을 제일(第一)로 한다고 사마천은 밝혔다.
사마천은 공자(孔子)의 “백이·숙제는 사람들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하는 일이 없었으며, 인(仁)을 구하여 얻었으므로 또 무엇을 원망할 것인가”란 말을 인용하면서 “나는 그를 슬퍼한다. 더구나 그의 시를 보면 공자의 말과 다른 점이 있다”며 백이·숙제 얘기를 풀어나갔다.
백이·숙제는 고죽(孤竹)이란 나라의 아들들이었으나 아버지가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하자 형인 백이에게 양보를 하였고, 백이 역시 숙제가 부친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며 숨어버렸다. 그리하여 백이·숙제는 노인들을 잘 돌본다는 주(周)나라로 갔지만 무왕(武王)이 부왕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무기를 손에 들고 은(殷) 나라를 치려하자 충고를 했다. 이에 신하들이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자 무왕의 군사 태공(太公)이 의로운 사람이라며 방면했다.
그 뒤 무왕은 은나라를 평정해 천하는 주나라의 것이었지만 백이·숙제는 부끄러운 일이라 하여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연명하다가 굶어 죽었다. 죽기 전 노래를 부르기를 ‘지금 나는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무왕(武王)은 폭력으로 폭력에 바꾸되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더라. 신농(神農)· 우(虞)·하(夏)는 어느 사인엔가 이미 사라져버렸으니, 내 어디로 돌아가리. 아! 가리라, 목숨도 이미 지쳤거니’ 결국 이 노래처럼 굶어 죽은 백이·숙제에게 사마천은 이렇게 묻는다. 이 노래를 두고 생각할 때 과연 백이·숙제는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겠는가? ‘하늘의 도리(天道)는 사(私)가 없으며 언제나 착한 사람이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백이·숙제와 같은 이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어진 덕을 쌓고 품행이 조촐하기를 이와 같이 하고도 끝내 굶어 죽었으니 말이다,하고.
황상은 매시근하던 몸이 한결 가벼워지자 천천히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천개산과 백적산이 바야흐로 초록 물감을 칠해 놓은 듯 푸른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강물은 산복숭아꽃의 낙화로 인해 붉었고 산은 푸른 기운으로 가득차서 푸르렀다.
황상은 해발 549m의 천태산 자락에 금가락지처럼 자리 잡고 있는 정수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집과는 지척이었으므로 자주 찾는 곳이 정수사였다.
정수사(淨水寺).
800년 도선국사가 이곳에 묘적사(妙寂寺)와 쌍계사(雙溪寺)를 창건한 후 도공(陶工)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던 천년고찰(千年古刹)이었다. 동으로는 천관산(天冠山), 서로는 저두산(猪頭山), 남으로는 백적산, 북으로는 불용산(佛聳山), 서남으로는 여계산(女鷄山)이 에워싸고 있었다.
천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태봉(天台峰)에는 거대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이 개천(盖天)이라 불러지고 있었다. 세상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온 세상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면 천관산에 있는 미륵불과 천태봉의 미륵불이 천개산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면 개천바위가 공중으로 솟구쳐 세상을 덮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또 하나의 얘기는 아주 먼 옛날, 정수사가 번창했을 때 스님들의 공양 쌀을 씻은 뜨물이 마을 앞까지 흘러내렸고, 불사를 함에 있어 용문 마을 앞 도둑골에서 기와를 구웠는데 스님들이 줄을 서서 정수사까지 날았다. 쌀뜨물과 기와 운반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상주했음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 사찰이었다.
황상은 크고 작은 바위틈 사이로 장쾌하게 흐르는 돌다리를 건너다말고 고금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간 스승 다산의 벗 김이재(金履載)가 지은「현감이후송덕비(縣監李侯頌德碑)」를 바라보았다.
문득 1805년 9월 16일의 일이 떠올랐다. 김세준과 함께 다산으로부터 글을 배우던 황상은 스승과 따라 정수사 나들이를 떠났다. 스승은 읍내를 떠나자마자 시 한 수를 읊었다. 때는 가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풍성한 계절에 바다풍경 또한 바닷가 언덕을 뒤덮는 갈매기의 모습과 성벽에 달라붙은 벽려 덩굴의 붉은 모습에 스승은 절로 시심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남당포를 지나면서 스승은 다시 시를 지었는데, 저녁 조수가 밀려들자 수 백 마리의 게들이 기어 나오는 풍경을 노래한 것이었다. 다시 해질녘에 정수사에 도착한 다산은 <지사(扺寺)>란 시를 지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지팡이 짚고 비문 보며 자꾸만 배회한다’고 했는데. 사실 다산은 사연이 많은 비석과 얽힌 인연 때문에 정수사를 찾았는지도 몰랐다.
‘이 절 또한 스승의 채취가 남아있네잉.’
황상은 스승 다산과 함께 정수사에 들려 하룻밤 묵고 갔던 때를 떠올리며 한참동안 송덕비를 바라보다가 대웅전 앞으로 갔을 때였다. 스님 한 사람이 뒷짐을 지고 경내를 산보하고 있었다.
“은봉(恩峰) 스님 아닌게라우?”
황상은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버럭 지르듯 불렀다.
“아니, 황상 거사(居士)가 아니십니까?”
은봉 스님 역시 황상을 보고나서 합장을 해보이며 기쁜 표정을 지어보였다.
“고성사(高聲寺)에 계시기가 답답혔던 갑습니다.”
은봉 스님은 고성사 스님이었다. 그런데 한 철 보내기 위해 정수사에 왔단 말인가.
“아닙니다. 몸에 병이 있어 요양 차 지내고 있습니다.”
“으짠다고 우리 스님은 그러코롬 아파쌓께라우?”
황상은 은봉 스님이 자주 설사병을 앓으며 위장병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세월이 가도 조금도 나아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육신의 짐을 벗어야만 되겠습니다.”
은봉 스님이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스니임! 뭔 말씀을 그러코롬 하신당가요? 지가 알기로는 위장병에 송라(松蘿)가 최고라든디.”
황상은 은봉 스님의 예사롭지 않는 표정에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의 말대로 송라는 산삼(山蔘)보다 더 좋은 귀한 약재로서 1000m 고지에서나 발견되는 실타래 같은 약재였다. 태풍이나 강풍에 송라가 바닥에 떨어지면 그것으로 증거를 삼아 절벽 같은 바위를 타고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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