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연재 11
여기서 족히 인(仁)을 볼 수 있나니(4)
그런데 1806년 3월 중순에 우이도에서 온 뱃사람이 찾아와 둘째 형 약전의 편지를 건넸다. 편지도 편지지만 형의 안부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우선 기뻤다. 하지만 그 뱃사람은 형 약전이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해 얼굴이 몹시 상했다는 말을 전하는 바람에 걱정이 앞섰다. 뭐든지 잘 드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먹는 것이 부실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무식한 뱃사람 중에서도 형 약전을 존경한 나머지 찾아온 어부들과 심심파적으로 담소를 나누는가 하면 함께 어울리는 일도 잦다고 하자 다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섬 아이 몇을 가르치는 재미 또한 쏠쏠해서 또 다른 낙으로 삼고 있다는 말에 안심까지 되었다.
그런데 형 약전의 편지 내용은 온통 황상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 번 편지에 황상이란 아이가 약전을 곁에서 모시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내용을 보낸 바 있었는데, 이를 만류하는 내용도 곁들여 있었다.
--황상의 지금 나이가 몇이던가? 월출산 아래 이 같은 문장이 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일세. 어진이의 이로움이 어찌 넓다 하지 않으리. 나를 만나고자 이곳까지 오겠다는 마음은 내 마음 속을 상쾌하게 하고 있으나, 뭍사람과 섬사람은 달라서 자신과 크게 관계된 일도 아닌데 경솔하게 큰 바다를 건너게 할 수는 없네.
인생에서 귀한 것은 서로 알아주는 것이 고귀하니 어찌 얼굴을 기어코 마주해야만 되겠는가? 옛 현자(賢者)들도 어찌 반드시 얼굴을 본 뒤라야 아껴주었겠는가? 이 말을 전해 주어 안심하도록 해주는 게 좋을 듯싶네. 모쪼록 더욱 부지런히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문재(文才)를 성취토록 하시게. 인재가 드물다보니 지금 세상에는 백세에도 이 같은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우니 단연코 마땅히 천 번 만 번 아끼고 보살펴주어야 하네. 안타깝게도 그 신분이 미천하다보니 이름이 난 뒤에도 세도가들에게 핍박을 당할까 염려되네. 사람 됨됨이는 어떤가? 재주 많은 자는 반드시 삼가고 두려움이 없는데 그의 문사(文詞)를 살펴보니 경박하거나 안일한 태도가 전혀 없으니 그 됨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네. 부디 스스로를 갖추고 진중하여 대인군자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권면해 주시게.
이 섬에도 몇 명의 모자란 아이들이 있는데, 어쩌다 생각이 지혜로운 아이도 있다네. 하지만 본 것이라곤 「사략」과 「통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마음속으로 바라는 바는 병교(兵校)나 풍헌(風憲)이 되는 것을 넘지 않고 있네. 게다가 사람들이 모두 가난하다보니 온 섬 가운데 편히 앉아 밥 먹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어서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서찰을 보낸 사람과 함께 잠을 자고나면 내 정황은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것이네. 꼭 잘 대해주길 바라네. 만일 어떤 물건으로 정을 표했으면 하련만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네. 노자 외에는 어떤 것도 받지 않을 것이니 4.5전(錢) 쯤 쥐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다 적지 못하네.
병인년(1806) 3월 10일 둘째 형 씀
“이 편지를 읽어보니 절해고도(絶海孤島) 흑산도에 계셨던 약전선생님과 강진으로 유배오신 다산선생님 두 형제분의 도타운 형제애를 보는 것 같구만이라. 거기다가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것소이.”
황경이 새삼 스승 다산에게 글을 배웠던 때가 생각났는지 눈시울을 적셨다.
“그렇다네.”
“아마도 약전 선생님께서는 공자도 열 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는디 형님 역시 그 연세에 학문을 시작한 점을 높이 산 것이 아닌가 싶구만이라.”
“그게 무슨 칭찬받을 일이라구......”
황상이 펄쩍 뛰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것이 아니지라. 공자도 가난한 무사(武士)의 고아였던 터라 어디 제대로 공부를 했것소.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을 것인디 문제는 형편이 어려웠는디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을 시작했다는 거 아니것소이.”
“동생이 모처럼 나를 만나더니 날 쑥스럽게 맹글고 있네 그려.”
황상 역시 약전 선생의 편지를 다시 한 번 죽 훑어 내려간 후 자신이 직접 쓴 글씨에 눈길이 멈췄다.
-- 이것은 다산 정약용선생께서 나주 흑산도에 귀양 가 계실 적에 보낸 서찰이다. 다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서찰의 내용 모두가 네 이야기로 가득하고, 또한 둘째 형님의 친필이니 너에게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 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에 합하여 첩으로 만들었다.
“형님. 그런데 웬 병아리를 다 키우시네요.”
황경이 문득 고개를 돌려 바깥마당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산 선생님의 둘째이신 학유(學游) 선생이 닭을 키우겠다고 하자 편지를 보냈는데, 이왕 닭을 키우려거든 여러 가지 책을 가져다가 닭에 관한 내용을 초록해서 차례를 매겨 책을 만들도록 하라고 일렀단 말이시. 당신께서도 두 형제가 잘 커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를 남겼는디 ‘변상벽(卞相璧)이 그린 어미 닭이 병아리를 거느린 그림에 제하다’란 작품이네. 즉, 변상벽이란 사람은 변고양이란 별명이 있으니 고양이 그림을 잘 그려서 이름을 얻었는디, 다시 병아리를 그려내자 마치 깃털이 살아있는 듯 어미 닭이 느닷없이 성을 내니까 얼굴이 몹시 사납다는 그런 내용으로 시작되는 시였제. 변상벽의 그림도 훌륭했제마는 다산 선생께서는 어쩌면 그러코롬 닭에 대한 시를 멋지게 그려내셨는지.”
황상이 말을 마치고나서 자신이 지은 시 한 편을 황경에게 건넸다.
“이건 형님이 지으신 시구만이라.”
열아홉 개 달걀을 한데 품어서 菢卵十有九
병아리 열다섯 마리를 깠네 纔生十五雛
붉은 벼슬을 그 누가 짜준 것일까 絳幘誰所織
황금 발톱 풀무질 필요 없다네 金距不須爐
깃 하나도 아껴서 애호하나니 愛護惜一毛
양주를 사모한 것은 아닐세 非是慕楊朱
매화 동산 들어감은 막아야 하니 但防入梅園
꽃술을 망칠까 염려해서지 或恐捐花鬚
마주 물어 지렁이를 서로 다투고 對吻爭紫仁
부산스레 내달아 개미를 쫓네 疊趾趁玄駒
여기서 족히 인(仁)을 볼 수 있나니 於斯足觀仁
정이천은 참으로 큰 선비였지 伊川誠大儒
<정민 해석>
황경이 ‘영계추(詠鷄雛) 3수 중에서 첫 수를 읽어 내려갔다.
“나도 스승님의 뜻대로 닭을 쳐보고 있네만 스승님의 두 아들도 닭을 키웠등가 보대. 그러면서 계경(鷄經)을 짓기도 했제마는 나중에는 여러 가축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종축회통種畜會通 」이란 책을 엮어내기도 했다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만이라. 그란디 형님. 이 시에서 어사족관인(於斯足觀仁)이라, 여기서 족히 인(仁)을 볼 수 있다는 말은 뭣을 뜻한당가요?”
“원융무애(圓融無碍)라, 원융하여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상태가 아니것는가. 불교적인 말이지만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은 걸리고 편백됨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는 것이 곧 인(仁)이라고 생각하네. 그래서 주변의 상항에 따라 마음의 변화가 없는 것이 또한 인일 걸일세.”
“공자의 중심사상이 인(仁)이 아닐께라우? 논어에서 많이 나와 있다는 것은 형님이 잘 알고 있는 거 아니것소이.”
동생 황경이 이윽고 일어섰다. 읍내까지 가려면 반나절은 훨씬 못 미치겠지만 해거름녘이 다 되어 도착할 것이었다. 황상은 문밖까지 전송하였다. 동생에게 얼마 되지 않은 전답 마지기를 던져주듯 죄 주고 이곳으로 떠나온 것이 백번이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 중에 부모 유산을 가지고 얼마나 형제간에 피터지게 싸움질을 하던가. 한 뱃속에서 태어나 부모 유산을 가지고 욕심을 부린 나머지 평생 등지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끝내 부자는커녕 물려받은 재산마저 없애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황상은 문득 공자의 말씀을 떠올렸다. 인(仁)이란 무엇이냐는 사마우(司馬牛)의 질문에 공자는 말이 줄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사마우가 물었다. 그렇다면 말이 줄줄 나오지 않는 사람은 인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느냐는 말에 인을 실행하기가 어려우므로 말이 줄줄 나올 수는 없는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다시 사마우가 군자(君子)에 대해 질문하자 근심한다든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사마우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다 군자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내 양심 가운데 꺼리는 바가 없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이냐고 답했다.
말하지 아니하고 근심과 두려움이 없으니 인(仁)을 얻되 군자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곧 유인의 삶 속에 있음을 황상은 거듭 확신하고 있었다.
10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보고 가리라
1533년 송순이 면양정을 짓고 나서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송순의 제자인 하서 김인후가 <자연가>를 지었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유인의 삶은 또한 자연 속에 있을 것이매 여기서 족히 인(仁)을 볼 수 있으면 다행스러운 삶이 될 것이었다. 벼슬이라고 하기에는 알량한 말직 아전이나 하면서 현감 앞에 허리 굽혀 굽실대고, 무지몽매한 백성 앞에서는 거드름이나 피우는 세상은 분명 사람의 길이 아닌 게 분명해 보이질 않는가.
그렇다면.
진정 유인의 삶은 숨어서 지내는 일이므로 애써 남과 어울려 막걸리잔을 돌리거나 밤이면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밤새껏 화투패를 돌리는 일도 아닐 것이요, 먼 장터까지 다니며 청상과부 독방이나 기웃거리는 일도 아닐 것이며, 그리도 기분 좋다는 양귀비를 주사 맞는 일 따위는 더욱 아닐 것이었다.
마을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지극히 삼가면 자신을 위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니 시비가 끊어질 것이며, 처처에 하심(下心)하며 그저 묵묵히 일속산방을 지켜나가면 될 이었다. 오직 그 길만이 스승 다산이 내려준 <제황상유인첩> 대로 사는 길일 터였다.
그러므로 닭을 치면서도 거기에서 인(仁)을 볼 수 있나니, 유인의 삶은 간산에 과실 심고 진림에 채소 씨를 뿌려 덕행을 즐기고 기뻐하니 석인(碩人)의 너그러움을 안게 되어 유인의 일이 길하다고 스승 다산은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분명 청복(淸福)을 아낀다면 책과 글, 글과 책을 떠나서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보고 또 보고, 쓰고 또 쓰는 일만이 청복을 얻는 길임을 황상은 잘 알고 있었다. 도잠과 사령운, 두보와 한유, 소식, 육유의 시를 손가락이 아프도록 써보고 또 써보는 일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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