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31
무육지은(撫育之恩)
김현임(수필가)
밥을 먹다가 수저를 놓고 멍해진다. 마당에 흐드러진 꽃을 보다가도, 어미와 뒹굴며 장난을 치는 고양이 새끼들을 보면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소중한 것을 졸지에 잃어버린 부피 큰 당혹감과 공허함에 휘몰려 당황하다가 뒤늦은 현실인식인 양 툭 내뱉는 혼잣말이다.
“엄마가 없다”
엄마의 부재라는, 도저히 실감나지 않는 가혹한 현실에 가슴 먹먹해지는 이 고아 증상은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진다.
명정(銘旌)이던가. 여동생은 제가 쓰던 낡은 차를 폐차 하려다가 나온 붉은 천 조각을 혼자 처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햇볕 넘실거리는 염천(炎天)의 뙤약볕 아래서 우리 자매는 단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엄마의 마지막 흔적을 태웠다. 남실거리는 불꽃,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 속에서 우리 엄마의 김애영(金愛英)이란 이름은 지상에서 그렇게 지워졌다.
불로동, 삼흥리, 하남, 그리고 쌍촌동에 이어 당신이 마지막으로 머무셨던 요양병원까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던, 그래서 언제나 만만하던 곳이 이젠 없어져 버린 것이다. 걸핏하면 세상에서 입은 생채기를 싸안고 달려가 이 모두 당신 때문이라고 공연히 생억지를 쓰던, 그 잦던 협박과 땡깡에도 대꾸 한 마디 변변히 못하던, 내게 제일로 나약하고 허술하던 대상이 사라졌다.
극심해진 병환에다 집에서 수발이 불가능할 정도로 치매기까지 덧쳐 이럴 바엔 차라리 어서 가시라, 당신의 마른 등을 토닥이며 다시는 돌아오시지 못할 길을 이웃집 마실길로 여기며 재촉하기도 했다. 아, 아! 백 번, 천 번 내 얼굴에 밥을 퉤퉤 내뱉으셔도 좋으니 엄마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초췌한 당신의 얼굴에 내 얼굴을 마구 부빌 수 있다면. 엄마가 이리도 간절할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아야, 느그는 나를 여기 놔두고 걸리도 않드냐?”
당신은 깨끗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침울한 음색으로 물으셨다. 환청처럼 들리며 울컥 목울대에 걸리는 그 말이 곤두선 밥알을 걸리게 하는가.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쳐도 풀리지 않는 체증이다.
자식 둔 골짜기는 제 아무리 사나운 범도 젖은 눈으로 돌아보고 자식 떼고 돌아서는 어미의 발자국마다엔 뜨거운 피가 괸다던가. 다시는 되들을 수 없는 당신의 가냘픈 발자국 소리를 회억하는 밤마다 쏟는 속울음이다. 어떤 깊이로 막아서는 생의 도랑 앞에서도, 남은 노정(路程)에 제 아무리 교묘히 숨은 자갈에도 넘어지지 않는 요령은 이미 터득한 세월, 이순(耳順)이 코앞인 내가 아닌가. 삶의 험준한 길목일랑 거칠 대로 거쳤으니 새삼 무엇이 겁이 나랴. 그런데 기쁨, 분노, 연민, 경멸, 무모함, 확신, 용기... 등등 삶의 결에 스민 갖가지 맛들에 심드렁, 삶의 식상함에 빠진 내가 어머니, 그 한 분의 부재로 인한 견딜 수 없는 허전함, 그 고약한 맛에 와들와들 떨고 있다. 육척지고(六尺之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가엾은 신세를 이르는 말이라지만 백 살의 부모에겐 팔순에 이른 자식도 여전히 어린아이라는 그 말이야 말로 참으로 지당하다.
저를 길러준 어미에게 입 안에 것을 토해 바치는 까마귀(反哺之孝)만도 못한 내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이리 주절대는가. 마주치는 사물들이 칠판 화(化) 되어 적혀있는 글자인 ‘엄마가 없다’에 안절부절, 지팡이를 잃은 맹인처럼 허둥댄다.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하는 정서적 위기다. 손수 어루만져 내 살과 정신을 빚어주신 은혜, 뒤늦게 깨닫는 그 무육지은(撫育之恩)의 절절함이다. 사방을 휘둘러 봐도 이런 나를 온전히 위무해 줄 그 손길이 이제는 없다는, 그게 더 기가 막힌다.
효자는 무자비한 전쟁터의 화살도 피해간다 했다. 제 부모에게 불효한 인간에겐 나라에 충성하길 기대하지 말라는 무부무군(無父無君)도 스친다. 너무 사랑만 주어 기른 자식은 훗날 패륜을 저지른다는 자모유패자(慈母有悖子)도 올바르게 자식을 기르라는 경구다. 부모의 훈육방법에 따라 훗날 모두가 우러르는 용이 되기도 하고 두엄 속에서 뒹구는 돼지가 되기도 한다(一龍一猪)했다. 가끔 내겐 목마르기만 하던 당신의 사랑, 하긴 어머니 그 분이 내게 사랑을 아낌없이 퍼부어 쏟아 주셨건 행여 이 자식 그르칠 새라 아껴가며 조금씩 덜어내 축여 주셨건 손가락으로 감히 바닷물의 깊이를 헤아리는 어리석음이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적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어머니의 18번 노래를 추억하며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몇 해던가.’라는 대목에 새삼 또 목이 메인다. 맞아, 어느 해 여름꽃 흐드러진 뜰이 내보이는 마루에서 어머니와 함께 부르던 그 노래 속 맨드라미가 한참이어서 이리 더 서러운가.
오늘도 나는 당신의 흔적을 더듬으며 하늘을 우러른다. 흰 구름 한 자락 피어나는 것만 봐도 부모님 슬하를 떠나 온 자식에겐 예사롭지 않다는 백운고비(白雲高飛)라, 성하(盛夏)의 뭉게구름이 만들어낸 형상이 너울너울 흡사 당신 타고 떠나신 꽃상여다. 송이송이 벙그러진 목화꽃 매어달은 순백의 꽃마차 속에 빙긋이 웃고 계시는 내 어머니의 고운 모습이 보인다.
어루만져 길러주신 그 은혜 다시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으앙! 울음보가 터질 듯한, 이 세상에서 가장 아쉽고 그리운 호칭인 엄마, 할 수만 있다면 그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로 이 글의 부족한 매수를 온통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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