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 연재 (17)
만약에 봄바람이 내 맘 알 것 같으면 (2)
황상은 다음 날에도 두 형제와 더불어 시로 화답하며 회포를 풀었다. 친형제간이나 다름없는 우애요 사랑이었다. 학연과 학유의 거동을 볼 때마다 스승 다산의 모습이 절로 떠오르면서 눈시울이 이따금 뜨뜻해지곤 했다.
황상은 스승 다산이 일러준 <제황상유인첩>의 내용대로 살고자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생활을 담담히 말해주었고, 학연과 학유는 강진의 정들었던 산하에 대해 기억을 되살리며 추억에 젖곤 했다.
황상이 두릉에서 머문 지 열하루 째 되던 3월 26일 아침, 학연이 불쑥 진지하게 말했다.
“내 치원에게 할 말이 있네.”
“무슨 말씀을 하실라고 뜸을 들이신다요? 어서 말씀해 보씨요이.”
“지난 번 편지에도 그런 말을 썼지만 이제 몸이 옛날 같지 않으이. 사람은 생자필멸이라 하지 않았는가.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우리가 아닌가?” 어느 틈에 학연의 눈 가에 이슬이 맺혀졌다. 황상은 깜짝 놀라,
“어찌 맘 약한 말씀을 다 하신다요? 시방 연세로 따진다면 사실 날이 많은 양반이…….”
하면서 그의 손을 붙들어 잡았다.
“나이도 나이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이 떨어져서 살고 있는가?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오고가기에는 더욱 어렵지 않는가? 앞으로 한 번이나 더 만나면 영영 이별일 것 같네. 그만큼 우리도 나이가 먹었다는 것이네.”
“제가 또 올라오겠구만이라. 너무 상심해 마시씨요.”
“그러나 이제 치원이 내려가고 나면 기약할 수 없는 세월이 될 것이네. 내 그동안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치원이 예꺼정 올라온 김에 두 집안이 정황계(丁黃契)를 맺었으면 하네. 그래야 우리 후손들도 조상 때부터 각별한 인연이 있었음을 알 게 아닌가? 그렇게 해 주시겠는가?”
“여부가 있겠소이. 그렇게 하다마다요. 저로서는 그저 감복할 뿐이구만이라.”
“그럼 오늘은 그 일을 매듭짓세나.”
학연이 지필묵을 꺼내 큰 글씨로 <정황계첩 丁黃契帖>이라고 쓰고나서,
“나, 그리고 동생, 치원 이렇게 세 가족의 자손들의 성명과 자호(字號)를 적고, 나이 등을 적도록 하세. 그리고 대대로 예전의 정의(情誼)를 유지하도록 당부하는 말을 적으면 좋을 듯 싶으이.”
“그렇게 하시지라.”
학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힘차게 붓을 휘둘렀다.
황상(黃裳), 자(字) 자중(子中), 호(號) 치원(梔園), 무신생.
자 농무(農懋), 자 우여(禹餘), 정묘생.
손 오붕(吾朋), 신묘생.
손 가붕(家朋), 병신생.
손 기붕(期朋), 갑신생.
정학연(丁學淵), 자 치수(穉修), 호 유산(酉山), 계묘생.
자 대림(大林), 자 사형(士衡), 호 연사(蓮史) 정묘생.
정학유(丁學游), 자 치구(穉久), 호 운포(芸逋) 병오생
자 대무(大懋), 자 자원(子園), 호 연원(硯園), 갑신생
자 대번(大樊), 자 자산(子山), 계사생
자 대초(大楚), 자 자성(子城), 을미생
정학연은 세 가족의 내역을 다 적고나서 한참 쉬었다가 다시 붓을 들고 정황계의 뜻을 적어 내려갔다. 발문이었다. 학연은 아버지 다산의 연세가 40세 되던 해 신유년 겨울 강진으로 귀양을 가서 임술년(1802)에 처음으로 황상을 사제로 맞아들였고, 병신년에는 아버지 다산이 회근례를 맞아 황상이 방문했다가 상을 당하자 함께 장례를 치뤘으며, 그 후 을사년(1845년 헌종 11년) 봄, 10년 만에 다시 와서 세 사람이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후에 자손들이 서로 멀어질까 염려하여 대대로 예전의 정의를 유지하라는 정황계를 적어 내려간 것이었으니 가슴 밑바닥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다만 생각건대 우리 세 늙은이 정학연, 정학유, 황상을 말함에 백발의 나이로 실낱같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만약 차례대로 구천으로 가게 되면 두 집안의 아들 손자가 남북에 떨어져 있으면서 세월이 점점 오래되어 성기(聲氣)가 미치지 못하게 되어, 훗날 대면하더라도 아득히 멀리 떨어져 지내는 이가 서로 어깨를 부딪쳐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줄 어찌 알리오. 드디어 세 집안의 부자 및 손자의 성명과 자호, 나이를 기록해서 첫머리에 두고, 다음으로 서술한 말 몇 마디를 덧붙여서 대대로 오랜 정의를 닦고자 하는 계권(契券)으로 삼고자 한다. 아! 양가의 연소배들은 이처럼 곡진한 뜻을 저버리지 말고 비록 십세(十世)에 이르더라도 오늘처럼 한결같이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되지 말 것을 구구하게 깊이 바라는 바이다.
“다 썼네. 치원이 보시기에 어떠신가? 혹시 불만스러운 대목이라도…….”
“양가의 후생들로 하여금 원로(園老)를 지키고 우의를 닦는 신표로 삼은 글이 아니것소이? 저로서는 신분과 가문의 지체를 뛰어넘어 이렇듯 정황계를 맺응께로 몸 둘 바를 모르것구만이라.”
황상이 감격한 나머지 두어 차례 머리를 조아렸다.
“내 나중 손자가 태어나면 내 손자 이름을 적어서 다시 정황계첩을 쓰려하네.”
“그렇게 하시지요.”
“참으로 기쁘이. 우리처럼 사제의 인연이 자손 대대로 이어가게 생겼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학연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황상 역시 학연의 편지를 받고 두릉까지 왔다가 뜻밖에 정황계를 맺고 보니 이 또한 스승 다산의 사랑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몹시 즐거웠다.
그런데, 학연이 이번엔 엉뚱한 제안을 해왔다. 황상은 십여 일을 학연의 집에서 묵었으므로 이제 강진으로 내려가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나도 아버님을 뵙기 위해 강진엘 내려갈 때면 참으로 먼 곳이구나 실감하곤 했었지. 이보게 치원! 이렇게 올라오기가 오죽 어려운 일인가. 그러니 기왕 올라온 김에 나랑 송도(松都)나 다녀오세. 잘 아다시피 송도는 유명한 명승지가 많은 곳이 아닌가? 정몽주가 피살당한 선죽교며 박연폭포며…….”
“저를 위해 일부러 나들이를 하실 필요까지는 없구만이라. 강진까지 내려가려면 또 여러 날을 보내사 내려가지 않것소이.”
황상이 짐짓 손사래를 치자 학연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슨 소리! 집에서만 지내는 것 보다 우리 함께 걸으면서 더 얘기도 나누고 명산도 구경해 보세나. 우리가 젊었을 때 두륜산을 함께 다녀온 적도 있질 않는가? 참 그 때 내가 「두륜산기」를 지었었지. 어떤가? 이번엔 치원이 송도를 다녀온 소감을 지어보는 것이.”
“고맙구만이라. 가지요. 가고말고라우.”
“내 학유 아우하고도 함께 가려 했으나 몸이 좋질 않아서 못가겠다고 그러네. 정대림이랑 몇몇 젊은 친구들하고 함께 떠나세.”
황상은 생각지도 않게 송도 유람을 정학연 일행을 따라 길을 떠났다. 길은 혼자만이 아니라 여럿이 걸었을 때 흥취가 나는 법이었다. 또 걷는 일쯤이야 자신이 있는 황상이었으므로 내심 날아갈듯한 기분이었다.
박연폭포는 개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마산(天摩山)에 있었다. 설악의 대승폭포와 금강의 구룡폭포, 그리고 천마의 박연폭포가 조선의 3대 폭포였으니 황상이 대자연의 신비함에 절로 감흥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 왕도의 지척에 기절장결(寄絶壯絶)의 대폭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제 마악 삼라만상이 약동하는 푸른 기운이 감도는 것과 때를 같이 하듯이 숫용추처럼 기백 있게 물줄기를 쏟아내는 장관이라니…….
“예까지 왔으니 우리 바위에다 이름 석 자 적어 보세.”
“그럽시다. 오늘을 기념해서 크게 적어보고 말고라우.”
황상이 맞장구를 치자 정학연이 큰 붓으로 정학연이란 글자를 한자로 암벽에 적었다. 그러자 정대림이 망치와 끌을 들고 정학연의 글자가 마르기도 전에 초본(初本)을 뜨고 나더니 음각으로 파내려 갔다. 다음은 황상이었다. 황상의 글씨 또한 정학연이 썼던 글씨 그대로 음각으로 파내려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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