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41
빈계사신(牝鷄司晨)
김현임(수필가)
모 단체의 장을 맡겠다는 도전장을 또 다시 낼 것이라는 그. 기억컨대 두 세 번의 선거에 번번이 낙마를 했으니 그는 7순 중턱 넘긴 나이에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삼수생(三修生)인 셈인가. 지장(智將)은 결코 덕장(德將)을 이기지 못한다했다. 지도자의 덕목 중 으뜸은 무엇보다 너그러운 포용력에 있다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마루로 나갔다.
저 멀리 강물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실내정원 삼아 들여놓은 화분 중 눈에 띤 다홍빛 홍등(紅燈). 대롱대롱 매달린 꽃 이름이 중국인의 등불, ‘차이니스 랜턴(Chinese Lantern)’이란다. 입으로 가만히 화명(花名)을 읊조리자 갑자기 온 집안이 환하다. 도합 세 개의 등불이다. 백주 대낮에 등불을 켜고 참 인재를 찾았다는 디오게네스처럼 불현듯 그 꽃등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싶다.
굳이 그를 꺼려할 이유는 없다. 다만 염려되는 건 매사 호령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까지 보이던, 안하무인, 고압적이던 그의 태도가 염려되는 것이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더라고 남달리 빼어난 그의 외양에서는 영웅호걸의 기상도 엿보인다. 다만 거기에 남을 배려하는 겸손함만 추가한다면 금상첨화이련만... .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해준 좋은 능력을 엉뚱한 곳에 소비하는 이른바 포진천물(暴殄天物)의 선두 주자를 보는 안타까움으로까지 보였다고나 할까. 지지자들과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몇, 몇 원로 분들까지 동원해 표 모으기에 나섰지만 선거에 패배 후, 절대로 결과에 굴복할 수 없다며 고소 운운, 길길이 날뛰던 그가 보인 지난 행보는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추후에도 그는 그런 식으로 대응할 것이 뻔하다며 설왕설래, 그가 보인 처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뒷담화도 적지 않았다.
거금이 오가는 이익단체도 아니고 그야말로 순수를 지향하는 모임이 아닌가. 그러니 고요한 연못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 일구듯 이런저런 불협화음의 소지를 보이는 인사는 부적격이다. 이번 기회에 여성 쪽 누군가를 입후보시켜보면 어떨까 싶어졌다. 그런데 묘두현령(猫頭縣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더니 선뜻 떠오르는 여전사가 없다. 빗발치는 전화 속 회우들의 근심덩어리처럼 세 개의 홍등이 흔들린다. 아직도 요원한 여권(女權)인가. 칠흑 같은 어둠 속 처마 끝에 매달려 흔들거리던 위태위태한 불빛이 선연해지며 한 남자에 매달려 살던 세 여자의 이야기와 겹친다. 밤마다 등을 켜고 남자를 기다리던 여자들. 남자가 들른 날이면 그녀들의 처마에 불이 켜졌던가? 꺼졌던가? 나는 오래 전 기억의 갈피를 더듬는다.
18세기 청나라 때, 콩국 장사로 떼돈을 번 교(喬)씨 저택, 그 교가대원(喬家大院)을 무대로 영화는 펼쳐졌다. 중국 고유의 건축양식인 사합원(四合院), 높은 담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폐쇄적 형태의 신 어르신 저택 안에서 벌어지는 여성 폭력적 이야기다. 전체적으로 기쁠 희(囍) 자 행태로 지어진 부호(富豪)의 집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바깥세계와 철저히 단절된다. 암묵적 서열에 따른 복종을 강요당한 여인들은 오로지 한 남자의 방문만을 기다리는 성적노리개로 전락하는 것이다. 계모의 강요로 대저택의 주인인 신 씨의 네 번째 첩이 된 송련이다. 철저히 통제된 채 관습과 규율에 얽매인 그곳에서 벌어지는 시기와 질투는 여자들을 광인(狂人)으로 만들고 만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한낱 영화촬영지로 변신.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는 위용 떨치는 중국의 대저택 교가대원(喬家大院). 지금은 지저분한 비닐로 덮어놓아 예전의 모습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그 곳의 정원엔 무슨 꽃들이 만개했었을까. 전문가나 해석에 따른 어떤 검증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옮겨놓아 ‘집’이라는 뜻으로 풀어놓아야 할 ‘원(院)’ 자가 액면 그대로 ‘병원’이라는 오역된 한국어 패찰을 달고 있다는 게 오히려 의미심장하다. 출구도, 외부인도 접할 수 없는 숨 막히는 공간에서 서서히 망가져간 송련과 세 여인. 그들이 머물던 교가대원은 정신병원 아니었던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가로막는 편견의 벽을 일러 투명해 만만해 보이지만 절대로 건너 뛸 수 없는 장애물인 유리벽이라고 명명했다. 여자에게 ‘새로운 날 알림’ 같은 중대사는 절대로 맡길 수 없다는 말인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빈계사신(牝鷄司晨)’을 들먹이며 어디서건 여자는 밥이니 국이니 따져서는 곤란하다는 인식도 여전히 팽배하다. 일부 남자 군(群)들이 보이던 횡포에 가까운 행위에도 망나니 아들을 속수무책 바라보는 어머니인양 묵인으로 일관하는, 오랫동안 구습에 오염된 의지박약의 나도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시대는 변했다. 뿌리 깊은 남아선호가 흔들린다. 첫 아이로 65% 넘게 딸을 선호하며 친가보다는 외가 쪽 친족이 친밀도의 우위를 차지하는 모계 위주의 세태로 바뀐 것이다. 명쾌하고 당당한 보폭으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메르켈 총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여권은 쑥쑥 신장 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몇, 몇 거론된 여사(女史)들의 정중한 고사(苦辭)로 내가 꿈꾸던 여성장(女性長)의 기대는 저 멀리 사라졌다.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조물주 역시 남성이어서 붉고 커다란 벼슬과 치켜진 꼬리 깃털, 우렁찬 목청의 특혜를 부여받은 수탉들은 여전히 계명성(鷄鳴聲)의 위용을 떨친다.
작은 오해는 부풀려져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 높이의 견고한 편견의 탑을 쌓기 마련이다. 어렵사리 재도전의 용기를 낸 그에게도 선전의 격려를 보낸다. 이번 기회에 그의 장점에 귀 기울여 보리라. 그리고 바란다. 자신을 향한 이런 저런 우려의 탑을 말끔히 무너뜨려 주기를. 그래서 언제나 찾아가면 즐거운 잔치 마당 같은 단체를 만들어 주기를. 대낮에 환하게 불 밝힌 차이니스 랜턴뿐이랴. 그가 수장(首長)을 목표로 하는 단체를 비롯해 모든 모임은 갖가지 개성 있는 꽃과 수목이 어우러져 만발한 정원이다. 하니 어느 수종(樹種) 하나 함부로 여겨서는 안 된다. 기화요초(琪花瑤草)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누구나 감탄하는 아름다운 뜨락 같은 단체는 요원하지 않다. 세심한 배려와 격의 없는 소통을 일구는 호미자루 든 손길, 그것이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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