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문학의 정화(精華), 한시(漢詩)에 대한 이해
1) 시의 발생
주희(朱熹)의 <시경집전서(詩經集傳序)>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시는 어찌하여 짓게 되었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한 것은 하늘의 본성이요, 사물에 감동되어서 움직이는 것은 본성의 욕망이다. 무릇 이미 욕망이 있게 되면 생각이 없을 수 없고, 이미 생각이 있게 되면 말이 없을 수 없고, 이미 말이 있게 되면 말로는 다할 수 없어서 탄식과 영탄에 다 말하는 나머지가 반드시 자연의 음향과 가락이 있어서 그칠 수가 없게 되니, 이것이 시를 지은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2) 시의 기능
논어(論語)의 양화(陽貨) 편에 이런 말이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아, 왜 시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뜻을 흥기시킬 수가 있으며, 득실을 살필 수 있으며, 무리를 지을 수 있으며,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부모를 섬길 수 있게 하며,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게 하고, 날짐승 길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고 하였다.
3) 시의 성격
성삼문(成三門)은 <비해당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 병인(幷引)>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란, 간혹 직접 사물을 읊기도 하고 혹은 사물을 인하여 심정을 부치기도 하며, 혹은 마음 속의 우울함을 드러낼 때 나오기도 하며, 혹은 아름다운 덕을 찬양할 때 발로되기도 한다. 그리고 남을 비유함으로써 자신을 반성하는 경우도 있고 옛것을 생각함으로써 현실에 감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어서, 이렇듯이 취지가 각각 같지 않고 말도 따라서 다르다. 마음속에 쌓인 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교묘하고 옹졸함을 감추기 어려우니, 그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한다면 거의 포용할 수 있는 도량이 있게 될 것이다.
4) 전통 시대 한시의 의미
한문 문화권의 식자(識者)들은 모두가 시인이었다고 해도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옛날에는 한문을 배울 때 어느 정도 학습 진도가 나가면 으레 어렸을 때부터 시를 배웠는데, 시를 배운다는 것은 남의 시를 이해하는 것과 아울러 당연히 시를 짓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처음에는 평측(平仄)을 따지지 않고 한 구씩 짓다가 다음에는 두 구씩, 그 다음에는 운(韻)을 맞추어 4구의 절구(絶句)를 짓고, 다음에는 운과 대구를 맞추어 8구의 율시(律詩)를 짓는다.
배움의 과정이 높아지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시를 배운다. 유가의 기본 경전에 4시경(詩經)이 들어 있어서 순수한 학문의 차원에서도 당연히 시를 배워야 하였고, 현실적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인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도 시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시는 옛 문인들에게 평생 떠날 수 없는 문예물로서 삶의 동반자였다.
한시는 한문학의 정화(精華)이다. 전통시대에 우리나라는 산업이 미약하여 매우 궁핍한 경제생활을 하였지만 문필 활동은 활발하여 수많은 문장을 남겨 놓았다. 그 문집에 실린 글은 대부분 차원 높은 사상과 뛰어난 문학 작품들로 채워져 있어 차원 높은 정신문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문집들의 상당량을 한시가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옛 문인들의 문필 활동에서 한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비롯하여 산수 유람, 객지 생활, 교유 활동 등 공적 사적의 모든 대소사가 작시(作詩)의 대상이 되었다.
시에는 왕조실록을 비롯한 수많은 관찬(官撰) 사서(史書)나 기타 공적인 간행물에서 다루지 못한 다양하고 내밀한 생활사의 면모가 남아 있다. 따라서 선인들의 정신세계와 전통문화를 이어받기 위해서는 한시에 대한 이해는 필수불가결이다.
● 황상의 이름과 자(字), 호(號)에 대하여
황상이란 이름은 주역(周易) 곤괘(坤卦) 육오(六五) 효(爻)에서 따온 작명이며 자중(子中)은 오행(五行)에 따른 명명(命名)이다.
치원은 卮(巵 술잔 치)는 고대의 ‘梔(梔 치자 치)와 같은 글자이다.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치자에는 네 가지의 아름다움이 있는데 꽃 빛깔이 희면서도 기름진 것이 첫째 아음다움이고, 꽃향기가 맑으면서도 진한 것이 둘째 아름다움이며, 겨울이 되어도 잎갈이를 하지 않는 것이 셋째 아름다움이고, 열매로 노란 빛깔의 물을 들일 수 있는 것이 넷째 아름다움이다” 라고 했다.
성삼문(成三文)은 치자화(梔子花)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그 열매는 연한 금빛 사랑스럽고
백옥 향기 풍기는 꽃 어여쁜데다
겨울에도 안 시드는 잎이 있어서
푸르른 채 눈서리를 견뎌 낸다네.
정약용은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 중 11수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치자는 이 세상에 그야말로 귀하다고
두보가 읊은 시구 응당 거짓 아니라네.
날 저물어 가랑비 속 긴 가래를 들고 가서
한 그루 포기 나눠 여러 그루 얻었다네.
● 치원의 시 감상
(1) 치자의 노래
0 <夢梔子> (치자의 꿈을 꾸고서)
초가집은 오이처럼 조그마한데
마당 빈터 열 평가량 할애하여서
작은 밭을 서너 구역 마련했으니
생계에 보태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네.
개간하여 빈 터라곤 전혀 없으니
채소 심고 반드시 또 바꿔 심는데
몇 그루의 치자나무 자라고 있어
작은 섬돌 곁에서 향내 풍기네.
그 꽃은 담박하여 속기(俗氣)가 없고
풍성함과 맑고 고움 겸하였다네.
가지 열 개면 꽃도 열 개요
꽃이 열 개면 열매도 꼭 그대로라네.
예쁜 잎은 어찌 그리 빼어났는가
하나하나 고운 꼭지 달려 있다네.
어찌 다른 나무에다 비하겠는가
가만히 난초 혜초 짝을 해야지.
일곱 모난 열매 모두 청고(淸苦)한데다
아울러서 큰 약재로 충당된다네.
이별한 지 대여섯 날 지나고 나니
돌아갈 맘 오래도록 이끌리는데
치자가 내 꿈속에 들어왔으니
소중하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0 <田園秋興-梔子> (전원의 가을 흥취 -치자)
꽃 중에서 소보 허유 부류이거니
어찌하여 고운 가지 읊지 않으랴.
세속 끊어 그 향기는 비할 바 없고
무리 떠나 잎사귀는 시들지 않네.
스승께서 이것으로 내 호를 삼으니
바로 네가 그렇듯이 담박하다네.
한 해에도 거듭해서 열매 맺으니
다시 누가 더 있는지 모르겠노라.
0 <梔子行> (치자 노래)
일속산방 그 안에서 노래 정녕 유장(悠長)하니
노래하는 사람은 치원 노인 황상이라.
치자나무 정원 가득, 꽃도 역시 난만한데
검은 얼굴 흰 머리로 어찌 향에 신경 쓰랴.
스승께서 내 호(號) 준 뜻 이제 처음 깨닫나니
내 거친 것 근심하여 본받도록 하신 걸세.
서리 속에 변치 않고 눈 내려도 푸르르며
재목 못 돼 깎이거나 베어지지 않는다네.
꽃 열 개면 씨도 열 개 헛된 꽃이 하나 없어
언행일치 사람 같아 이런 점이 즐겁다네.
꽃은 순백 유지하고 열매 속은 황색이니
자주 초록 간색(間色)처럼 탁한 빛은 아니라네.
말이 없는 이런 스승 알고 있거니와
옷깃 여며 어찌하여 척박한 데 심어두랴.
끊임없이 학업 익혀 부지런히 애를 쓰니
내 나름의 귀한 것이 있다는 걸 누가 알랴.
예로부터 스승 교도(敎導) 그 얼마나 많은가만
어느 누가 사후에도 바로잡아 주시리오.
0 시로 읊는 일속산방(一粟山房)
일속산방설에 대해 김류(金瀏)는 이렇게 말했다.
(무릇 산방은 지극히 작은 집이다. 이와 같이 지극히 작은 집을 지극히 큰 집에 비교하자면 그 작기가 좁쌀 한 톨과 같지 않겠는가? 이미 지극히 작다고 말했다면 그 방의 이름을 일속(一粟)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방에 들어가면 좌우에 온갖 서적들이 쌓여 있고 그 벽을 보면 세계지도가 걸려 있다. 비로소 좁쌀 한 톨 안에 무수히 많은 서적과 무한히 큰 세계를 간직하여 드넓게 여유가 있음을 알게 되니, 세상의 물건 중에 무엇이 좁쌀 한 톨 보다 더 크겠는가?
이로써 말하자면, 좁쌀 한 톨의 뜻은 혹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겨자나 장자(莊子)에서 말하는 한 손가락에서 가져왔는가? 한 마디로 단정해서 처사는 우리 유가의 도를 따르는 사람이지 불가나 장자의 학문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許小癡畵 -一粟山房> (허소치가 일속산방을 그리다)
소박한 집 어찌 그리 적적도 한지
숲 그늘 속 오직 다만 한 칸 뿐인데
자르르 수묵으로 짙게 그려서
뵐 듯 말 듯 시내와 산 배치했으니
한가함을 누리는지 노인 숨겼네.
문은 응당 울타리가 터진 곳이니
낮이라도 항상 닫아 두란 뜻이리.
(詠一粟山房> (일속산방을 읉다)
내 암자는 천지간에 거품보다 더 작은데
안개구름 물과 서로 만난 곳에 지었으니
돌을 뚫고 바위 덮고 대나무 밭 가꾸면서
샘물 트고 샛길 열고 산 속 부엌 설치했네.
기거하기 어색한데 꾀꼬리가 숲 함께 하고
책 놓기도 어려운데 학은 절반 둥지 틀어
누워 족히 굴신하기 뜻한대로 하게 되니
어느 때가 요임금의 시대인 줄 모를러라.
<一粟山房歌 ) <일속산방의 노래)
일속산방 작은 천하 새롭게 이루고서
담복화의 늙은이가 호방하게 노래하니
아이들이 내 백발을 비록 웃어 대더라도
여기 오면 어찌 즐거운 일 많아지나.
눈이 내려 만물들을 순백으로 덮었으니
이 산속에 더 이상은 솔과 여라(女蘿) 안 보이네.
한껏 넓은 유리 하늘 둥근달을 머금으니
어찌 연꽃을 기다려서 밤과 낮을 구분하랴.
텅 빈 마음 잠 못 든 채 인형처럼 앉았자니
이 밤에는 설산 속에 지금 내가 석가인 듯.
한 줄기 향 다 사위고 붉은 등촉 꺼져가니
얘(禮)를 묻는 자손들이 아라한과 한가지네.
경전 뜻을 관통하여 남김없이 하게 되면
천하의 왕 노릇도 이 화락을 어찌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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