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로 엎드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어느 틈에 내 두 뺨에서는 뜨거운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아. 나는 반드시 해낼 수가 있겠구나. 그리하여 끝내는 부처의 얼굴을 그리고 그려서 성불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온 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산문 밖 계곡으로 달려 나갔다. 둥싯둥싯 솟은 바위틈으로 맑고 시원한 청류가 흐르고 있었다. 두 발이 둥둥 구름 위를 걷는 듯 얼얼한 기분이었다. 사방에서 만다라의 아름다운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환희였다. 법열이었다. 제천선신(諸天善神)들이 오색운(五色雲)을 타고 내려와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질녘이 될 때까지 계곡을 오르내리며 한껏 달뜬 기분을 맛보다가 다음 날 아침, 주지 스님에게 어제 일어났던 일을 은근슬쩍 자랑삼아 끄집어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지 스님의 표정이 대번에 험상스러워지더니 여지없이 공박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그 늙은이가 노망을 했군, 노망을 했어. 제 앞길도 추스르지 못한 주제에······.”
낙심천만이었다.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 지장보살님께서······.”
“글쎄, 얼풍수 반풍수 주제에 신도님들을 현혹시키면서 지내더니 아예 이제는 지장보살님 흉내까지 내다니, 미쳐도 한참 미친 게 아니요?”
주지 스님의 말은 뜻밖이었다.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아니, 그 다음 날도 그랬고, 그 다음다음날도 그랬다. 도무지 붓끝이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는 것이었다. 대웅전 단청불사를 함께 하는 다른 화공들이 눈치챌까봐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였다. 서울의 왕보살이 탄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경내에 나타났다.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돈 많고 신심이 깊은 왕보살은 대웅전 단청불사에 3억을 시주키로 약속을 한 터였다. 하지만 그 왕보살은 한꺼번에 돈을 내놓지 않고 가뭄에 콩 나듯이 찔끔찔끔 주었기 때문에 노임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었다. 화공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한두 푼도 아니어서 어르고 다독거리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왕보살은 흐뭇한 미소를 고무풍선처럼 머금고 경내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대웅전 뒤 바람벽에 심우도(尋牛圖)를 그리고 있는 나를 불렀다.
“자, 얼마 안 되지만 맛있는 걸 사먹도록 해요.”
번쩍번쩍 빛나는 핸드백에서 1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거침없이 꺼내는 그녀의 손은 차라리 백옥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손을 쑥 내밀며 받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어정쩡한 태도로 머뭇거리고 있으려니까,
“어서 받아요. 고생들 하니까 주는 거예요.”
하고 왕보살은 거듭 미소를 보내며 받기를 권했고, 나는 마지못해 넙죽 고개를 숙인 다음 수표를 건네받았다. 이 돈으로 화공들에게 회식자리 한 번 멋지게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보살을 수행하듯 따라다니는 주지 스님과 삼직(三職) 스님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등을 돌리려는 순간, 들어서는 안 될 말이 귓등을 스쳐지나갔다.
“그림도 별 것 아니면서 뻐기기는······.”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수표를 오그려 쥐고 있었다.
“보살님, 혹 저한테······.”
나는 저만치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왕보살을 불러 세웠다.
“······왜? 돈이 적나요?”
“······그게 아니라 뻐긴다는 말이 뭡니까?”
갑자기 돌변해버린 왕보살의 말투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미 내 목소리에도 불쾌한 감정이 깔려 있었다.
“그래, 뻐긴다고 했어. 내가 뭐 말을 잘못한 건 아니겠지?”
나는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사실 따지고 보면 노임만 쌓여가고 있는 판이라 일할 맛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부처님 제자로서 어떻게 돈을 밝힐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힘들더라도 꾹 참고 여러 화공들을 달래가며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나 역시 말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왕보살을 노려보았다.
“건방지게 누굴 노려 봐? 노려보면 어쩔건대? 내가 뭐 돈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인 줄 알아? 왜 받았으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안하는 거야?”
왕보살의 말은 곧 불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건방져요? 돈이면 다 합니까? 그 잘난 돈으로 사람의 마음까지 좌지우지 하려는 심사는 뭡니까?”
불사를 시작하면서부터 그 돈의 힘만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왕보살의 오만함에 심한 구역질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어쩌면 그 오만함은 여러 스님들을 비롯해서 공양주에 이르기까지 관세음보살처럼 떠받들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보살이 산문에 들어서면 벌써 주지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이 앞 다투어 여왕 모시듯이 안내를 해왔던 것이다.
“뭐라구? 돈이면 다 한다구? 시방 내가 이 절에 시주한 돈이 얼만 줄 알기나 해? 환쟁이 주제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막 까불고 있잖아!”
왕보살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안내하던 주지 스님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지면서 얼른 사과하라며 손짓을 보냈지만 나는 마구 토해내고 말았다.
“보살님이 절에 오시면 젤 먼저 누구에게 절을 합니까? 부처님이지요? 저는요, 바로 그 부처님의 얼굴을 그리는 불모라구요, 불모! 돈푼이나 받고 그림 파는 환쟁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돈 자랑이나 하는 당신네들 좋으라고 이런 일 하는 줄 아세요? 돈 없는 가난한 사람도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행복하기 때문에 불모노릇 하는 거라구요!”
백 번이고 참았어야 옳을 일이었다. 그런데 당당하기 짝이 없는 왕보살에게 다시 와르르 쏟아내고 말았으니······. 하지만 이미 내 가슴 속에는 저지난달에 있었던 굴욕감도 함께 치밀어 올랐던 것인데, 그것은 귀퉁이 작은 벽에 찌금질을 할 때였다. 내가 그 빈 공간에 달마를 그려 넣은 것을 보고 왕보살이 당장 지우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연꽃이나 한 점 그리고 말 일이지 하필 귀퉁이에 달마를 그려 넣었느냐는 것이었지만 나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달마를 그리면 어떻고 설산동자(雪山童子)를 그리면 또 어떨까. 다 부처님의 말씀을 나타내지 않는 벽화가 어느 절에 있었던가.
결국 하심이 없었던 나는 짐을 싸고 말았다. 하심이 곧 도(道)라고 했고, 출가해서 승려가 되는 것은 생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며 번뇌를 끊기 위한 것이라는 서산대사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말도 실천하지 못한 낙오자였다. 그러나 쌀과 된장만 있으면 어디선들 살 수 없으랴. 왕보살의 거침없는 독설 때문에 단호히 절을 떠났지만, 그것이 승복을 벗고 절 생활을 마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정말이지 깊은 산 속의 빈집에서 쌀과 된장만으로 살면서도 붓을 놓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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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술을 잘 마셨다. 그렇다고 빠르게 마시지도 않았지만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마셨는데 전혀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술이란 조곤조곤 마셔야지 급하게 먹으면 안 돼.”
그녀는 다시 술잔에 입을 갖다 대며 말했는데, 이미 나는 관자놀이께가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참, 사흘 전에 만났던 송주법사 얘길 좀 해볼까.”
“백화암 불사소에서 만났던 무불(無佛) 스님 말씀인가요?”
“그 스님은 한 때 구례 삼일암 암주(庵主)로 있었지.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모친의 죽음에 허무를 느끼고 입산을 했다더군. 그런데 속가의 형이 갑자기 사망하자 스승이 하산해서 형수를 도와주라고 했다더군. 그래서 중장비 작업을 3년 남짓 해서 가게 하나를 형수에게 차려주고 다시 입산했다더군.”
“잘도 아시네요. 그런데 그 스님과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던가요?”
“들어 봐. 지난여름이었어. 그 때도 나는 바랑 하나 달랑 짊어지고 그저 산 따라 강 따라 돌아다닐 때였지. 속마음으로는 지리산 전역을 돌아다녀볼 참이었어. 지리산이야말로 3도(三道) 8개군(郡)에 속해있을 뿐 아니라, 그 둘레만도 800여리에 이르지 않는가.
······청학동을 둘러보고 하동을 거쳐 삼일암을 찾아갔을 때, 산등성을 넘어서자 갑자기 소나기가 마구 쏟아지더군. 몸뚱어리를 두들겨 패듯 쏟아지는데 무섬증이 들 정도였지. 비를 흠뻑 맞고 나자 그렇지 않아도 얇디얇은 블라우스며 청바지가 몸에 턱 달라붙으면서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버렸지. 하지만 그 상황에서 다시 내려갈 수도 없고 해서 내친 김에 삼일암을 찾아간 거야.
그런데 묘한 기분이 들더군. 내가 마치 황진이가 되어 생불(生佛)로 소문난 지족선사를 유혹하러 가는 건 아닌가 싶더라구. 절간은 조용했어. 부처님도 졸고 계셨고, 스님을 비롯한 절 식구 모두 졸고 있었어. 그래서 차마 스님을 부르지 못하겠더군. 그래서 요사 처마 끝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물을 망연스레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으슬으슬 춥기도 하고, 배도 고파오더니 나도 모르게 그만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녀는 동동주 한 모금을 삼키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문득 눈을 떠보니까 무불 스님이 날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더군. 자애로운 눈빛이 아니라 한없이 측은한 눈빛으로······. 나는 황망히 허리를 세우고 합장을 했어. 그리고 배가 몹시 고팠으므로 방으로 들어와 공양을 하라는 말을 기다렸지. 그런데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 거야. 무불 스님의 표정이 험상스럽게 변해지는가 싶더니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치는 게 아니겠어? 한 번, 두 번, 세 번······. 눈앞에서 번갯불이 번쩍번쩍 일어나는가 싶더니 대번에 입술이 찢어지고 입 안 가득 피가 고이더군. 그러더니 무불 스님은 큰 소리로 호통을 치는 것이었어. 비 맞은 옷차림으로 젖퉁이를 내보이며 청정한 도량을 함부로 다니면 되겠느냐구 말이지.
······나는 여지없이 산문 밖으로 쫓겨나왔는데,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지면서 연거푸 뇌성벽력이 산 뿌리를 울리더군. 얼마쯤 내려가다가 다리 하나가 나타나길래 그 위에 벌렁 누워버렸지. 온 몸을 때리는 빗줄기가 이상하게도 상쾌함을 느끼게 하더군. 아아, 그 무불 스님은 나를 방으로 들어오게 해서 옷을 말리게 하고 공양 한 그릇 먹여서 내보냈으면 안 되었을까?”
여자가 땅 속이 꺼지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내가 동동주를 쭉 들이켰다.
“그런데 내 얘길 마저 들어 봐. 삼일암을 빠져나온 나는 구례읍까지 터벌터벌 걸어갔어. 비는 계속 내리더군. 그러나 갈 곳이 있어야지. 마침 여비도 떨어졌었거든.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어느 보석가게 앞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그 보석가게 아저씨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라구. 뭘 도와줄 게 없느냐는 따뜻한 목소리였어. 배가 몹시 고프다고 하니까 가까운 국밥집으로 날 데리고 가더군. 개 눈 감추듯 한 그릇을 해치우고 나니까 비로소 눈이 떠지는 것 같더라구. 꼬박 두 끼니를 굶었었거든. 보석가게 아저씨는 참으로 인정 많은 아저씨였던지 모텔 방을 잡아주더군. 밥도 먹었겠다, 잠잘 곳도 구했겠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넘어 가는구나 싶더라구.
······그런데 샤워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막 눕히려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어? 누군가 하고 문을 열어보니 그 보석가게 아저씨가 친구와 함께 나타난 것이었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그러더군. 술은 양주였어. 몇 잔 마셨더니 금방 머리가 어찔어찔 해오더군.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 친구란 사람은 약속이 있다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떴고, 그 보석가게 아저씨는 거푸 두어 잔을 더 마시고나더니 나를 다짜고짜 쓰러뜨리는 것이었어. 전혀 반항을 하지 않은 채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더니 순식간에 날 알몸으로 만들어버리더군. 그러더니 그가 허겁지겁 옷을 벗기 시작하더라구. 나는 얼른 일어나 가발을 벗어던지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렇게 말했지. 나를 조종하는 또 다른 놈이 있소. 그리고는 천수경을 외우기 시작했어. 정구업진언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보석가게 아저씨가 나목처럼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게 옷을 던져주더군. 그리고 자신도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서 꿈꾸듯 중얼거리는 것이었어. 실은 자기 사촌누이동생도 시방 비구니라구······. 지금쯤 어느 산 계곡에서 아침저녁으로 목탁을 두드리며 지낼 거라구······.
다음 날 아침 일찍 모텔을 나서려니까 카운터에서 여주인이 나를 부르더군. 어젯밤 보석가게 아저씨가 주었다면서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는데, 이십 만원이 들어있더군.”
그녀는 까르르 웃고 나더니 막걸리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한숨처럼 말했다.
“여자는 어디를 가나 왜 말썽만 일어나는 것인지 모르겠어. 정녕 여자는 요물일까?”
동동주 세병이 비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색이 붉게 달아오르기는커녕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내가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키자 그녀는 눈빛으로 다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기어이 내 아픈 곳을 찔렀다.
“참, 이제 어디로 가실 참이지?”
“주문 받은 탱화가 몇 점 있어서 그걸······.”
“화실이 어딘데?”
“······글쎄요.”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모양이지?”
“······.”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머리를 깎아가면서까지 금어가 되겠다고 집을 뛰쳐나갔던 내가 다시 집을 찾아간다면 그처럼 한심한 꼬락서니는 없을 것이었다. 끼니때마다 며느리가 지어올린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재롱떠는 손자 자식을 안겨드리는 효도를 한다면 혹 몰라도.
“무릇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는 차분히 작업만 할 수 있는 작업실이 있어야겠지. 중이 선방이 있어야 참선을 할 수 있듯이…….”
“그야 당연한 말이죠.”
“맘 편히 그림을 그릴 데가 없다면 날 따라와도 좋아.”
“거기가 어딘데요?”
“산 말고 더 좋은 데가 있을까?”
“산이요?”
나도 모르게 갑자기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내 둘째 오라버니가 흑염소 농장을 하고 있다구. 이름은 박격포이고 별명은 타잔인데, 이름에 걸맞게 사냥도 어지간히 잘 하지. 내 오라버니와 함께 이 겨울에 사냥도 함께 하구, 그래서 별미를 맛보는 것도 오죽 좋은 일 아니겠어?”
“사냥이라면 짐승을 잡는다는 말 아니에요?”
“특히 멧돼지 사냥을 주로 하지.”
그녀의 말에 제법 덩치 큰 멧돼지가 눈밭에서 선혈을 뿌리며 나뒹구는 모습이 떠올랐다.
“야생동물을 그렇게 함부로 죽여도 되나요? 최근에는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도 많아졌다던데······.”
그녀는 제법 옳은 말을 한다는 듯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한 말이지. 그러나 그 놈의 멧돼지 때문에 인간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고 있는 줄 몰라. 호랑이나 늑대가 사라져서 생태계가 파괴된 까닭이겠지.”
“그렇다고 어떻게 생명이 있는 것을······.”
“물론 생명은 존귀하지. 하지만 죽자 사자 촌로들이 일궈놓은 과수밭과 콩이며 배추며 옥수수를 가리지 않고 한순간에 초토화시켜버리는 야생동물 때문에 골치가 아픈가 봐. 산전 농사 고라니 좋은 일만 시킨다는 격으로 말이지. 그러다 보니 인간이 살기 위해 방어적인 차원에서 포획을 한다고나 할까.”
나는 잠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남의 신세를 어떻게······?”
나는 머뭇거렸고 선뜻 따라나서겠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실은 나도 이제 그만 방랑을 접을까 해. 더구나 금방 겨울이 다가오고 있잖아. 그런데 그 곳엔 직접 불을 때는 온돌방이 있고 땔감은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까 좀 좋겠어?”
“그렇게 좋은 환경이 주어졌는데도 왜 그리 방랑을 했습니까?”
“무엇을 그릴 것인가? 그게 내 화두였지. 부처님께 심신을 가탁하려는 생각 또한 갖게 된 것도 다 그것에 따른 방황이었던 것 같애.”
그녀가 먼저 벌떡 일어나서 반달 모양의 철제 다리를 건너갔다. 나도 덩달아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어떤 힘에 의해 절로 발걸음이 옮겨지고 있었다.
“암말 말고 따라와 봐. 우리 오라버니가 서운케는 대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대환영을 할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잖아도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 수렵장을 이용할 수 있다더군. 멧돼지는 물론이고 고라니, 청솔모, 꿩, 멧비둘기, 청둥오리 등을 맘 놓고 잡을 수 있다더라구. 암튼 내일 정오에 관광시설지 앞에서 만나자구.”
그녀는 아예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 나갔다.한마디로 너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나는 어느 틈에 그녀의 뒤를 슬금슬금 따라가고 있었는데, 이미 거미줄 같은 끈으로 알게 모르게 묶어진 상태라고나 할까.
“참, 내 이름은 여강이라고 해. 박 여강.”
그녀가 저만치 걸어가다 말고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이름을 밝히더니 거듭 권했다.
“이번 겨울을 산에서 한 번 살아보자구. 자신의 일상에 뭔가 변화를 주는 것도 좋은 일 아니겠어? 더군다나 생전 해 본 적이 없는 사냥 경험을 할 수 있으니 좀 좋지 않겠느냐구.”
그러나 나는 살생에 가담해야 한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웠다. 부처님을 그리는 사람이 살생이라니······. 불벌을 받아도 크게 받을 일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짐승을 죽이는 사냥은 못할 것 같은데요.”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입술을 비꼬며 말했다.
“진정 사냥은 환생을 못해 몸부림치는 짐승들을 구제하는 일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구제라니요? 무참하게 살생하는 일을 두고······.”
“살생이 아니라 보살행이지. 그래서 사냥꾼은 바로 그 짐승들을 도와주는 보살이구.”
“여시축생발보심이란 말도 못 들어 보셨나요? 하찮은 동물일지라도 보리심을 일으키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보리심을 기르기는커녕 살생을 두고 보살행이라뇨? ”
“죽어야만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지. 축생의 윤회를 벗어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케 하는 일이 사냥이라구. 그래서 오라버니는 사냥을 시작할 때 북어대가리와 과일을 차려놓고 환생하지 못한 불쌍한 짐승들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더군. 막상 짐승이 잡히면 그 녀석의 귀를 잘라 땅 속에 묻고 제발 이제는 환생해서 좋은 세상 한 번 살라고 다시 기도를 하더라니깐.”
여자는 거침없이 말했고 나는 자꾸만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법능 화사는 부처님께서도 전생에 축생까지 윤회하셨다는 사실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여자는 홱 돌아서서 다시 걸어 나갔다. 나는 그녀의 말에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는데, 이윽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 그래, 저 여자를 한 번 따라가 볼까? 화실도 화실이지만 본디 여자는 한 세계를 갖고 있다질 않는가. 그런데 저 여자에게는 여자란 사실 말고도 또 하나의 세계를 가진 것이 분명해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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