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법(泡法 차를 일궈내는 법)
다신전 전체에서 사실 포법장에 이르러서야 정작 다도의 요체인 행다(行茶)의 법식을 조금 엿볼 수 있다. 물론 찻잎 얻는 일에서 시작되어 차를 만드는 일, 장다, 변다, 불가늠, 물의 선택, 심지어 차 설거지하는 위생장(茶衛)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있는 것이 없다.
사실 다신전 전체가 차의 살림살이이자 다도의 중심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도의 꽃은 행다가 펼쳐내는 예술적인 멋이 아닐 수 없다.
차를 달이면서 늘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옛사람들은 어떤 자세로 어떻게 차를 울궈 마셨을 까. 찻그릇의 배치나 찻상의 종류, 찻잔의 크기, 모양새, 물의 식힘과 차에 따른 열탕, 잔받침 또는 물 끊인 화로의 위치와 다관 등 여러 가지 행다의 옛법을 헤아려 보았다.
일본차에서처럼 엄격한규칙 즉 센노리뀨가 고안한 법식인 사규칠칙(四規七則)같은 것은 없다 하더라도 어떤 행시다의 법식이 전통의 문헌으로 담겨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다.
물론 차증류에 따라 차법이 달라지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자다법(烹茶法), 포다법(泡茶法) 점다법 (點茶法)에 따라 여러 가지 다구 들의 쓰임의 배치 또는 화로나 차설거지 그릇까지 각기 상이하였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 고려와 조전의 오랜 세월 속에 나라마다 격은 말할 것도 없고 더구나 문화학적으로 보더라도 시대별 즉 50년 단위로 문화풍토나 인습이 바뀌어지는 것인데 그런 것을 역사적인 고찰이나 문화적인 문헌고증이 연구되지 않은 채 전통이라는 미명으로 추이해서는 정말로 위험한 오류를 범하기 쉽다.
복장만 하더라도 시대별 복식사가 검증되지 않으면 마치 백제나 고려시대 전체가 그 의상만 입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면 지금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 KBS 드라마 왕건을 보면 궁중에서 다도가 일상화되어 마시는 장면이 보여지고 있다.
그런데 굽이 높은 신라 초기나 고구려 시대 때 쓰는 토기 그릇으로 차를 마시고 있다. 신라에서도 이미 청자가 나왔다. 단지 비취색 상감기법의 고려 청자가 11~12세기에 걸쳐 세계적인 우수한 청자문화를 꽃피워 냈던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고려가 건국되기 전 후삼국시대에도 많은 그릇들이 생산됐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신라 초기의 토기그릇으로 차 마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은 객관적인 검증이 없는 위험한 일일 것이다. 많은 차인회들이 있음에도 어느 차회 하나 제대로 짚어주지 않아 안타깝다.
비단 그것뿐이랴! 한국 전통차문화를 연구하는 수많은 단체에서조차 중국차를 상용하는 마당에 어찌 우리 전통차 문화가 꽃피워 지겠는가. 실로 염려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 차문화 단체에서 우리 차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차문화 전통을 이어 갈까?
이런 마당에 다신전 '포법장 이 비록 장원의 《다록》에서 또는 《경당증정 만보전서》였건 모환문의《다경채요》에서 사출했던 간에 초의스님 시대의 행다요체를 엿볼 수 있으므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본문을 살펴보면 물 끓음이 잘되었는가 세심하게 살펴 그 끊은 물의 용기를 들어 옮기는 일로 시작된다. 다관(壹中) 즉 찻그릇에 탕을 조금 부어 그릇의 찬 기운을 없애고 찻잎을 넣는다. 그런데 여기서 찻그릇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예열의 좌정도 중요하지만 꼭 지적해야 할 것이 다름 아니라 물 식힘 그릇이다. 70년도에는 물 식힘 그릇 없이 각각의 찻잔에 물을 부어 뜨거운 물을 식히고 (袪泠), 뿐만 아니라 차 마시는 사람의 수에 따라 찻잔으로 물가늠도 하였는데 어느 문헌에 숙우에 관한 기록이 있는가?
다관에 찻잎을 넣는 분량을 잘 맞추어 즉 많고 적음을 헤아려야 하는데 여기서 알맞음을 그르치면 안 된다. 차가 무거우면 다시 말해 양이 많으면 차맛이 쓰고 차향기가 가라 앉는다. 차향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싱그러운 차향기가 안 뜬다는 것이다. 반대로 차보다 물이 많으면 차색은 밝으나 맛이 부족하다. 장원의 다록에는 차색은 맑으나 차의 기가 떨어진다고 되어있다.
두 번 차호를 사용한 후에는 냉수로 맑게 씻어 찻그릇을 신선하게 하여야 한다(兩壺後 又用冷水 湯繼滌 使壺潔)고 말하며 그렇지 않으면 차향기가 반감한다고 적고 있다.
우리 음다 풍토에서는 엄격한 찻자리의 규범이 없기 때문에 손님과 차를 마시다 조금 늦게 찻자리에 오는 손님도 함께 마시는 수가 많다. 그럴 때 다신전의 원형대로 사용하던 다관을 비워내고 냉수로 씻은 다음 차를 넣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한두 번 울궈냈던 다관에 다시 차만 조금 넣어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차를 한두 번 먹고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렇겠지만 일본차나 중국차에 비해 우리 차는 몇 번이고 우려 마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실 중국차나 일본차는 우리 차보다 훨씬 싱겁다. 그렇다고 해도 차호는 반드시 신선해야한다.
특히 차 마신 후에 찻그릇을 냉수로 씻고 물기를 말려 간수하지 않으면 다음 찻자리 때 차의 색, 향기를 그르치게 된다. 차호 즉 다관이 신선하지 못하여 열기가 있으면 차신이 건전치 못하다(不礭慫 茶神不健). 다관이 청결하여야 물의 성품이 항상 신령스러운 것이다.
청결하고 밝은 다관의 차와 물이 잘 어우러지게 되고 그런 연후에야 차를 걸러서 마시게 되는데 여기서 거르는 문제도 차를 우려내는 일로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오늘날 삼베나 무명 또는 다른 거르는 웅기를 사용하여 마시는 풍토가 대부분인데 옛날에는 차호 즉 다관의 주둥이의 여과관이 섬세하지 못하고 구멍이 커서 삼베나 무명, 비단 그 밖의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굳이 조롱박에 모세를 대어 그것으로 울궈 마시는 일은 실로 점잖은 음다문화의 풍속상 볼썽사납다. 다시 말해 거르기를 조심스럽게 해야한다. 울궈내는 것을 너무 빠르게 하여도 늦게 하여도 안 된다는 것이다. 빨리 울궈내면 차신 즉 맛과 향과 색과 향기가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늦게 울궈내면 미묘한 향기가 먼저 녹아나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차의 충화(沖和) 즉 물과 차의 잘 어울려짐을 통해 다신의 삼매(三昧)를 보듬어야 하는데 정통의 다도에 너무 치우치면 우리의 삶 속에 깃든 기호 문화의 멋스런 맛을 잃게 된다는 것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일이다.
사람의 마음자리, 삶의 정황 즉 분위기에 따라 또는 계절의 변화와 손님에 따라 각기 다르게 마실 수 있는 것이 차의 문화다. 차 향기만을 독특하게 느끼고 싶을 때도 있고 차맛만을 짙게 마시고 싶을 때 또는 차색의 미묘한 빛깔에 취하고 싶은 찻자리가 있는 것이 차생활의 멋인 것이다. 가령 매화꽃 향기 가득한 봄날 오후, 매화향과 차의 비취색이 어울려서 마신다고 생각해 보자. 그 찻자리에 차향기가 필요하겠는가? 눈오는 깊은밤 차향기 가득한 그릇에 하얀 눈(雪)빛을 느끼는 찻자리든가, 온 산이 술 취한 듯 붉은 단풍잎새를 깔고 가을의 묘향을 즐기는 찻자리를 그 어떤 찻빛으로 대신하겠는가!
그래서 차는 마음이고 마음이 곧 차라는 선다일미(禪茶一味)의 깊은 맛을 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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