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 이렇게 합시다요잉.
우선은 며칠은 여기에 계셔야 될 거예요. 대피소에 계시는 동안에 식사를 하시건 또 다른 일을 하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저희가 하겠습니다.
2019년 4월 5일 강릉 옥계면 노인복지회관
2019년 4월 4일 강원도 고성군에서 발생한 산불은 최대 최악으로 기록될 만 했다. 이낙연도 총리로서의 인생 장면으로 잠들 수 없던 그날 밤을 손꼽는다.
“그날 강풍이 불었어요. 손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걸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새벽까지 기다렸습니다. 굉장히 긴 밤이었습니다. 그래도 눈앞이 캄캄해진 사람들에게 위로만 할 게 아니라 눈앞을 보이게 해드리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경향신문 인터뷰 2019.12.23.)
다음 날 이낙연 총리는 바로 고성으로 달려갔다. 산불로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주민들을 찾아가 마주 앉았다. 울먹이며 어떻게 하냐는 어르신들에게 “려러분들 이렇게 합시다요잉” 친근한 남도 억양의 사투리를 써가며 차근차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누가 메모 좀 해주세요. 어르신 가운데 고혈압 약을 잡수시거나 만성질환을 앓고 계신 분들. 약을 못 가져온 분들이 계실 수가 있어요. 그런 분들은 빨리 의약품을 확보해서 드려야 해요. 조사해서 차질없이 드리도록 할게요. 그다음에 임시거처를 곧 마련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디 안 갑니다. 살던 데에서 살게 해주세요.”
“물론, 물론이죠. 그리고 인시거처 컨테이너도 기왕이면 사시던 곳 가까운 쪽으로 해드릴게요. 저도 시골출신입니다만 시골 사는 사람들은 멀리 가면 안 되잖아요? (……) 혹시 여러분 가운데 농사짓는 분들이 계시면 볍씨도 다 타버려가지고, 볍씨를 무상으로 공급해 드릴게요. 농협하고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다음에 농기구 필요한 것을 지원해 드릴게요. 어른들께서 하셔야 될 일은 너무 마음 상하지 말고, 아프지 말고, 그렇게 하세요.”
영상을 통해 접한 이 총리의 이날 대화는 할 말을 잃게 했다.
20여 년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사람들의 말을 세심하게 살펴온 내가 보기에 총리의 대화엔 깊고 단단한 세월의 내공이 들어있었다. 어떤 지인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고 내게 문자를 보내기까지 했다. 단연 이낙연 총리 최고의 어록이 되겠구나 직감했다. 상대가 듣고 싶은 말. 특히 목이 마르고 상처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현실의 언어가 바로 그의 말이었다.
이낙연 총리가 이날 이재민들과 나눈 대화는 재해 현장에서 공직자들이 매뉴얼로 삼아도 될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피해 주민들의 마음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진지한 노력이 숨이 있다.
이 총리는 전남 영광이 고향이지만 평소에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표준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며 말도 글처럼 구사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굳이 사투리를 쓴 것은 주민들의 닫힌 마음을 편안하게 열기 위해서다. 뒤에서는 아예 “저도 시골출신입니다만, 시골 사는 사람들은 멀리 가면 안 되잖아요?”라며 흉금을 털고 다가선다.
이 총리는 피해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의료 서비스가 취약한 시골의 고령자들이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복용 중인 약이다. 다음이 몸을 뉠 곳이고, 농사 준비이다. 매일 살펴야 할 논밭이나 소와 돼지를 놔두고 어찌 멀리 갈 수가 있겠는가. 총리는 상대 마음을 다 읽고 있다는 듯이 하나씩 꺼내서 방법을 제시한다. 듣는 사람은 ‘저 사람이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네.’하면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정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과 함께 진심이 담긴 위로와 용기를 건넸다. 그 장면에서 ‘아, 그가 국회의원과 도지사도 했지.’라는 생각이 번쩍 든다. 현장 중심의 언어는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힘이다. 그래도 어떻게 이런 대화가 가능할까. 국회의원 시절부터 10여 년 그와 함께 일해 온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나 다를까 간단했다.
“그동안 계속 해 오던 거예요.”
이낙연은 2000년 국회의원 때부터 2017년 도지사까지 17년 동안 전남의 농어촌을 속속들이 살폈다.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지론으로 주말·휴일을 반납한 채 성심성의를 다해 민생을 살폈다. 오랫동안 현장에서 습득한 언어를 기억하고 그걸 바탕으로 주민과 소통했다. 그러니 총리가 되었어도 일하는 곳이 바뀌었을 뿐이지 그가 해오던 일은 변함이 없는 셈이다. 국민과 가장 가까운 총리의 발견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총리가 나눈 산불 피해 주민과의 대화는 내게 지도자의 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지도자의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실감하게 했다.
사실 당시 정부에 대한 민심은 식어가고 있었다. 미세먼지 수치가 연일 심각해지면서 정부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있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재개발 지역 내 상가를 매입한 것이 사실과 다르게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번지면서 공정한 사회를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에게 적잖은 타격을 주었고, 인사청문회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두 명의 장관 후보자에 대한 잡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4월 3일 치러진 재보궐 선거의 성적도 좋지 않았다. 이 결과를 전문가들 상당수는 정부·여당에 대한 국민의 경고로 해석했다. 이런 가운데 대형 산불이란 악재가 터진 것이다.
산불처럼 정부·여당을 향한 민심의 분노가 크게 일겠구나 걱정하고 있던 차에 총리의 산불 진화 행보는 극적인 반전을 만들어냈다. 4월 5일 당직이 걸려 초긴장 상태에서 세종청사 당직실에서 당직을 서던 나는 “총리님께 번했다.” “총리님께 감사드린다고 꼭 전해달라.”는 뜻밖의 민원전화를 받게 되었다. 수화기로 전해지는 진심에 울컥했다. 리더의 말은 이렇게 대중의 마음을 바꾼다.
이 총리는 그 뒤에도 주말에 수차례 고성을 찾았다. 피해 주민의 삶을 사피고 복구 과정을 직접 두 눈으로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2019년 4월 방문했을 때 한 주민이 와락 안기며 흐느끼자 그는 꼭 안고 토닥이며 말한다.
“힘껏 도와드릴게요. 아이들도 있을 텐데. 어머니가 이렇게 약하면 안 되지. 엄마가 약하면 안돼요.”
다음 일정으로 자리를 떠야 했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에 걸렸던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또 올게요.”
이 총리의 행보를 줄곧 취재해 온 연합뉴스 김승두 기자는 그때 이 총리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정말 가슴 아파 했어요. 강원도 고성처럼 재해 현장이 생기면 다녀오고, 그 뒤로도 계속 이야기하면서 걱정하고 아파해요. 과거에 보면 정치인이나 공직자나 생색내기로 언론 보도를 위해 사진 한번 찍으러 방문하는 일이 많거든요 이 총리는 그게 없습니다. 다시 방문해 잘됐는지 확인하고 떠날 때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면 반드시 약속을 지켰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고, 또 말에는 힘이 생기기도 한다. 어떤 요란한 수레보다도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이다. 고성에서 들려준 이낙연의 말이 그랬다. 그건 아픔을 껴안고 있는 언어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었다.
글: 이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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