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어온 길 윤재준 (주)선도소프트 사장 회고록(12회)
l 가정교사
내 삶은 아주 험난했던 것도 아니고 아주 평범했던 것도 아닌 듯싶다. 국민소득 100불 미만의 시대에 태어나서 자란 사람은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내가 50중반이 될 때까지도 경제적으로 별로 여유롭지 못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많은 돈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아버지께서 우체국장이신데다 농사도 지었으니 보통의 생활이었다. 문제는 대학부터였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려면 등록금에 하숙비까지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했다. 자연히 자립의 길을 찾아야 했다.
때마다 살아가는 길이 마련되어 지나보다. 당시는 가정교사 직업이 대학생들의 삶의 수단이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가정교사를 해서 하숙비와 학비를 해결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입주하면 숙식이 해결되면서 학비를 벌 수 있었고 시간제로 하면 월급을 더 많이 받아서 생활비와 학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가정교사 시작과 학생들의 과외 수요가 딱 맞아 떨어졌던 시기였다. 그러니 나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직업을 가진 셈이다. 가정교사 일자리로 서울 공대가 가장 인기가 좋았다. 그렇지만 어떻게 구하느냐가 항상 어려움이었다.
보통 일간 신문에 ‘서울공대’ 라는 선생 소개와 ‘전화번호’를 기재한 광고를 낸다. 가정교사 광고는 대부분 서울대생이었고, 그 외 연세대와 고려대가 조금 있었다. 보통 신문 지면에 3-4줄로 가정교사 광고만 게재된다. 문제는 전화 사용이다.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모바일 폰을 가지고 있지만 그 때는 여유 있게 사는 사람 외에는 집에 전화가 없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화는 백색전화라고 해서 몇 백만 원에 거래되었다. 신문에 광고를 게재한 다음 전화 옆에서 하루 이틀 전화를 받은 다음 가정교사 일을 결정한다. 그러니 전화 사용부터가 구하기 힘들었다.
처음 가정교사는 효자동 근방에 경기중 3학년 생이었다. 김광현이란 학생은 착실하고 공부도 잘했다. 내가 오히려 실력이 딸릴 정도였다. 공능동까지 학교 다니랴 자취생활 하랴 가정교사 하랴 왔다갔다하는 길에 많은 시간을 버렸다. 도저히 시간제 가정교사를 할 수가 없어 입주제로 바꾸었다. 입주제 가정교사는 약수동에 사는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이 학생은 공부를 너무 못해서 좀처럼 성적이 올라가지가 않았다. 아마 나는 나 혼자 공부는 잘했지만 학생을 가르치는 자질이나 기술은 없었던 모양이다. 자연 주인집 눈치를 봐야 하고 신경이 많이 쓰였다. 이러다 보니 학교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고 고등학교까지는 칭찬을 들으면서 리딩 (leading)을 해왔는데 갈등이 심해져서 학교를 휴학하기로 마음 먹었다.
l 휴학
이런 환경이다 보니 신경이 쇠약해진 기분이 들어 한 해 휴학한 후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하기로 마음 먹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 등록기간이었다. 집에서 등록금을 보내주시니 다시 휴학하기가 망설여졌다. 서울대학교 등록은 어려운 사람을 고려해서 3차 등록까지 허락되었다. 집에서 보내주신 등록금을 갖고 대학 본관 등록창구에 가서 망설였다. 마침 같은 과인 한홍택이를 만났다. 등록금이 없어서 휴학을 하려고 한단다. 그래서 나는 어차피 휴학하기로 마음 먹었고 내 호주머니에 등록금이 있었으니 한홍택이더러 등록하라고 등록금을 빌려줬다.
그 당시 국가경제가 미미하였으므로 학교에 장학금도 많지 않았다. 서울공대에서는 유일하게 미 8군 장학금이 두 사람에게 지급되었다. 미 8군 장학금은 학비 외에도 용돈까지 줄 정도로 많은 금액이었다. 나는 집에 휴학한다고 이야기도 못하고 계속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이번에는 돈암동에서 정형외과를 하는 조카뻘 되는 도암 사람 윤경현씨 집이었다. 아들은 경기고 3학년이었고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머리가 다 큰 녀석이라 시간을 정해 놓고 공부 가르치기가 부담이 되었고 그냥 동생처럼 지냈다. 사실 가정교사를 구하려고 윤경현씨 집 전화를 빌려 쓰던 참에 윤경현씨 부인이 그냥 집에 와 큰 아들과 함께 지내라고 해서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한홍택군에게 빌려준 등록금은 그 해 겨울 방학 때까지도 받지를 못했다. 바로 돌려주겠다더니 늦어졌다. 집으로 돈을 받으러 갔는데 그 친구는 기타를 사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 뒤로 한군은 다행히 그 학기에 미 8군 장학금을 받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어서인지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그 뒤 학위를 마치고 대학교수가 되었으나 한번도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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