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옥색 계곡물이 휘감고 흐르는 금환락지(金環落池) 형국
전남 3대 정원 중 하나인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바로 아래의 땅
초의선사 ⌜백운동도⌟의 꼿꼿이 우뚝 선 옥판봉이 훤히 보이는 곳
백운동 별서정원
한양대 정민 교수는 강진 백운동白雲洞 별서정원이란 책 서언에 “들어가는 초입의 하늘을 가린 동백나무 숲길과 원경으로 잡히는 월출산 옥판봉의 웅자,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강진다원의 차밭과 3만 제곱미터가 넘는 대지에 펼쳐진 울창한 대숲, 오밀조밀 옹기종기 구색을 갖춘 정자와 화계의 짜임새 있는 배치, 기품 있는 매화와 소나무, 아름드리 비자나무 그늘, 그리고 정선대 아래쪽의 차밭과 정자, 물길만 회복하면 사시사철 옥색 물이 폭포를 이뤄 흐를 계곡과 이 물을 끌어와 마당을 한 바퀴 돌아 나가도록 설계된 아홉 구비 유상곡수 등 백운동의 매력은 참으로 끝이 없다.”며 백운동 별서정원을 극찬했다.
그는 이어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이곳을 직접 방문해 백운동 12경시연작을 지었다. 또 이때 제자 초의草衣(1786~1866)에게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친필 시를 합첩한 ⌜백운첩白雲帖⌟을 남겼다. 이를 이어 다산의 제자 황상黃裳(1788~1870)과 이시헌(백운동 5대 주인, 李時憲 1803~1860)이 스승의 시에 화운해서 12경 또는 14경 연작시를 지었다. 초의와 소치小痴 허련 許鍊(1808~1893) 등도 이곳을 찾아 시를 남겼다. 이외에도 백운동과 관련된 역사 문헌은 꽤 풍부하게 전해져온다”고 설명했다.
사실 백운동 별서別墅는 월출산 옥판봉 남쪽 산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담양의 소쇄원瀟灑園과 명옥헌鳴玉軒, 강진의 다산초당 및 해남의 일지암一枝庵 등과 더불어 호남 전통 원림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강진군 성전면 안운마을로 속해 있는데, 그 마을에서도 약간 떨어진 울울창창한 동백숲과 옥색 계곡물이 흐르는 곳으로 강진군에서 백운동 생태공원을 조성하면서 크게 알려진 상태다.
⌜백운동도⌟ 송영방 1990 이효우 소장
⌜백운동도⌟와 백운동 12경
⌜백운첩⌟은 표제에 예서로 ‘백운첩白雲帖’이란 세 글자를 썼다. 표지를 넘기면 첫장에 ⌜백운동도⌟가 펼쳐진다. 화면을 다산이 꼽은 12경의 설명에 맞춰 따라가 보자. 우측 상단에 큼지막한 주문朱文과 백문白文을 섞은 음양인이 찍혀 있다. 상단에 가로로 길게 쓴 한자는 백문으로 새긴 ‘백白’자이고, 하단 중앙에 역시 백문으로 ‘운雲’자를 새겼다. ‘운’자 양옆에는 주문으로 ‘산山’과 ‘수水’ 두 글자가 보인다. ‘백운산수白雲山水’ 네 글자를 새긴 것인데 집주인인 이시헌의 장서에 자주 보이는 인장이다. 성첩成帖 당시에 찍은 것이다. 하단에는 ‘정우당서화장 淨友堂書畵藏’이라 새긴 주문의 목인木印이 찍혀 있다. 정우당의 정우淨友는 연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백운동의 본가인 강진군 성전면 금당리 연당의 사랑채 이름이다. 백운동 별서에 소장되어 있던 이 시첩이 어느 때인가 금당리 본가로 옮겨져 보관되었던 사정을 짐작케 한다.
그림을 살펴보자. 먼저 화면의 오른쪽 중앙에 백운동 별서의 본채가 들어 있다. 디귿자로 둘러친 담장 안에 놓인 기와집 한 채가 바로 ‘백운유거白雲幽居’의 해묵은 현판이 걸려 있는 본채다. 그 아래쪽에 보이는 초가집이 취미선방이라 불린 사랑채다. 그 아래로 섬돌을 쌓고 중앙에 계단을 두었다. 현재의 본채는 한국전쟁 때 전소된 옛 본채 자리에 새로 지은 것이다. 화면상 본채와 사랑채가 약간 비껴 있고 본채 중앙에서 화계를 따라 계단이 층을 지어 내려오는 구조다.
이제 다산의 명명에 따라 화면 속 12경의 풍광을 차례로 불러보자. 제1경은 그림 좌측 상단에 삐죽삐죽 나란히 늘어선 ‘옥판상기玉版爽氣’다. 다산은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이야말로 백운동의 첫손 꼽는 풍경이라고 칭찬했다.
제2경은 화면 좌측 하단 백운 별서로 접어드는 소로와 그 양편의 동백나무 군락을 가리키는 산다경의 ‘유차성음油茶成陰’이다. 화면상 옥판봉 아래쪽 하단에는 소나무 군락이 층지어 나오고 초가집 몇 채의 부락이 보인다. 다시 아래로 백운 별서 초입의 소로와 우람한 동백나무가 관찰된다. 중앙에 우뚝 솟은 바위 뒤편과 아래쪽에도 동백나무가 있다. 산다山茶 또는 유차油茶는 모두 동백나무의 별칭이다.
제3경은 백매오白梅塢의 ‘백매암향白梅暗香’이다. 집 둘레 언덕에 심어진 100그루의 매화가 눈 속에 붉은 꽃을 일제히 피우면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었을 법하다. 화면 속에는 사랑채 섬돌 아래, 뜰 건너편 작은 누대 옆에 매화 두 그루만 그려 놓았다. 백매오의 매화는 다산 정약용이 방문했을 당시에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제4경 홍옥폭紅玉瀑의 ‘풍리홍폭楓裏紅瀑’이다. 산다경이 화면 중앙에 솟은 바위와 만나기 직전 돌다리가 놓였고 바위와 다리 사이로 시내가 폭포를 이루며 쏟아져 내린다. 폭포의 물에 바위 위의 단풍나무 붉은빛이 얼비치면 물색이 마치 홍옥紅玉과 같다 해서 이처럼 멋진 이름을 얻었다.
제5경은 집 옆 시냇물을 끌어다 마당을 굽이굽이 돌아 나가는 ‘곡수유상曲水流觴’의 유상곡수(流觴曲水다. 유상流觴이란 물길 위로 술잔을 흘려 띄운다는 말이다. 두 채의 집 축대 아래 마당 가운데를 휘돌아 나가는 구조인데 화면에는 구도상 유상곡수를 그리지 않았다. 곡수曲水는 물길을 꺾어 굽이굽이 돌아 나가게 만든 장치를 가리킨다. 그 위에 배 모양의 잔 받침을 놓고 술잔을 띄웠다. 다
제6경은 창하벽蒼霞壁의 ‘창벽염주蒼壁染朱’로 그림 하단 중앙 시내 옆에 우뚝 솟은 바위 절벽을 가리킨다. 다산은 시에서 이곳에 붉은색 먹으로 굴자를 써두었다고 했다. ⌜백운동도⌟ 속 바위 전면에도 글씨처럼 보이는 붓질이 있다.
제7경은 화면 오른쪽 하단에 봉긋 솟은 소나무 군락이 있는 언덕인 정유강 貞蕤岡의 ‘유강홍린蕤岡紅麟’이다. 정유貞蕤는 소나무의 별칭이고 홍린紅麟 은 소나무 껍질이 붉은 용의 비늘 같대서 붙인 이름이다. 화면 우측 하단 아래쪽에 위로 솟은 소나무 여러 그루가 보인다. 실경보다는 훨씬 더 오른쪽에 치우쳐 그려졌다.
제8경은 모란을 심은 화단의 모란체牡丹砌의 ‘화계모란花階牡丹’이다. 그림에서는 화계가 드러나지 않는다. 본채에서 앞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축대는 3단으로 되어 있고 계단 양쪽에 화계가 조성되어 있는데, 화면 구도상 화계를 생략했다.
제9경은 취미선방의 ‘십홀선방十笏禪房’을 꼽는다. 본채 바로 아래 초가를 얻은 세 칸짜리 사랑채다. 십홀은 좁은 크기를 나타내고 선방은 내부의 조촐함을 드러낸 표현이다. 원래 없어졌던 건물인데, 강진군에서 2009년 원래 모습대로 복원했다.
제10경은 풍단楓壇의 ‘홍라보장紅羅步障’이다. 화면 가운데 솟은 바위에서 집 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다. 단풍철에 잎이 물들면 온통 붉은 비단 커튼을 둘러친 것 같대서 이렇게 불렀다. 중앙 바위 위에 길쭉한 잎으로 그린 나무가 있는 위치다. 시선에 잡히지 않아 화면에서는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제11경은 정선대의 ‘선대봉출仙臺峯出’이다. 화면 오른쪽 하단의 나무들이 군집해 선 둥근 언덕 위에 초가지붕만 드러나 있는 작은 집이 바로 정선대다. 이곳에 올라서 보면 대각선으로 옥판봉의 웅장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오늘 날에는 건너편 숲이 웃자라 정선대 위에서는 옥판봉의 모습이 시야에 잘 잡히지 않는다.
제12경은 운당원篔簹園의 ‘운당천운篔簹穿雲’을 꼽는다. 운당篔簹은 왕대나무인데 화면 우측 중앙의 대나무 숲이 바로 그곳이다. 본채의 울타리 우측에 무성한 대숲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숲은 집 뒤란의 숲에도 드넓게 조성되어 있다.
초의는 부감俯瞰의 시선으로 전체 화면을 잡아서 스승이 노래한 12경의 풍광을 하나의 화폭 안에 빠뜨림 없이 담아냈다. 간결한 필치와 과감한 생략으로 전체 상의 큰 왜곡 없이 백운동의 전경을 잘 포착해냈다.
백운동 12경
제1경 : 옥판상기 –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
제2경 : 유차성음 – 산다경의 동백나무
제3경 : 백매임향 – 백매오의 매화 향기
제4경 : 풍리홍폭 – 단풍나무의 붉은 빛이 어린 옥구슬 폭포
제5경 : 곡수유상 – 마당을 돌아나가는 물굽이에 띄운 술잔
제6경 : 창벽염주 – 창하벽에 붉은 먹으로 쓴 글씨
제7경 : 유강홍린 – 정유강의 용 비늘 같은 소나무
제8경 : 화계모란 – 꽃 계단에 심은 모란
제9경 : 십홀선방 – 사랑채인 취미선방의 세 칸 초가
제10경 : 홍라보장 – 풍단 단풍나무의 붉은 비단 장막
제11경 : 선대봉출 – 옥판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선대
제12경 : 운당천운 – 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
이상의 글은 한양대 정민 교수가 엮은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에 나온 글이다. 사진 역시 그 책에서 옮긴 것으로 다산이 명명한 백운동 12경의 위치와 설명을 잘 되어 있다.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의 책을 보노라면 다산의 백운동시 13수 감상, 백운동에 보낸 다산의 편지, 백운동을 노래한 역대 인물과 시문, 백운동과 강진의 차문화 등이 소상하게 실려 있어서 백운동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말미에는 백운동에 관한 <결론> 부분이 있다. 첫째, 백운동은 몇 안 되는 조선시대 별서정원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공간이다. 백운동은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원림으로 각광받아 한 해에 100만 명 이상이 다녀간다는 담양 소쇄원 이상의 잠재 가치를 지녔다. 둘째, 백운동 별서정원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역대 명류들의 시문이 대거 남아 있는 문화공간이다. 셋째, 백운동 별서정원은 차문화사의 중요 문헌인 ⌜동다기⌟가 발굴되고 다산의 제다법에 따라 삼증삼쇄 떡차가 만들어진 차문화의 역사적 현장이다. 넷째, 차뿐 아니라 인근의 문화 명소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는 좀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 다섯째, 백운동은 한편으로 고려 중기 불교사의 핵심을 이룬 역사 공간이다. 대각국사 의천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시를 남겼고, 보조국사 지눌과 진각국사 혜심 등 고려 불교사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고승들의 수행처로 명성이 높았다. 백운동 별서의 시내 오른쪽에 남아 있는 백운암 터는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통해 당시의 규모와 자취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백운동 위편 산자락에 자리한 약사난야藥師蘭若는 고려 때 원묘국사다 주석했던 곳이다. 여섯째, 복원이 완료되는 시점에서 강진군 차원의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백운동이 새로운 관광 명소로 각인될 수 있도록 다양한 마케팅 전략이 요구된다.
이러한 의견은 백운동 별서정원의 위상과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초의는 부감俯瞰(헬기법)의 시선으로 전체 화면을 잡아서 다산 정약용이 노래한 백운동 12경의 풍광을 하나의 화폭에 담아냈다. 간결한 필치와 과감한 생략으로 백운동의 전경을 잘 포착해 낸 작품이다.
백운동 12경을 재현될 수 있는 금환락지 비밀의 땅
계곡물이 3천여 평을 휘감고 돌아가는 금환락지金環洛池 형국
백운동 12경중 제1경 옥판상기, 제2경 유차성음 등을 갖춘 땅
백운동 12경 중 제1경은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인 옥판상기玉版爽氣이다.
정민 교수의 ⌜옥판봉⌟ 설명을 그대로 옮겨본다. “옥판봉은 월출산 구정봉 서남쪽 정상 봉우리의 이름이다. 다산은 제목 바로 옆에 작은 글씨로 ‘옥판봉이 상쾌한 기운玉版爽氣’의 으뜸을 차지한다”고 하여 ‘옥판상기’의 상쾌한 기운을 12승사의 첫손으로 꼽았다. 백운 별서 아래쪽에 정유강이란 이름의 야트막한 등성이가 있고 이곳에 정선대란 정자가 세워져 있다. 이 정자에 올라 바라보면 옥판봉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는 다음과 같다.
내 예전 영산靈山에 놀러 와서는
옷깃 떨쳐 절정까지 오르려 했지.
힘 빠져 능히 내려오지 못하고
해 지자 입은 옷이 너무 추웠네.
사슴 가죽 깔개로 몸을 감싸고
여러 시내 웅덩이를 건너왔었지.
돌아와선 깊은 유감 품고 지내며
구슬피 구정봉만 올려다봤네.
그럭저럭 하다보니 7년이 지나
수염 터럭 어느새 고기 가실세.
굳이 묵은 소원 풀고자 하여
이에 다시 선경에 거닐었다네.
빙 둘러선 뭇 봉우리 고운 빛깔이
목을 길게 빼고서 나를 보는 듯
뭇 신선 티끌 먼지 깨끗이 씻고
단정하게 옥홀玉笏을 들고 섰는 듯.
빼어난 기운 푸른 옥색 맑기도 하고
엷은 구름 맑은 그림자 머금었구나.
우러러 바라보니 기쁜 맘 들어
수고로이 다리 시게 걷지 않았네.
이제야 알겠네 예전 오를 때
거칠게 기운만 부려댄 줄을.
산인은 산 위로 오르지 않고
가만 앉아 마음이 고요하다네.
시에 7년 전 월출산 구정봉 등정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고 썼다. 1812년 9월 12일의 산행은 말하자면 두 번째 월출산 등정에 나선 걸음이었다. 첫 등정은 1806년 8월 17일에 시도했었다.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던 다산이건만 산 정상 가까이 가지도 못한 채 탈진했고 날까지 저무는 바람에 도중에 포기해야만 했다. 오한을 못 견뎌서 안장 깔개로 가져간 녹피를 몸에 두르고 허둥허둥 시내와 구덩이를 수없이 건너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에 지은 시는 ⌜다산시문집⌟ 권5에 ⌜월출산 정상에 올라⌟란 제목으로 남아 있다. 잠시 읽어본다.
우뚝이 뿔 하나가 맑은 허공 꽂혀 있어
남녘 땅 진압하는 바위 기세 웅장하다.
청해의 안쪽 땅은 두힐豆肹이라 봉했던 곳
탁라의 성곽이 저녁 안개에 잠겼구나.
골짝에선 손등孫登의 휘파람 소리 절로 나니
완적阮籍의 막힌 길을 천지에 뉘 근심하리.
임금 계신 창덕궁 지붕 어느메에 있는가
상서론 붉은 구름 적상산이 막고 섰네.
정상에 오르지도 못했으면서도 말로는 절정에서 지었다고 기염을 토한다. 삐죽 솟은 월출산은 허공중에 뿔 하나가 우뚝한 형국이다. 이 산이 남녘의 산하를 발아래 거느려 웅장한 산세를 뽐낸다. 바닷가 나주목의 회진현은 백제 적에 두힐이라 불렀다. 탁라, 즉 제주의 성곽이 저문 안개 너머로 보일 것만 같다.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이 은사 손등孫登을 만나 신선술에 대해 묻자 손등은 대답도 않고 휘파람만 불며 떠나간 일이 있었다. 그 완적은 수레를 몰고 아무 데나 가다가 길이 막히면 통곡하며 돌아섰다는 궁도곡 窮途哭의 울보로 유명하다. 이 멋진 산에 올라와 가슴이 툭 트이는 광경을 보고 나니 자신이 마치 손등이 된 듯한 느낌이 일어 완적의 울음 따위는 간데없더란 말을 이렇게 했다. 한편 문득 임금 그리운 생각에 서울 쪽 하늘을 돌아다 보니 신선이 수행한다는 무주 적상산 중턱에 상서론 붉은 구름이 자옥하더라며 자신의 감회를 실었다.
어쨌거나 당시의 등정은 중도에 체력 저하로 인해 실패로 끝났고, 이후 다산은 멀리 구정봉을 올려다볼 때마다 그때의 좌절을 아쉬워했던 듯하다. 어느덧 7년 만에 정상 등정의 숙원도 풀 겸 월출산 자락의 선경仙境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가을을 맞아 붉게 물든 단풍이 마치 자신이 오기를 기다려 목을 길게 빼어 내다보는 것 같았다며 설렌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오랜만에 올려다본 옥판봉의 삐죽삐죽 솟은 바위들은 뭇 신선이 티끌세상의 먼지를 깨끗이 털고 단정하게 나란히 서서 옥홀을 들고 하늘에 예를 올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상쾌한 기운은 옥빛 하늘에 시원스러웠고, 그 위로 흩어지는 엷은 구름이 이따금 맑은 그림자를 땅 위에 스치고 지나갔다. 다산은 이번에는 정상 등정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올려다보기만 해도 기쁨이 차올라 굳이 정강이가 시리도록 걷는 수고를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일정도 덩달아 넉넉하고 마음마저 여유로웠다. 그제야 7년 전 자신의 산행이 공연한 욕심으로 기운을 부린 일인 줄 깨달았다.
끝의 두 구절에 나오는 산인山人은 백운동 주인 이덕휘를 가리킨다. 그 산 아래 사는 집주인은 굳이 산에 오를 욕심을 부리는 법이 없다. 그는 편안히 앉아서 날마다 산을 우러러보아 그 마음이 언제나 고요하다고 했다. 자신도 진작에 이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표현이다.
이 같은 시의 내용으로 보아 다산은 두 번째 등정에서는 월출산 구정봉 자락을 서성이며 구경하다가 일찌감치 정상 등정을 포기하고는 백운별서로 찾아들었던 듯하다. 그곳에서 주인 이덕휘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집안의 문적을 살피며 융숭한 손님 대접을 받고 하룻밤 유숙했다. 이덕휘의 어머니인 해남 윤씨가 다산의 외가와 가까운 인척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다산이 이후 백운동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이름 앞에 먼 일가임을 나타내는 ‘척기戚記’ ‘척말戚末’ 등의 표현을 즐겨 쓴 것도 이 때문이다.
이날의 정황은 이덕휘의 아들인 이시헌의 기록에도 꽤 상세히 남아 있다. 그가 쓴 ⌜다산의 옥판봉 시운에 차운해서 정유상에게 부쳐 보내다⌟의 서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예전 임신년(1812)에 탁옹(정약용의 별호)께서 다산에서부터 걸어오셔서 월출산에 오르셨다. 돌길이 위태로워 천황봉 정상까지 오를 수 없게 되자 길을 돌려 백운동으로 들어오셔서 (옥판봉 12운) 시를 남기셨다.
이어지는 장시 중에도 “예전의 초상苕上께서, 사슴 가죽을 두르고 구덩이길 내려와 저물녘에 백운동에 들어와서는, 구정봉 못 오름을 한하셨었지.”라고 적은 대목이 보인다. ⌜자이집⌟권1에 실려 있다. 다산이 시에서 한 말과 달리 구정봉 정상까지 등정하려다가 길이 무척 위험해 결국 포기하고 저물녘에 허둥지둥 백운동을 찾아든 모습이다.
어쨌거나 다산의 이 ⌜옥판봉⌟ 시는 자신이 백운동을 찾게 된 내력과 예전 등정의 과정 및 두 번째 등정의 느낌 등을 상세히 적고 있어 전체 12경의 서설 격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이렇듯 정민 교수의 표현처럼 옥판봉은 백운12경의 제1경이다. 그 옛날 월출산은 지금처럼 수목이 우거지지 않았기 때문에 백운 별서 정자에서 치어다보면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혀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계곡을 사이에 둔 별서 정원 아래쪽 금환낙지 형국에서는 사진처럼 훤히 바라다볼 수 있다. 백운 별서 제1경이 송두리째 한 눈에 보이는 것이어서 제대로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제2경은 ⌜산다경⌟이다. 산다경은 백운동 입구에서 시내를 끼고 별서로 들어가는 동백나무 숲 소로를 가리킨다. 다산은 백운동의 제2경으로 ‘유차성음’, 곧 유차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이 길을 꼽았다. 유차는 동백나무의 별칭이다. 동백은 대나무와 함께 백운동을 대표하는 수종이다. 수백 년 된 둥치 굵은 동백 숲이 이제껏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장관이다.
언덕을 끼고 심은 동백나무가
이제는 길 가득 그늘 만드네.
가지마다 꽃 보숭이 맺혀 있으니
세한歲寒의 마음을 남겨둔 걸세.
지금도 백운동 입구에서 백운동 별서로 올라가는 길가에는 동백나무 숲이 건강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숲이 하도 깊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시 속의 ‘만로음滿路陰’, 즉 길 가득 온통 그늘이라는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겨울 눈 속애 가지 끝마다 붉은 꽃 보숭이가 피어나면 굳이 소나무와 잣나무가 아니라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시듦을 안다고 한 공자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의 기상을 떠올리게 된다. 동백꽃의 선연한 붉은빛은 눈 속에 피어난 뜨거운 정열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다산은 먼저 옥판봉 시에서 백운동 별서의 전체 환경을 조망한 뒤, 두 번째 산다경에서 백운동 별서 초입의 동백 숲길을 노래함으로써 그 풍과에 들어서는 감회를 피력했다. 키워드는 ‘세한심歲寒心’이다. 역경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마음을 말해 주인의 덕성을 슬며시 높였다.
정민 교수의 말을 빌려 지금까지 백운 별서정원의 제1경과 제2경을 설명했다. 제2경인 산다경 역시 별서 정원의 아래쪽에도 고스란히 동백 숲이 이어지고 있다. 기암괴석과 함께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동백들이다. 그런 동백들이 기암괴석에 얽혀 서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입을 떡 벌리게 한다. 당연히 동백 숲으로 인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해질녘 빛이 들어오면 오로라 환상까지 일으킨다.
그런데 이 땅은 절묘하게도 금환락지의 형국이다.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라는 뜻으로 풍수지리설에 근거를 명당. 풍수지리설에서 금귀몰니(金龜沒泥 : 금거북이 진흙 속에 묻힌 터), 오보교취(五寶交聚 :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5가지 보물이 쌓인 터)와 더불어 3대 명당으로 꼽힌다. 금환락지는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한 뒤 아시 하늘로 오르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을 뜻하는 길지(吉地)이다. 또는 한반도의 형상을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여성의 모습으로 보면 전라남도 구례땅이 여성의 옥음(玉陰)에 해당된다고 한다. 과거에는 여성이 출산하거나 성행위를 할 때만 가락지를 빼놓는 것을 상례로 여겼는데, 이곳이 바로 출산이라는 생산행위를 위하여 금가락지를 빼놓은 금환락지의 명혈(明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땅은 어디에 있는가.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雲鳥樓)가 그에 해당된다. 토지면의 본래 한자 명칭은 손가락에 낀 금가락지를 토해냈다는 뜻의 토지면이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풍수지리설에 유래된 것이다. 운조루 앞 넒은 들을 휘감고 흐르는 섬진강의 형세는 영락없이 백운동 별서정원 앞에 자리한 3천여 평의 형세와 비슷하다.
이 땅을 지난 주에 실사한 풍수사 천지인(天地人, 본명 김용진))은 “아무리 넓은 땅이라도 혈이 없는 경우도 있는데, 유독 이곳은 혈이 수백 평 퍼져 있다”며 “좌청룡 우백호도 원만하게 자리하고 있어 월출산 아래 길지가 아닐 수 없다”고 평했다. 글 송하훈(소설가)
옥판봉의 ‘옥판상기玉版爽氣’
다산 정약용은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이야말로 백운동의 첫손 꼽는 풍경이라고 칭찬했다.
월출산 옥색 계곡물이 휘감고 흐르는 금환락지(金環落池) 형국
전남 3대 정원 중 하나인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바로 아래의 땅
초의선사 ⌜백운동도⌟의 꼿꼿이 우뚝 선 옥판봉이 훤히 보이는 곳
백운동 별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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