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초고령화시대(76회)
신전면 대벌마을
윤대근(90)할아버지
“사람이라는 것은 어디를 가든지 사정할때는 해야지, 꿋꿋만 해가고는 안돼”
“내 애기해봐야 구식탱탱 먹은 소리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일자형 고옥 높은 툇마루에서 윤대근할아버지(90), 김상순(88)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다. 김할머니는 회관에서 해주었다는 파마머리를 수건으로 감고 있다가 풀어야 한다며 툇마루를 조심스레 내려갔다. 두 분이 하루 종일 툇마루만 올라 다녀도 엄청난 운동이 될 듯 높은 마루다.
“산 귀신이여 산 귀신.”
“누구오먼 넘 부끄러워서······.”
두 분이 험한 말을 편안히 주고받는 모습이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복 중에 가장 큰 복인 수복을 함께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툇마루에 함께 앉아서 저 멀리 바다를 넘어다보려다 흙 마당 건너편 헌 창고에 세워진 반짝반짝 빛나는 오토바이 한 대에 눈길이 갔다. 윤할아버지가 타고 다니는 자가용이다.
스무살에 두 살 아래인 색시와 결혼한 윤할아버지는 결혼 2년 만에 일본으로 징용을 떠났다. 아직 젖도 떼지 않은 딸이 있었다.
“예고없이 차에다 싣고 가불어, 강제로 태우고 강진읍에 집합시켜 불던때여. 그때는 신작로에 보이는 철이고, 밥그릇 국그릇 숟가락이고 그냥 뺏아가부러, 공출낼 때 안낼라고 쬐끔씩 감촤 놓고 묵고 그란 세상을 살았어. 나락가마니를 산 속에 지고 가서 감추고 살고 그랬지.”
갑자기 차에 실려간 윤할아버지는 강진읍 집합소에 내려졌다. 그 곳에서는 각 면에서 잡혀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하루를 보낸 후 다음 날 부산으로 실려 갔다.
“못 도망가게 단도리(단속)를 해가고 차에 태워부러. 화관땅(일본)에 내린게 옴짝달싹을 못하게 기차에 다 싣고 가서는 야이스정거장에서 전부 내리라고 하더니 어느 창고로 50여명 정도씩 몰아넣어”
그곳에서 또다시 소지품 검사를 받는다. 혹시나 집에 편지를 쓰기 위해 주소를 적은 종이를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고, 몇 푼의 돈을 지니고 온 사람도 있다. 윤할아버지는 50원짜리 지폐를 지니고 있다가 침을 발라 둘둘 말아서 윗저고리에 급히 숨겼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물론 주소는 찢기고 돈은 뺏겼다. 그 중에서도 주소를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은 더 심한 조사를 받게 되었다. 각 일터로 옮겨진 후 사흘을 쉬게 한 다음 나흘째 되는 날 각자 정해진 현장을 구경시켰다. 그 현장은 굴을 파는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구루마에 흙을 싣는 일이 있고, 자갈 고르기 등 각자 일이 할당되었는데, 윤할아버지는 굴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굴 앞까지는 견딜만 허겄더만, 구루마를 타고 안으로 들어간디 점점 좁아짐서 천장에 목이 닿아 떨어질라고혀. 아따, 욱에서 물은 뚝뚝 떠어진단말여······죽겄더만 밖으로 나온게 숨이 쉬어져.”
한 번 굴속 일을 경험한 윤할아버지는 더 이상 굴일을 하다가는 그대로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로 불면증에 시달렸고 여러모로 도망갈 꾀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디었다. 그러다가 징용 온 사람들을 감시하고 밥을 해주는 일명 ‘밥쟁이’와 친하게 지내면서 속 깊은 말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윤할아버지는 ‘밥쟁이’에게 굴 일은 숨을 쉴 수가 없으니 다른 일을 하게 해달고 사정하여 일터를 바꾸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기에 언제든지 도망칠 생각뿐이었다. 나고야에 집안 매제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편지를 보낼 수도 없었다. 오고가는 모든 서신은 검색을 하기 때문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윤할아버지는 ‘밥쟁이’에게 사정해서 고향 벌정리에 편지 한통을 보냈고 검색을 피하기 위해 접봉투를 이용하여 나고야에 살고 있는 집안 매제 주소를 입수했다. 매제에게 편지를 보냈고 모날 모시에 정거장에서 매제를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가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밥쟁이’와 함께라면 쉽게 나갈 수 있었기에 이발을 하러 가겠다고 했으나, 그날따라 ‘밥쟁이’가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다가오고 걱정이 되었다. 언제든 도망갈 생각을 했던 윤할아버지는 평소에도 늘 양복을 입고 다니곤 했기 때문에 그날 양복을 입고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사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나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에 정거장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날 데리러 온 사람같으먼 사방을 살펴볼 것인디, 어떤 사람이 별로 그런 기색이 없더니 그냥 가불더만, 그 뒤에 나온 사람이 사방 둘러 보더만·······그때 만나서 기차 맨 끝으로 가서 앉아서 애기를 했지. 나중에 매제가 집에서 해왔다는 찰밥이랑 먹을 것을 기차 앞쪽에다 모두 놓고 내렸지 뭐여, 만나서 서로 할 말이 많아 아무 겨를이 없었지.”
징용터에서 도망친 윤할아버지는 집안 매제를 만나 다른 곳에서 일을 했다. 징용에서 100원 수입이라면 다른 곳에서는 10배를 더 받을 수 있었다. 매제가 소개시켜준 일터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돈도 모아진 윤할아버지는 마을에서 함께 징용가서 있었던 세 사람을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편지를 썼으나 쉽게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 나오려면 차표를 구해야 했고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차표를 구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때에 우연찮게 두 장의 차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경상도에서 왔다는 어떤 사람이 돈을 상당히 벌어서 고향에 가려고 정거장에 왔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정거장이 폭발해 버렸다. 결국 그 사람은 그동안 모았던 모든 돈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꼴로는 집에 돌아갈 면복이 없어 못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표가 소용없게 된 경상도사람이 윤할아버지에게 차표 두 장을 넘겼고, 논정에서 온 사람과 함께 차에 올랐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항구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지만 미군기가 항구에 폭격을 가해왔기 때문이다. 연락선에 스파이가 있기 때문에 미군이 배에다 늘 폭격을 가한다고 들려왔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면서 기다리던 연락선은 들어오지 않았고 표를 가지고 고향으로 가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코가 석자나 빠져서 허덕거렸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이 ‘오늘 차표 끊은 사람은 한쪽으로 모이라고 하더니 모인 일행을 차에 태웠다.
“차가 자꾸 산속으로 산속으로만 들어가는거여. 암마, 어디로 또 고생허로 가는게비다, 허고 있는디······바다가 보이더만, 그러고는 내리라고 하더니 연락선을 타라고 하더만 검은 고무옷(잠수복)을 모두 입히고는 폭파를 해도 얼마간은 물속에서 있을 수 있다고 허더만.”
연락선을 타긴 탔으나, 이제는 살아서 돌아가겠구나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때문에 자포자기한 체 들어 누워 있을 때, 누군가가 산이 보인다고 소리를 쳤다.
“번쩍번쩍허니 산이 무장 커지더만······경상도사람 표라서 대전까지 올라갔다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차표를 못 사고 사흘나흘 역전 앞에서 둘이 지낸디, 누가 다가와서 그러더만·······일본가 전부 불땡이 되어 부렀다고 허던디 어찌되었소. 우리 형님이 걱정 되아서 물어보러 왔소.”
윤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벌어온 20만원으로 고향에 돌아와 논 4마지기를 구입했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디를 가든지 사정 할 때는 해야지, 꿋꿋만 해가고는 안돼.”
(이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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