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이지현(해남여고 3년)
새가 날아간다. 눈발이 잦아진 갈밭 푸석한 머릿결을 바람이 무심하게 헝클어놓는다. 저수지를 둘러싼 갈대밭은 오소소 쉰 목소리를 낸다. 길게 브이자를 그리며 한 무리 새가 날갯짓을 한다. 브이자 꼭지점에 찍힌 새가 느린 날개 짓을 하자 뒤따르는 새들도 한 박자를 늦춘다. 굽은 강 허리를 한 묶음 잘라 메운 저수지 위에 내려앉는다. 늙은 노을빛이 서서히 젖어드는 강가 위에 떠나는 쓸쓸한 철새무리의 울음이 저수지 살얼음을 할퀴어 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이즈음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창을 넘겨다보면 여름을 북녘 땅에 날갯죽지를 부비다가 겨울이면 남녘땅으로 내려오는 철새가 이 고수부지에 날아들었다. 내가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도시에서 사업을 접고 아는 분께 양계장을 인수해서 아버지는 이곳으로 오셨다. 마흔 평생 삽질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터라 이것저것 잦은 실수 때문에 몇 년 동안 버는 돈 없이 버리는 돈이 전부였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소매 깊숙이 스며들었다. 계절은 점점 모든 생명의 불씨를 꺼트려버리고 죽음을 향해 위험한 졸음을 졸고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기운이 아버지의 양계장에 고였다. 처음부터 닭들이 잠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양계장에서 닭똥의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쳤다. 뒤뚱 뒤뚱 걸음이 유난히 뒤처지던 암탉 한 마리가 고꾸라졌다. 닭똥이 꾸덕꾸덕 말라붙은 모이통을 쥐던 아버지는 쓴 신음소리를 내셨다.
“이놈의 조류 독감이 가시질 않는구나. 내일이면 여기에 있는 닭들, 다 묻는다구 하더구나. 이번 고비만 넘기면, 그러면…이제 겨우 일어설 수 있게 됐는데… ”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그대로 주저앉으셨다. 흐끅거리는 어깨는 점점 작아졌다. 오백여 마리 남짓한 양계장을 둘러보니 그 많던 닭들 대부분이 꾸벅꾸벅 졸거나 털이 빠져 부연 살갗을 드러내었다. 눈이 풀린 닭 한 마리가 끅끅 거리더니 발치에 부딪쳤다. 나는 문득 오는 길에 봤던 새떼가 생각났다. 누군가 모이를 주거나 주사를 놓지 않아도 그들은 날개짓을 했다. 순간 무르익은 겨울 강가를 뒤덮는 철새들이 양계장 위로 활강을 했다. 날개가 있어도 푸드덕 거릴 뿐 날수 없는 닭들은 그들의 가벼운 깃털 때문에 힘없이 죽음의 시커먼 입 속으로 먹혔다.
다음날, 양계장 가까운 곳에서 포크레인이 거친 쇳소리를 뿜어대었다. 구덩이가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양계장의 빗장이 풀리자 갑자기 자신들의 얄팍한 거죽을 찌르는 빛줄기 때문에 놀란 닭들은 퍼덕거렸다. 얼굴을 뒤덮은 마스크 사이로 아버지의 지친 눈이 드러났다. 아버지는 털이 우후죽순으로 뽑히는 닭 날개를 꺾어 쥐시고 구덩이 앞에 서셨다. 눈꺼풀이 가물가물 거리는 닭이 구덩이 바닥에 고개를 쳐 박자 그 위로 흙 한 삽이 뿌려졌다. 돌아서는 아버지가 양계장이 아닌 고수부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언뜻 보였다. 희부연 입김처럼 아버지의 발걸음이 흩어졌다. 아버지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등은 터무니없이 작아져 손가락이라도 대면 금방이라도 바스라져 버릴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행적을 감춘 지 꼬박 삼일 후, 고수부지 표면에 떠오른 아버지의 얼굴은 퉁퉁 불어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었지만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에 벌건 눈물 자국이 묻어있었다.
한 무리의 철새 떼들이 자리를 뜨자 이윽고 꼬리에 흰 줄무늬가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또 다른 새 떼들이 날개를 휘젓는다. 이번엔 수 천 마리에 달하는 거대한 군을 이루고 있다. 새들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날아드는 것일까. 문득 고개를 들자 짙은 코팔트에 젖어든 하늘에 금세 어둠이 내린다. 해가 저무는 곳을 따라 새들을 발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마치 재앙을 연상케하는 한 폭의 그림 속에서 나는 비명을 듣는다. 저수지 차가운 물결에 천천히 젖어드는 아버지의 것인지 소리 없이 구덩이에 묻힌 닭들의 날카로운 원망인지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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