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무위사
이성남(광주지방조달청장)
무위사를 다시 찾게 된 건 우연이었다. 광주에 부임한 이후 바쁜 일정에 지쳐 잠시라도 업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 즉 ‘無爲’가 문득 떠올라 휴일아침 일찍 무위사로 향했다.
사찰 입구에 들어서니 기암괴석의 월출산이 병풍처럼 절을 감싸고 있다. 그래서일까. 마치 어머니 품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한결 포근하고 위안이 됐다. 해탈문을 통해 들어간 극락보전 앞마당은 더욱 아늑했다.
마당 곳곳에 뿌리내린 푸릇한 후박나무와 높게 솟은 팽나무, 단아한 동백나무와 화려한 꽃을 머금은 매화가 한데 어우러져 진귀한 멋을 풍겼다. 한 지인이 무위사를 두고 ‘조선의 선비 같은 절’이라고 칭했던 연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왼쪽에 자리한 성보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보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벽화박물관이다. 우리나라 불교 미술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는 무위사 벽화를 완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지난 2006년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불후불벽화와 아미타래영도, 석가여래설법도 등 모두 29점이 보관돼 있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면 아미타삼존불화가 먼저 눈에 띈다. 그림 중앙에 서 있는 본존불은 설법을 하고 있고 좌우에 있는 보살상과 6비구는 본존불 쪽으로 몸을 약간 돌리고 서 있다. 본존불은 우리 눈에 익은 부처의 둥글고 후덕한 얼굴형이 아닌 사각형에 가깝다.
아미타삼존불화 앞에 서니 오랜 세월의 흔적이 화려한 색채에 얹어져 더욱 고귀한 분위기가 풍긴다. 처음엔 그저 유구한 세월 탓에 고풍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이곳 불화는 현존하는 아미타불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삼존불화에 이어 만난 작품은 아미타래영도다. 아미타불이 8대보살과 8비구를 거느리고 극락세계에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그림이다. 많은 인물들이 그려졌는데 얼굴표정이 매우 익살스럽다. 벽화속 인물표현에서 장난기 어린 화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벽화가 있는 성보박물관에 들어서니 생전의 아버님이 생각났다. 부친은 본존불 탱화에 담긴 옛 이야기를 즐겨 해주셨기 때문이다. 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무위사 법당이 완성된 어느 날, 지나던 도사가 법당에 탱화가 없는 걸 보며 아쉬워했다. 도사는 천고에 남을 절을 위해 벽화를 그리겠다고 자청을 하고 그림이 완성될 49일 동안은 누구도 안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스님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도사는 법당에 들어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그림만 그렸다.
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가 마지막 날 법당을 엿봤다. 그 순간 입에 붓을 물고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려던 파랑새(도사)는 날아가 버렸다. 이런 연유로 본존불 탱화 속의 한 부처는 지금도 눈동자가 없다. 지나친 호기심을 경계하라는 선현들의 가르침이리라.
박물관을 나와 법당으로 다가가니 소승의 목탁소리가 마음을 더욱 경건하게 한다.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굽이치나니/굽이치는 그 자리가 실로 그윽하다네./ 이 흐름을 따라 본성을 알면/기쁠 것도 없고 또한 슬플 것도 없다네.”
언젠가 송광사를 찾았을 때 가슴에 와 닿아 적어 둔 선시다. 중생은 슬픔과 기쁨 등의 감정으로 울고 웃지만 그것은 현상에 대한 인간의 생각일 뿐 정체가 없다는 뜻일 게다.
일상의 고단함을 비우기 위해 무위사를 찾았던 필자는 사찰을 품에 안은 월출산의 비경과 고목의 푸릇함, 청아한 목탁소리와 따뜻한 남풍에 도리어 혼란스러웠다. 비우러 왔다 더 채우고 가는 곳, 그곳이 바로 강진무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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